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와 아기장난감
무각 | 부크크(bookk)
15,800원 | 20220214 | 9791137273887
질문자 : 어떻게 하면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 만약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면 참자아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결국 새롭게 획득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새로 얻은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참자아의 자리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참자아이다. 그대는 이미 참자아 자체이다. 그대는 그대의 충만한 지복 상태를 모르고 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무지가 지복이라는 본질을 가진 참자아 위에 장막을 드리우고 있다. 그대가 할 일은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는 일뿐이다.
참자아를 육체나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이 무지이다. 이 그릇된 동일시가 제거되면 참자아만이 홀로 남는다. 따라서 깨달음은 누구나 가능하다. 깨달음은 구도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내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그 장애물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질문자 : 영원한 자유의 상태에 이르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나요,
마하리쉬 : 해탈이란 미래의 어느 때에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영원히 현존한다.
질문자 :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체험하고 있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 체험은 '지금 여기'에 있다. 아무도 자신의 참자아를 부정할 수 없다.
질문자 : 자신의 참자아라는 것은 존재 차원의 문제이지, 행복의 차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참자아가 행복이며, 행복이 실재이다. 해탈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혼동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 무엇엔가 구속되어 있고, 그래서 자유롭기를 갈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진정 구속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만이 있다. 이미 그 상태이거늘, 무엇 때문에 영원한 자유니 해탈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가,
질문자 :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지금 무지합니다.
마하리쉬 : 무지만 없애면 된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해탈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해탈이란 구속에서 벗어난다는 말인데, 그것은 현재 구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속은 없다. 그러므로 해탈도 없다.
질문자 : 서양사람들 중에는 우주의식의 섬광을 체험했다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체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그들이 체험했다는 섬광은 말 그대로 섬광이다. 그런 체험은 번쩍하고 나타났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 항상 현존하고 있는 의식에 대한 깨달음만이 영원하다. 그 의식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깨어나면 다시 정신을 차리지만, 깊이 잠든 사람이나 깨어난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며 그 사람 자체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지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러므로 차이점은 육체에 대한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데 있을 뿐, 본래의 의식 자체는 변함이 없다.
육체와 육체에 대한 의식은 함께 일어났다가 함께 사라진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지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육체에 대한 의식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긴다. 이런 제약이 곧 구속이다. 구속은 육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그릇된 관념이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나’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늘 존재한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새롭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 영원히 현존하는 것이라야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나타나는 것은 결국 다시 사라질 것이다.
깊이 잠들어 있을 때와 깨어 있을 때를 비교해 보라. 깨어 있을 때는 육체가 있지만, 깊이 잠들면 육체가 없다. 따라서 육체는 영원한 실재가 아니다. 늘 현존하며, 육체라는 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드는 참자아 의식만이 영원한 실재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육체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모든 고통은 이 잘못된 동일시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잘못된 생각과 느낌이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그게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어떤 새로운 것을 얻거나 새로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속임수가 제거된 상태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은 본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그 이상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질문자 : 깨어있는 상태보다는 깊이 잠든 상태가 순수의식에 더 가깝습니까,
마하리쉬 : 깊이 잠든 상태, 꿈꾸는 상태, 깨어있는 상태는 고정불변의 각성상태인 참자아 위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대는 한순간이라도 참자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지금 그대가 하는 식의 질문도 가능하리라.
질문자 : 그러나 흔히 깊이 잠든 상태가 깨어 있을 때보다 순수의식에 더 가깝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 질문은 ‘저는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을 때 저 자신에게 더 가까운가요,’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참자아는 순수의식이다. 한순간이라도 참자아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원성이 존재한다면 그대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순수의식 상태인 참자아 안에는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잠을 자거나 꿈을 꾸거나 깨어 있거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깨어있는 상태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지만,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잠든 상태를 둔한 상태라고 한다. 자, 더 나아가기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대는 자는 동안에도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질문자 : 예, 인정합니다.
마하리쉬 : 그러면 잠자는 동안에 존재하는 그대와 지금 깨어 있는 상태의 그대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질문자 : 같은 사람입니다.
마하리쉬 : 그렇다면 잠든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그 연속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늘 존재하는, 존재 상태의 연속성이다. 잠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의 유일한 차이점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육체를 비롯한 현상세계가 나타나지만, 잠든 상태에서는 사라진다는 것뿐이다.
질문자 : 하지만 잠든 상태에서는 육체와 현상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렇다. 잠든 상태에는 육체와 이 세상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러나 ‘나는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다는 것을 ‘아는 나’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지금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다고 말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깨어 있는 상태의 그대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잠자는 상태의 그대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결국 참자아와 육체를 동일시하는 개체로서의 그대가 ‘나는 잠자는 동안에는 그런 인식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대는 주변 세계를 둘러보면서, 깨어 있는 상태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많지만, 잠이 들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잠든 상태는 둔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상태를 번갈아 오가는 중에도 존재의 연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의 진정한 존재는 어떤 상태에서도 현존하지만, 개체적인 자아나 인식의 대상인 현상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질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연속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다. 연속적이지 않은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그대의 존재 자체는 영원하지만, 육체나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육체나 이 세상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참자아’라는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일시적인 영상일 뿐이다.
☞ 문 : 참자아가 지금 여기에 항상 있는데, 저는 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답 :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는가, 그 말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참나인가 아니면 거짓 나인가, 조사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자는 ‘거짓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거짓 나가 참나를 가리고 있는 장애물이다. 참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거짓 나가 없어져야 한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고요함과 평화가 깨달음이다. 참자아가 아닌 상태란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고 긴 세월 동안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왜 의심이 생기고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 생기는가, 그것은 ‘참자아가 아닌 것’을 참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참자아가 아닌 것’ 사라지고 나면 참자아만이 남는다.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만 치우면 빈 공간은 저절로 드러난다. 빈 공간을 어디 다른 데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구절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모든 부분을 함축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의 조사가 나타났다. 그분들의 깨달음을 얻은 내력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달마대사는 양무제를 떠나 소림사의 동굴에서 9년간 벽을 바라보며 좌선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날 달마대사께 혜가란 사람이 찾아왔다. 달마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겨울에 눈을 맞으면서 몇 날 며칠을 기다리다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한쪽 팔을 잘라 달마대사에게 바쳤다.
비로소 면벽을 풀고 돌아앉은 달마대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가, 그는 달마대사에게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워 평안을 구하고자 찾아왔노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그렇다면 내가 그대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줄 터이니 어지러운 마음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혜가대사는 절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혜가대사는 도무지 마음을 찾을 길이 없다고 대답하자, 달마대사는 ‘그대의 마음이 없는데 어찌 어지러울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미 평안하다.’ 이로써 혜가대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달마대사의 법맥을 이은 중국 선의 2대 조사가 되었다. 중국에서 스님들이 한 손으로 합장을 하는 것도 혜가대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3조는 승찬대사로 나이가 들어 고질병인 풍병(문둥병)에 걸려 고통받으면서 2조인 혜가를 찾아 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싶다고 하였다. 혜가대사는 내가 그대를 참회시켜 줄 터이니 죄를 내놓으라고 말하였다. 승찬대사는 아무리 자신의 죄를 찾아보았으나 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혜가대사가 이르길, 그대는 이미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3조인 승찬대사가 탄생한 것이다. 승찬대사는 혜가대사의 배려로 승적을 받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기숙하면서 신심명을 저술하여 많은 사람들의 길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었으며, 입멸하실 때는 큰 소나무 밑에서 합장을 하고 선 채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4조는 도신대사로 어느 날 어린 중이 승찬대사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당돌하게 묻기를 ‘저를 부디 대사께옵서 자유롭게 이끌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승찬대사는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하고 묻자 ‘저를 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승찬대사는 그렇다면 자유롭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면서 4조인 도신대사가 법맥을 이어받게 된다.
다음으로 5조인 홍인대사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도신대사가 하루는 황매현으로 가는데 골격이 수려하여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다른 어린이를 만나 묻기를 ‘너의 성이 무엇이냐,’ 동자가 대답했다. ‘성은 있으나 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인가,’ ‘부처의 성품인 성입니다.’ ‘너의 성품은 어째서 없는가,’ ‘성품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도신대사는 그가 법기임을 짐작하고 그 부모에게 출가시키기를 권하니 그 부모는 아무런 난색도 없이 아들을 출가시키게 된다. 도신대사가 그를 제자로 삼아 의발을 주고 법을 전하니 5조인 홍인대사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육조인 혜능대사는 24세 되던 해 땔나무 장사를 하며 나이 든 노모와 함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한테 나무를 갖다주고 나오다 금강경 읽는 소리에 본성의 마음을 깨달아 5조인 홍인대사의 뒤를 이어 6조인 혜능대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마음을 관찰하고 주시하는 회광반조(廻光反照)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전해오는 일설에 의하면 홍인대사의 스승인 도신대사가 육조 혜능대사로 몸을 바꾸어 태어났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렇다 치고, 마음을 깨달은 조사들은 철저한 무아의 입장에 있다.
종자를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꽃도 있고 종자도 생기는 것이지 종자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꽃도 종자도 없듯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혼란과 갈등도 결국 그러한 혼란과 갈등을 종식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문제를 일으킨다.
만약 문제를 삼지 않는다면 문제될 일은 없다. 다만 살아가면서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쯤으로 인식되어질 것이다. 이처럼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세상이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를 희구하는 한 우리의 노력은 아무리 오랜 세월을 흐른다 해도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면 계속 다른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해결하려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달마대사는 이르길, 인간은 누구라도 영원히 번뇌를 벗어나 평안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찾고 있다. 그러나 내가 찾는 본성의 마음은 마음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 찾는 마음으로 본래의 마음 알기를 바라지 말라. 불성(佛性)은 마음 밖에서 얻는 것 아니니,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때가 어리석음의 죄가 생기는 때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만일 깨달음을 얻었다면 우리는 한 번도 진아의 성품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진아의 성품으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닫고자 버둥거리는 것은 말 탄 사람이 말을 찾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물을 찾고자 사방을 이리저리 헤매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행해온 모든 일들이 자신은 이미 깨달았음에도 미혹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계의 질서에 의해서 진아의 성품으로 행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땅 파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면 이미 그 땅은 자신의 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은 것과 같고,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계약서에 도장이 찍힌 것이다. 그것은 존재계의 질서에 의해 드러난 것이므로 내가 행했지만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다만 생각의 상태로 있는 것들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내 손을 벗어나 존재계의 휘하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는 수행이란 얻고 구하는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음에 있을 것이다. 우리 존재는 마치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중간인 멈춤과 같다. 그처럼 고요하고 생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곧 우리 존재이다. 내면의 무한한 침묵도 역시 우리 본래 면목이라 할 수 있다.
그처럼 텅 비고 공한 것을 무슨 재주로 손에 넣을 수 있고,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가리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면에서 들끓는 온갖 소음이란 우리 본래 면목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물론 마음을 비우기 위한 수행조차도 마음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인간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도록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도 마음이 녹아 참마음으로 스며들고 나면, 화장터의 마지막 부지깽이를 불 속에 던져 넣듯이 하면 된다고 말씀하였다.
비우고 또 비우면 불현듯 마음이 본래 부처인 진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 다른 길을 걷고자 하면 애써 노력한다 해도 잘못된 길 들어서서 외도를 면치 못하게 된다. 외도란 성취할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육신을 다그쳐 고행하면서 그 대가로 주어지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세상은 창조주에 의해 생겼다거나 혹은 창조주가 없다거나 하는 등의 관념을 끌어안고 있는 것도 모두 외도라고 붓다는 일컬었다.
그래서 신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마하리쉬는 신이란 우리 진아를 일컫는 말이지 자신과 분리된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허공에 밝음과 어둠이 교차해도 허공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허공에 받침 없이 둥실 떠오른 지구라는 별도 먼지 티끌처럼 실체가 없으니 세상에 형상을 지닌 것들은 결국 허공으로 흩어지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지면 세상은 멈추어버릴 것이지만 무언가 생멸을 주관하는 에너지가 있으므로 세상은 생겼다 멸하기를 반복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 육신이 멸해도 계속되는 것은 변치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듯이, 세상도 모든 것이 사라져도 변치 않는 무언가로 인해 새로운 탄생을 거듭하는 것이다. 마치 나무가 잎을 피우고 떨구면서 순환하듯이,
나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세상의 주인공인 참나는 형상 지음이 불가능하므로 보고 듣는 작용이 없는 알아차림으로 존재한다. 온 세상 일체가 참나만이 실재하므로 참나는 무엇으로 이름 붙인다 해도 관계없지만, 신이란 단어는 나와 동떨어진 개념으로 사용되었기에 제한하고 나를 자각하는 그것이 존재하기에 ‘나’라고 이름 붙였으므로 ‘나’가 그것의 맨 처음 이름이며 나중에 다른 이름들이 생겨났으리라.
이처럼 참성품은 마치 허공과 같은데 허공을 무슨 재주로 색칠하고 장식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텅 빈 내 마음이 우리 본래면목인 줄 알면 우리의 육신과 마음이란 기차를 타고 가면 수없이 스쳐 가는 전봇대와 같은 물건일 것이다. 아이들은 기차를 타면 스쳐 가는 전봇대를 보면서 신나게 외친다. 전봇대, 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