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한결같음
박다빈 | 부크크(Bookk)
0원 | 20170706 | 9791127217679
본문 내용 중에서
누군가의 마음으로 더는 들어갈 수 없는, 누군가의 마음을 더는 받아 줄 수 없는, 그 엄청난 단절을 일으킨 건, 절대 거대한 사건이 아니었다. 어떤 일을 더는 이어 갈 수 없는, 어떤 습성을 더는 안고 있을 수 없는, 그 엄청난 물러남을 일으킨 건, 절대 거대한 계기가 아니었다. 난데없이 닫혀 버린 누군가와의 관계를 앞에 두고, 혹은 내 가슴을 앞에 두고, 항상 거창한 이유를 찾았었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그 폐쇄는 죄다, 사소한 무언가의 상실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배려라든지, 언젠가 맺은 자질구레한 약속이라든지(18-19p).
말투가 좀 험하긴 해도, 뒤끝 없고, 매사에 천진난만하고, 사람 참 좋아하며, 누군가를 멋대로 휘두르지 않기 위해 신중히 배려하고, 마음 쓰는 그 사람을 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대화는 각자의 뭔가를 ‘주고받는’ 일이라기보다, 각자의 뭔가를 그냥 ‘보여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보이는 서로의 뭔가를 가만히 바라보거나, 그 가치를 인정해 주거나, 존중하며, 그 과정을 그저 즐기는 일이라는 것을(22p).
그냥, 나는 네가 내보이는 거친 모습들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또 해 주고 싶었다. 나는 그 모습들을 좋아한다고, 정말 좋아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걸 정말 좋아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너는 그런 나에 대고, 또 고개를 휘휘 내젓겠지만(30p).
그런 너로 인해 생긴 가슴의 울렁거림이 다 가신 어느 날, 나는 너에게 바쁠 때 손톱 깎는 거 잘 잊어버리는 사람 따위로 기억되고 싶어졌다. 이름이나 생김새나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바쁠 때 손톱 깎는 거 잘 잊어버리는 사람 따위로 기억되고 싶어졌다. 그렇게 자질구레한 기억으로 새겨져, 네가 머물 자질구레한 모든 순간 한 구석에 오래 남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남은 생애 동안 집어 들 모든 손톱깎이에 내가 지문처럼 묻어 있었으면 싶었던 것이다(36p).
가르치지 않고도 나를 성장시키는, 그 사람의 특별한 능력을 좋아합니다. 뭔가가 딱 맞물린 듯한 느낌을 매번 제공하는, 나와도 나 이외의 모든 것들과도 언제나 잘 어울리는, 그 사람의 친화력을 좋아합니다. 그 친화력 이면에 숨은 그 사람의 수줍음을, 친화력보다 조금 더 좋아합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괄괄하게 굴다가도, 내 앞에서는 부끄럼을 쉽게 타는 그 사람 모습을 좋아합니다. 못 견디게 좋아합니다(42p).
어떤 사랑은 관계가 약간 낡다시피 했을 때 그 본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는 반면, 이 사랑은 관계의 시작 지점에서부터 그 본모습을 유감없이 떨쳤다. 이 사랑이 흐르는 시간은, 여느 사랑이 흐르는 시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가졌다. 사랑이 싹트고, 피어나는 속도를 측정하는 새로운 단위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47p).
마음에는 투여가 가능한 약이 없어서, 나는 알맞은 온도의 물수건을 당신 이마에 얹어 주는 심정으로, 당신에게 내 마음 한 뭉치를 얹습니다. 당신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결국 당신을 지나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간 수많은 감기들이 그랬듯, 이 감기도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당신을 방문만 하고, 당신 속에 눌러앉아 살지는 못하는 감기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문득문득 궁금해집니다. 내 안에 허가서가 있는지요. 당신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도 된다는 내용을 담은, 허가서가. 당신이 앓는 가장 질긴 감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언젠가는 떨어져 나갈 뭔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픈데, 나는 철부지 같이 이런 근심이나 안고 있네요(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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