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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가톨릭 > 가톨릭 일반
· ISBN : 9788932112626
· 쪽수 : 348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제1부 시대의 징표들
1. 교황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다/ 2. 성 추문 /3. 위기의 원인과 기회/
4. 지구 전체의 재앙/5. 상대주의의 독재/6. 회개할 시기
제2부 교황의 직무
7. 하베무스 파팜(새 교황 뽑히셨네!)/8. 어부의 신발 속에/
9.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과 이슬람과의 대화/10. 복음 선포/
11. 사목 방문/12. 윌리엄슨 사건
제3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13. 교회와 신앙과 사회/14. 개혁이 정체되었다?/15.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6. 성모 마리아와 파티마의 메시지/17.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18. 최후의 것들에 대하여
부록
무방비 상태 어린이들에 대한 중죄
(2010년 3월 19일자,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낸 사목 서한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2005년 12월 23일, 로마)
신앙과 폭력(2006년 9월 12일,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에이즈와 성의 인간화(2009년 3월 17일, 카메룬행 비행기에서 한 인터뷰에서)
훈령 <보편 교회Universae Ecclesiae> 요약
종교에 자유가 필요한 것처럼 자유에도 종교가 필요해
(2011년 9월 22일, ‘연방 대통령 관저’에서)
만들어 낸 신앙은 무가치해
(2011년 9월 23일, ‘에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개신교 예배당’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이력
찾아보기
역자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페터 2009년 성 비오 10세회 소속 네 명의 주교에 대한 파문 철회가 최초의 균열이었습니다. 이 사건과 그 배후의 잘못된 배경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교황님은 그 전까지 ‘베네딕토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높은 존경을 받으셨는데, 단숨에 ‘운 없는 교황’, ‘세상 절반의 화를 사는 사람’이 되고 마셨습니다. 논평들은 그야말로 참담했습니다.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은 유일무이한 반교황 미디어 캠페인에 직면하여 저널리스트들의 ‘공격적인 무지’에 대해서 말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유다계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제는 ‘온갖 편견과 편파에 심지어 거짓 정보’가 난무한다고 했습니다. 그 파문 철회는 잘못된 일이었나요?
교황 아무래도 파문 철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많이 퍼졌는데, 배웠다는 신학자도 갈피를 못 잡긴 마찬가지였거든요. 그 네 명의 주교들은 사람들의 추측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부정적인 행동 때문에 파문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위임 없이 주교품을 받았기 때문에 파문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적용된 관련 법규는 바로 옛 교회법에 의한 것입니다. 그 법에 따르면 교황의 위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교 서품을 하는 사람이나 서품된 사람은 파문을 당합니다. 즉 그들이 파문당한 것은 교황의 수위권에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주교들이 교황의 위임 없이 서품되었고, 교황과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지요.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교가 된 사람이 교황의 일반적 수위권과 현재 직무를 수행 중인 교황의 수위권을 별도로 인정할 경우 그 파문은 철회됩니다. 그런 경우 더 이상 파문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경우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이를 통해 서서히 균열이 메워지길 바라면서요. 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경우에도 그와 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정리하면, 그들은 교황의 위임 없이 서품되었다는 이유로 파문당했으나 이제 교황을 인정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파문이 철회된 것입니다. 비록 아직은 모든 점에 있어서 교황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요.
이 자체로 보면 정상적인 법적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 측 언론 홍보가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 싶네요. 이 주교들이 파문당한 이유며 순수한 법적 근거로만 보더라도 파문 철회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페터 진보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 기후 회의에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지구 상의 수많은 국가가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첫 모임을 가진 뒤 코펜하겐 정상 회의까지 오는 데 무려 17년이 걸렸습니다. 과학자나 환경 운동가와 정치가들은 코펜하겐 정상 회의를 일컬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의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회의는 유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촉탁을 받은 1,000명 이상의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구의 온도는 지금부터 최대 2도 이상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이 될 경우 기후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바뀔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코펜하겐 협상 문서 초안의 내용에는 구체적인 수치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2도라는 한계를 넘어서리란 것은 이제 확실해 보입니다. 그 결과는 태풍, 홍수로 죽은 곡식이며 과일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기후 변화와 같은 위협을 인류가 함께 노력해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옳은 것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교황 이 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재앙에 대해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인식이 도처에 있습니다. 아울러 지구 전체 차원의 책임이라는 의식도 있습니다. 윤리를 더 이상 일정 집단이나 민족과 결부지어서는 안 되고, 지구와 모든 사람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사람은 확실히 도덕을 인식하는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잠재력을 정치 의지와 행위로 바꾸는 일은 자기 포기의 자세가 없어 다시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일은 국가살림으로 전환되고 결국에는 개개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다시 각각의 집단마다 서로 다른 부담이 문제가 됩니다. 이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인류 전체, 특히 개발과 진보의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고 심오한 도덕의식이나 인생의 가치관이 될 자기 포기에 대한 마음가짐 없이는 정치 의지도 결국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렇습니다. ‘모두가 긍정하고 찾는 위대한 도덕 의지가 어떻게 하면 개인의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정치가 무기력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러한 보편 의식이 개인의 의식 차원으로 파고들어 자리잡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겉보기에 거창한 행사만 여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가까이 있으면서 오직 양심에 호소하는 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렇게 볼 때 교회가 나서야만 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 큰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이 문제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양심에 가까이 있으며 그들이 일정 수준 도덕 의지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도덕의 근본이 되는 태도를 영혼에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페터 상대주의적으로 변화된 세상에서는 새로운 이교 문화가 갈수록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 말고도 교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마치 진공 같은 영역뿐만 아니라 반교회적인 세력까지도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어느 신문은 로마에 있는 교황은 오늘날 ‘이 나라에서 통하는 종교, 곧 ‘시민 종교’에 위배’된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전에 이탈리아 상원의장을 지냈던 마르셀로 페라가 분석한 것처럼 일종의 새로운 문화 투쟁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는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세속주의의 대규모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교황 관용적이지 못한 분위기가 새롭게 확산 추세라는 것은 공공연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익숙해진 생각의 척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위 ‘바람직하지 않은 관용’으로 선언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바람직하지 않은 관용 때문에 공공건물에 십자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지요. 그 바탕에 놓인 뜻을 본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아량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은 종교, 즉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 이상 눈에 띄게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가톨릭교회를 옥죄어 동성애라든가 여성의 성직 서품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바꾸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교회 나름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종교를 절대적인 척도로 만들어 누구나 다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지금까지 전해 온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자유’로 보이겠지요.
그렇지만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결국은 새로운 종교의 편협한 요구로 이어집니다. 그 종교가 합리적이라서 보편타당하다고 사칭하면서, 또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에 모두에게 기준이 되어야만 할 공간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관용의 이름으로 관용을 철폐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른바 서구의 이성이 이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에 적대적인 전체주의를 내세우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이 위험을 아주 단호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강요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종교’만이 모든 걸 결정하고 전체 인류에게 의무가 되는 종교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아서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