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담은 노트 (손준식 수필집)
손준식 | 북인
15,300원 | 20250430 | 9791165125066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사회적 감각으로 확장시키는 힘, 손준식의 첫 수필집
2018년 『서울문학』 시, 2023년 『인간과문학』 수필로 등단하고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협 회원, 서울문학문인회 부회장 겸 이사로 활동하며 시집 『어느 민들레의 삶』, 『나뭇잎 편지』를 선보인 후 제29회 영랑문학상을 수상했던 손준식 작가가 첫 수필집 『시간을 담은 노트』를 출간했다.
손준식의 첫 수필집 『시간을 담은 노트』는 시간을 응시하고 정서로 기록하는 문학적 노트이다. 그의 작품은 각각의 순간들을 붙들고 기억의 닻을 내린다. 이는 시간은 흘러가지만 글은 머문다는 문학의 본질이다. 글 속에 드러난 장면들은 독자의 기억과 맞닿으며 공통의 체험으로 전환된다. 작품은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사회적 감각으로 확장시키는, 조용하고 단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가족의 정의가 흐려지는 시대, 손준식의 수필은 우리에게 말한다. 삶이 흘러가도 어떤 마음은 머물러 있다고. 우리가 다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리움이 아직 살아 있다면, 가족은 해체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그의 수필이 바로 그 증거이다.
손준식의 수필에서 가족의 역사가 잘 드러난 작품은 「엄마의 기도」이다. 엄마의 기도는 작가의 엄마가 작가를 위해 드리는 기도이며 작가가 남편과 자녀를 위해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엄마의 기도」는 삶의 고통과 죽음의 불가해함, 사랑과 종교, 회한과 구원의 정서를 한데 아우르는 치열하고도 고요한 문장이다. 또 가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작품은 먹이를 나르는 참새와 자신의 어머니 모습을 나란히 배치한 「모성애」, 할머니인 자신과 자신을 키운 할머니를 기억하는 「할머니의 치맛바람」, 아들 회사에서 만든 배낭이 모티브가 된 「배낭을 메고서」,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아들의 효심」 등이다.
손준식 수필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개념은 ‘유머’이다. 이 작품집에서 유머는 고통을 감당하는 존재의 방식이다. 니체는 “인간은 유머를 통해 삶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고 했고, 베르그송은 유머를 “삶의 경직성을 풀어내는 창조적 행위”라고 해석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손준식의 유머는 특히 노년기, 간병, 가족갈등처럼 무겁고 감정적인 주제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정서적 완충지대로 작용한다. 작가는 마트에서 넘어져 눈가에 시퍼런 멍이 들었을 때조차 멍을 가리기 위해 쓴 “선글라스가 낮은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내 이럴 줄 알았지」)고 적는다. “어머니, 팬더곰이 되었네요” 하는 며느리의 농담도 수치심과 노화의 현실을 자기풍자적으로 유머화하면서 그 감정을 ‘웃긴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기술이다. 이때의 유머는 자기기만이 아니다. 존재의 균형을 잡는 사유의 방식이며 삶을 스스로 재해석하고 수용하는 철학적 태도이다.
손준식 수필집은 시간의 미학이며, 한 여성의 일생을 따라가는 문학적 시간의 아카이브이다. 수필에서 시간은 사건의 흐름이 아닌 기억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손준식의 수필에서도 시간은 회상과 현재가 교차하는 순환적 시간에 가깝다. 표제작 「시간을 담은 노트」는 손준식 수필집 전체를 가로지르는 주제, 시간과 기록, 존재와 기억, 자기돌봄의 글쓰기를 가장 집약적으로 담아낸 작가적 자의식의 선언문이자 삶에 대한 문학적 고백이다.
이 수필은 “오래된 노트를 펼친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단지 노트를 펴는 동작이 아니라 기억을 소환하고 시간의 궤적을 다시 걸어가는 의식의 문을 여는 장면이다. ‘진한 잉크 냄새’라는 촉각적 이미지, ‘한 줄 시로 시작된 기록’이라는 문장은 삶의 정체를 감각적 언어로 붙잡으려는 문학적 열망을 드러낸다. 손준식은 잊히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고, 감정을 되새기며, 존재의 의미를 되짚기 위해 쓴다. 그래서 이 수필은 하나의 선언이다.
“나는 나의 노트에 나의 삶을 온전히 담았다. 그 노트는 곧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