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기억상실증 (버려진 것들로 읽는 문학과 기억의 문화사)
임태훈 | 역사공간
23,220원 | 20251031 | 9791157076628
쓰레기로 읽는 한국 사회의 집단 망각,
12·3 내란 1주년에 던지는 경고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임태훈 교수 『쓰레기 기억상실증』 출간
난지도와 쓰레기 풍선, 버려진 것들의 문학·문화사를 통해
민주주의 위기의 기원을 묻는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은 헌정 질서가 중단될 뻔했다. 당시 비상계엄 선포의 명분 중 하나는 북한이 살포한 ‘쓰레기 풍선’으로 고조된 안보 위기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종이 조각과 오물은, 헌법과 민주적 절차를 폐기해도 좋은 쓰레기쯤으로 취급하려는 이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다.
12·3 내란 1주년을 맞아 출간되는 임태훈(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신간 『쓰레기 기억상실증: 버려진 것들로 읽는 문학과 기억의 문화사』(역사공간, 2025)는 그날의 위기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리가 정치적으로 폭발한 결과로 진단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앓고 있는 ‘쓰레기 기억상실증(Waste Amnesia)’이 어떻게 일상의 영역을 넘어 민주주의의 토대까지 집어삼켰는지 추적한다.
망각의 인프라, 기억을 삭제하는 거대한 시스템
이 책은 우리가 매일 쓰레기를 버리며 수행하는 ‘망각의 의례’에 주목한다. 시민들은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를 담아 문 앞에 내놓는다. 소비의 흔적과 처리 책임을 의식에서 지워버리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다. 저자는 이 행위가 광역 매립장·소각장·하수처리장으로 이어지는 ‘망각의 인프라’와 결합해, 어떻게 거대한 무지의 회로를 구축하는지 분석한다.
이 시스템은 불결하고 불편한 것들을 우리의 시야에서 신속히 격리한다. 그 덕분에 대중은 소비주의적 일상에 안온하게 머문다. 수도권 매립지 사용은 대안 없이 연장되고 연간 1억 7천만 톤의 폐기물이 쏟아지지만, 이러한 통계 수치는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 되지 못하고 증발한다. 저자는 사회 전체에 만연한 이 ‘의도된 무지’가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위태로운 평화의 기반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이 무지는 정치적 위기의 순간,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한다.
난지도, 압축 성장이 배설한 1억 톤의 인공 지층
『쓰레기 기억상실증』은 1980년대 서울의 이면을 들춰내며 망각의 기원을 추적한다. 여의도 63빌딩이 황금빛 반사 유리로 한강의 기적을 과시할 때, 그 성장의 부산물은 1억 톤의 쓰레기 산으로 난지도에 쌓였다. 난지도는 서울의 거대한 타임라인이자, 압축 성장의 모순이 퇴적된 인공 지층이었다.
정연희, 유재순, 황석영의 소설은 올림픽 스펙터클 뒤에 가려진 빈민들의 생존 투쟁과 그들만의 독자적인 경제 생태계를 기록했다. 이들이 남긴 대항 기억으로서의 문학은 기술적 숭고에 매몰된 도시의 배면을 생생히 증언한다. 반면 오늘날의 미디어는 난지도를 매끈한 생태공원이나 야경 명소로만 소비할 뿐이다. 저자는 그 아래 묻힌 쓰레기와 배제된 노동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것을 주장한다. 과거를 덮어버리고 매끄러운 표면만을 전시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며, 지금도 땅 밑에서 끓고 있는 모순의 역사를 직시하라고 역설한다.
생명을 '재고'로 처리하는 자본의 논리
‘망각의 인프라’는 사물을 넘어 생명으로까지 확장한다. 2010년 이후 반복된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 사태에서 수천만 마리의 가축이 땅에 묻혔다. 이 책은 살처분을 경제적 물류 관리 전략으로 재정의한다. 시장 가치를 상실한 생명은 재고로 분류되어 신속하게 폐기된다. 이 과정에서 위생에 버금가는 중요 변수는 처리 속도다. 직매립 폐기물 처리 방식만이 이 무자비한 속도를 감당할 수 있었다.
고독사와 특수청소 산업을 다룬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차가운 민낯을 응시한다. 특수청소는 망자에 대한 애도 서비스가 아니다. 시체 썩은 냄새(屍臭)를 제거하여 부동산의 임대 수익 가치를 회복하는 자본의 기술이다. 저자는 생명을 철저히 비용 효율성의 수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을 본질적인 위기로 진단한다. 생명마저 쓰레기로 처리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생명 경시 풍조는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극단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쓰레기의 정치학, 헌법을 위협하다
이 책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논의는 2024년 쓰레기 풍선 사태와 12·3 내란의 현장에 닿는다. 북한의 쓰레기 풍선은 한국 사회의 안보를 위협하는 오염원으로 지목되었다. 연이은 낙하 사건으로 공포가 확산되고, 헌정 질서를 멈추는 비상계엄의 명분이 되었다.
저자는 이를 ‘쓰레기의 정치학’이라 부른다. 무엇을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배제할지 결정하는 권력은, 민주적 절차마저 폐기처분 대상으로 삼는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평시에는 불편한 진실을 가리던 망각의 시스템이, 위기 시에는 공포를 자극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도구로 돌변한 것이다. 우리의 시야에서 격리되었을 뿐,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정치적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버려진 것들의 목소리를 듣는 '폐로탐원’
임태훈 교수는 문학을 도구 삼아, 거대한 망각의 흐름을 거스르는 ‘폐로탐원(廢路探源)’의 여정을 제안한다. ‘폐로탐원’은 버려진 길(하수도, 폐로)을 거슬러 올라가 잊힌 근원(기억, 역사)을 찾아내는 저항적 실천을 의미한다. 문학은 공식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하수도의 어둠, 살처분 구덩이의 비명, 고독사 현장의 악취를 증언하는 정밀한 ‘포렌식(forensic)’ 매체다.
저자는 박화성의 1932년 소설 「하수도 공사」부터 김민정, 편혜영, 한승태의 작품을 아우르며 도시의 지하를 탐색한다. 하수도는 도시의 매끈한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의 착취와 희생을 감추는 은폐 장치로 작동했다. 오늘날의 광역 매립지 역시 다르지 않다. 체제의 모순을 묵묵히 덮어둔 침묵의 공간이다.
“한 사회가 무엇을 쓰레기로 규정하고 처리하느냐는 그 사회의 가치와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선택의 순간마다 민주주의의 운명이 걸려 있다. 12·3 내란 1주년, 이 책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쓰레기 취급하며 폐기하려던 시도를 가장 낮은 곳에 버려진 존재들로부터 다시 기억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서늘하게 들이민다. 『쓰레기 기억상실증』은 버려진 것들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위기를 새롭게 읽어내는 동시대 문학·문화사 연구의 최전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