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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국외 BL
· ISBN : 9788960525252
· 쪽수 : 48쪽
책 소개
목차
THE BRIDE 3
추신 31
CHARACTER PROFILES 36
STUDIO SKETCHES 40
FREE TALK 44
책속에서
“제시라고 불러 주세요.” 조수석에 탄 그가 차 문을 닫자 우리 둘은 내 차라는 작은 공간 안에 세상과 단절되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혀끝에서 굴려 그 어감을 음미하면서, 차를 다시 출발시켜 인적 하나 없는 황량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참이었지만 낮 동안에 지글지글했던 열기는 아직도 아스팔트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니 정말 반갑네요.” 그가 말했다. “계속 걷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은색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몇 시간은 걸었던 것 같아요. 나한텐 이게 유일한 시계인데 배터리가 떨어져서… 그러더니 차도 뻗어 버렸죠.”
“어디까지 가지?”
그는 내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도시 이름을 댔다. 나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주유소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그가 물었다. “아니면 전화라도 할 수 있는 데가 있나요?”
“여기는 전화가 안 터지는 곳이지.” 나는 대답했다. “사방이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거든. 우리 집에 가서 주유소에 전화를 걸면 될 거야.”
“저기… 정말로 폐를 끼치고 싶진 않은데….” 그의 어조가 갑자기 바뀌었다. 정말로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는 건지, 아니면 거북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태워 주시는 것만 해도 정말 고마워요.”
“우리 집은 여기에서 15킬로미터쯤 가야 해.” 나는 말했다. “제일 가까운 주유소도 45킬로미터는 가야 하고 지금은 문을 닫았을 시간이야. 여긴 모텔 같은 데도 없는 곳이지. 애초에 사람들이 경치 구경이나 하려고 좋아라 차를 세울 데가 아니거든.”
“제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요. 만약 정말로 괜찮으시다면…….”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만으로 지갑을 펼쳐 그에게 건넸다. “이러면 좀 안심이 되겠나?”
나는 제시가 지갑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건네주었다. 받아드는 제시의 손은 다소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못 본 척했다. 제시는 지갑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더니 배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경찰이세요?”
“잠깐 쉬러 고향으로 왔어.” 나는 대답했다. “여기에 아버지와 형이 살고 있어서 묵으러 온 거야.”
그는 지갑을 접었다. 사랑스러운 입가에 미소가 점점 퍼졌다. “당신이 지금 고향에 돌아와서 나한테 아주 다행이네요.” 그가 말했다.
“나한테도 다행이었지.”
*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흙길로 접어들어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의 불빛 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을 때 즈음, 제시는 자신이 도시에서 별 볼 일 없는 직장에 다니다가 최근 해고를 당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끝낸 참이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까 길에 세워 놓고 온 차의 트렁크에 통기타를 두고 왔다면서, 혹시 없어지면 안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그 기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제시의 말이었다.
“오디션이라고?” 나는 물었다.
차는 울퉁불퉁한 돌과 자갈이 깔린 길을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얼마 전에 밴드를 만들었거든요.” 그가 말했다.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일단 해 봐야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야 그렇지.”
거의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창에는 커튼이 없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이 창틀 모양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가 다시금 물었다. 속삭임 수준으로 팍 낮아진 목소리였다. “불청객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네요.”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리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그의 무릎 위에 얹혀 있던 한쪽 손을 토닥여 주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서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대화 상대가 있으면 형도 상태가 좀 좋아지겠지.”
“상태가 좋아지다니요? 어디 몸이라도 아프신가요?”
“그런 건 아니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신부를 잃었거든.”
“저런… 큰일이었겠네요.”
“2년 전 일인데 형은 아직도…….”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제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도 외로워하시거든. 새로운 얼굴은 언제나 반갑지.”
제시는 자리에서 몸을 뒤척이며 가죽 시트를 뭉갰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점점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엔진을 끄고 잠시 동안 우리 둘은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경찰을 믿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