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 개벽혁명 사상가들, 홍수전 손문 모택동
탁양현 | 퍼플
10,400원 | 20180926 | 9788924057270
‘빠삐용의 開闢’과 ‘체 게바라의 革命’
開闢은 곧 革命이다. 개벽이든 혁명이든, 흔히 인위적인 激變인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데 天地自然 안에서 어떠한 변화든, 그것은 자연스런 변화일 따름이다. 그러한 바는, 個人이든 集團이든 매한가지다. 다만, 개벽은 원만한 自然의 측면이 강하고, 혁명은 급격한 人爲의 측면이 강하다는 차이는 있다.
또한 개벽은 종교적 개념이고, 혁명은 정치적 개념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것은 다소 便宜的인 분별일 따름이다. 그러한 detail이 不要한 바는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개벽적 혁명이란, 천지자연 자체의 자연스런 변화라는 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세계에는 온갖 다양한 형식의 ‘開闢的 革命’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개벽적 혁명 중에서, 굳이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가장 巨大한 존재형식인 國家的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고, 가장 微小한 존재형식인 個人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존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우리 민족의 ‘生存의 利得’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는 집단공동체는 중국과 일본이다. 물론 북방의 여러 민족도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미국이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여건보다도 강력한 地政學的 여건을 좇는다면, 응당 중국과 일본을 우선하여 거론치 않을 수 없다.
中國 近代 역사에서, 그러한 開闢的 革命을 실현한 인물은 홍슈취안, 쑨원, 마오쩌둥 등이다. 이 외에도 개혁적인 변화를 추구한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실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근대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 중국대륙은, 항상 혁명적 개벽의 변화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지속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반도는, 高麗王朝로부터 朝鮮王朝에 이르는 1,000여년 동안, 마치 ‘고인 물’처럼 별다른 변화가 없이 정체된, 王朝 獨裁의 역사였다.
그래서 오히려 21세기의 한반도는, 개벽적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만큼 개벽적 혁명의 에너지가 오랜 세월동안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미 ‘6?25, 4?19, 5?16, 5?18’ 등의 개벽적 혁명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체험했다고 해서, 이제 개벽적 혁명의 動力이 정지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체험 탓에, 더욱 새로운 개벽적 혁명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그러한 개벽적 혁명은 어떤 것일까.
21세기 大韓民國이야말로, 開闢的 革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것이, 철저히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人民民主主義와 共産主義’ 주변의 개벽적 혁명들이, 죄다 역사의 뒤안으로 소멸해버리는 것을, 이미 여실히 目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것들을 죄다 삭제해버고서 나아질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면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되는 듯하다.
어쨌거나 개벽적 혁명은, 철저한 現實主義의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예컨대 낭만적 혁명가 ‘Che Guevara’와 같은 理想主義的 想像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지만, 결국 한갓 ‘그림자 연극’에 불과했음이,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예컨대, 근대 중국에서, ‘홍수전’의 太平天國이라는 개벽적 혁명의 경우를 살피면, 지금으로부터 150~160여 년 전에, 基督敎的 신화를 통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열정이, 無知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먹혀 들어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怪異하게 여겨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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