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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0636924
· 쪽수 : 252쪽
책 소개
목차
스노우맨 / 서유미
첩첩 / 구경미
하카타轉多 역에는 눈이 내리고 / 조해진
첫눈과 소원과 백일몽 사이에 숨겨진 잔인한 변증법 / 김이은
눈의 물 / 김현영
소설 小說 小雪 / 박주영
눈 위의 발자국 / 김유진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새해의 첫날, 도시는 일찍부터 깨어 움직였다. 새해에는 늦잠 자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간밤의 여흥에 젖어 아침까지 번화가와 유흥가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브런치 약속이 있는 사람, 가족 단위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 다이어리를 사기 위해 서점에 가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기상이변 때문에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지만 해가 기울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자 도시는 한결 따뜻해 보였다. 눈송이는 고요히 낙하했지만 그걸 발견한 사람들은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요란하게 침을, 누군가는 입버릇이 되어버린 욕을 내뱉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든 채 감탄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카페나 술집 안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도 와, 하며 입을 벌렸다. 흐지부지 내리다 만 첫눈 이후 도시에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새해 첫날 저녁, 고요하게 나부끼는 눈송이는 꽤 괜찮은 이벤트처럼 보였다.”
서유미, 「스노우맨」에서
“이십 년 만의 폭설이라 했다. 높은 빌딩 위 멀티비전으로는 폭설을 맞은 규슈의 곳곳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도로에 엉킨 차들과 갓길에 수북이 쌓인 눈 더미, 거대한 제설차와 야광봉을 휘두르며 수신호를 주고받는 사내들, 그리고 우산을 받치며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행인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도 규슈인데 멀티비전을 통해 본 규슈는 긴급조치가 내려진 도시처럼, 혹은 불시착한 비행기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비행장처럼 더더욱 긴박해 보인다. 나는 불가해한 시선으로 멀티비전과 내 앞의 풍경을, 그 기묘한 대비를 번갈아 바라본다. 지금 내 앞에서 가볍게 날리는 눈발은 빌딩 위에서 조심스럽게 방사하는 종이가루처럼 그저 무구해 보일 뿐이었다. 그건, 예정에 없던 신scene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허술한 소품 같기도 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건물 차양에 서서 손목시계를 또 한 번 내려다본다. 호텔을 나와 점심을 먹었고 역 근처 쇼핑몰에서 기념품도 구입했지만 5시가 되려면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카타 역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의 공중전화기로 H에게 전화했을 때가 아마 오전 10시쯤이었을 것이다. 십 년 만에 통화한 H는 내 목소리를 한 번에 기억하지 못했다. 짧은 순간, 전화한 것을 후회했지만 규슈에 와 있다는 내 전화를 그는 단 한 번도 예상한 적 없었을 터이기에 그 후회의 순간조차, 나는 곧 후회했다. 여행 책자의 접힌 페이지를 펼쳐놓은 후 공중전화기의 차가운 버튼을 꾹꾹 누르다가 다섯 번이나 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던 내 행동을 H가 꼭 봤어야 한다는 한심한 생각까지. 후회할 수 있다면 가능한 많이, 최대한의 범위에서 나는, 후회하고 싶었다.
만나러 좀 와줄래요?”
조해진, 「하카타轉多 역에는 눈이 내리고」에서
“이름 모를 날벌레처럼 희끗희끗 흩날릴 뿐이던 눈은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선명한 눈송이로 변해갔다. 마치 비듬 같았다. 격조가 낮은 비유라는 거 안다. 그래도 이해해주렴. 너의 커다란 우정이 마침내 내 사랑마저 받아줬던 오래전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거든.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광채를 내뿜고 있었고 머리에서는 하얗게 빛나는 주먹만 한 비듬이 끝도 없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분명 너저분한 장면이었지만 때깔은 참 좋았다. 심지어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다음 날 해몽을 찾아보았지. 가장 커다랗고 오래된 걱정거리들이 싹 사라질 것을 암시하는 좋은 꿈이더군. 그래서 내게는 꿈속의 그 비듬이 세상에서 가장 탐스런 눈송이다. 나의 비듬은 그런 거다. 너에 대한 내 사랑도 어쩌면 그런 거. 듣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어쨌거나 비듬 이야기니 별로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만 같은.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안나, 나도 굳이 내 사랑에 대해 말하지는 않으려고 해.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너는 더 이상 내게 네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다만 커다란 귀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월 대보름달처럼 귓구멍 한껏 열어두고서 너를, 너만을, 들을 거다. 언제고 너에게 편지를 쓰겠지만 너는 결코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어장에 세든 내가 당연히 지불해야 할 월세라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난 꽤 성실한 남자지. 셋돈을 떼먹는 일은 없을 거야, 안나.”
김현영, 「눈의 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