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세상
VINCENT MANZI | 안목
58,500원 | 20241031 | 9788998043339
[이슬의세상 WORLD OF DEW]
빈센트 만지 사진집
빈센트 만지는 작은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필름을 현상하고 스캐너로 파일을 만들고 디지털암실(포토샵)에서 자신의 톤과 음을 조절한 후 잉크젯프린터로 인화한다. 이 모든 공정이 사진가의 손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사진이란 촬영부터 최종인화까지, 모든 공정이 선택으로 이루어지며 작업이란 정신적이며 물리적인 노동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는 프린트를 편집해서 제본한 후, 여러 권의 책을 만들고 몇몇 지인들에게 선물해왔다. 세 번째 책을 받았을 때 갤러리에 이 사진들을 보여준 적이 있는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것, 작가로서 이름을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들과 자신의 작업으로 소통하는 것이라고. 그의 야망은 어떤 예술가보다 거대하다. 2024년 10월, 마침내 지난 시간의 사진들이 〈이슬의 세상〉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빈센트 만지의 〈이슬의 세상〉은 18년간의 작업에서 추출된 것이다. 이때 추출이란,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순수용액을 걸러내기 위해 깔때기를 놓고 걸러내는 작업처럼, 숱한 실패의 반복, 불확신의 밤, 고독, 그리고 마침내 걸러진 일정 용량의 산물을 뜻한다. 결혼하고 아이낳고 뉴욕과 이스탄불을 오가며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무엇보다 창작을 위한 작업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 온 그의 첫 결과물이다.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고바야시 잇사
우리는 종종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둘러싼, 예술가 스스로 남긴 모든 요소들을 의미심장하게 보게 된다. 그 예술이 사진이라면 제목부터 사진을 인화한 종이의 광택여부, 크기, 액자의 형태까지 이 모든 결정이 사진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우선 빈센트 만지는 제목을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이슬의 세상〉으로 삼았다.
헛헛한 살아감에 대하여 그 누구라도 멍들지 않은 가슴 있겠는가.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이 생의 무정함은 변함없고 이슬처럼 사라지는 이 생의 덧없음도 변함없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고 그것의 증거가 사진이고 천년전의 싯구가 살아남은 것처럼 어떤 순간들은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놓을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이 삶의 애절한 의지를 묵묵히 사진 작업으로 보여주는 빈센트 만지의 작업 제목으로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은 생각할 수 없다.
불가사의한 질문으로 채워진 일상의 순간들
전혀 모르는 타인들로 넘치는 거리의 좌표 위에 무작위로 늘어선 인간들, 그들의 팔, 다리, 시선의 방향, 쇼핑백, 그림자마저 정밀하게 세공된 조각들처럼 생생하게 살아오르며 모든 존재의 자질을 보여줄 때 불현듯 세상과 내가 빈틈없이 생생한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눈앞의 세상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서는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이다. 뉴욕에서 이스탄불까지 기나긴 길을 걸어서 내 곁에 도달한 이 순간들, 한 사진가의 예민한 인식이 포착한 일상의 모습들은 불가사의한 질문으로 채워진다.
한 줄기 빛 속에 드러난 먼지 한 톨과 거리를 분주히 걸어가는 한 행인의 모습이 어떻게 같은 속도로 마음에 와닿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들이 사진 속에서 어떻게 영원히 울려 퍼지는가? 초록은 숲의 색이기도 하고 죽음의 색이기도 하고, 가련한 육신들, 쇼핑카에 실린 인간의 그림자, 유리 한 장을 사이로 나뉘어진 이생과 저생,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분주하게 걸어가는 행인들, 희미한 슬픔이 안개처럼 퍼지고, 푸른 저녁이 거리마다 내리고, 무거운 수레와 육신, 우리는 얼마나 더 고단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축축이 비에 젖은 도로 위에서 눈앞에 다가온 어둠을 응시하는 사진가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모두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진 마음을 갖고 있다. 사진은 그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사진의 침묵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감지한다. 그가 직접 만든 책에 쓴 구절처럼, “순간이 닻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