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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본 창작"(으)로 14개의 도서가 검색 되었습니다.
9788956685472

번안과창작 (영인본) (영인본)

정순희  | 제이앤씨
10,800원  | 20071031  | 9788956685472
전체 내용 : 일본어
9791174170446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6 (『함경서원지』, 『함평향교지』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46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74170439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5 (『무안향교지』 3권, 『경모재지』, 『강릉향교실기』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39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74170453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7 (『사문동서원지』 3권, 『덕천서원청금록』, 『수암지』 2권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53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74170477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9 (『충현서원지』 2권, 『무성서원원지』, 『집성각지』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77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74170460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8 (『영흥향교지』, 『영광향교지』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60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74170422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4 (『효암서원지』 3권, 『자계지』, 『녹동서원원지』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22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74170415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3 (《정북원사현실기》 6권, 《장연원지》 4권 - 영인본)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74170415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이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다.
9791168875180

서원지 총서(書院誌 叢書) 1 (『동유서원총록』 권건, 권곤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50830  | 9791168875180
이 책에는 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알 수 있는 자료, 경제와 관련된 자료 등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실려져 있으며 특히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鄕規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원지 총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서원과 향교에서 편찬한 원지(院誌), 향교지(鄕校誌), 청금록(靑衿錄), 향안(鄕案) 등 핵심 자료를 원본 그대로 영인(影印) 하여 집대성한 귀중한 총서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지방 사회의 중심지였으며, 제향(祭享)·강학(講學)·규정(院規)·향안(鄕案) 등을 통해 학문과 사회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서원지 총서』는 이러한 서원의 운영 실태와 향촌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한국사·교육사·유교문화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집입니다. 본 총서는 1930-40년대에 간행된 서원지와 향교지를 원형 그대로 영인하여 서체, 판식, 장정까지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학문적 신뢰성과 자료적 가치를 동시에 보존하였습니다.
9791168873353

대한매일신보 1: 1904. 8 ∼ 1905. 3(영인본) (1904.08 ~ 1905.03,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국문판 - 영인본)

베델  | 한국학자료원
315,000원  | 20250716  | 9791168873353
서울 전동에서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여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국문판 한(韓)·영(英)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磚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 성명은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朴殷植)이 활약하였고, 그 밖에 신채호(申采浩)·최익(崔益)·장달선(張達善)·황희성(黃犧性) 등이 필진으로, 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 등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 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 통감부 당국은 회유와 매수작전 등 갖가지 수법으로 그 논조를 꺾으려 하였으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신문지법(新聞紙法)」을 일부 고쳐 내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외국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 등을 압수 및 판매금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이어 베델(배설)과 양기탁을 구속 또는 국외로 추방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첫번째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 코크번(Cockburn)에게 베델(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는데, 그들은 국한문판 및 영문판의 9월 3·12·21·26일자, 한글판 9월 18일자, 10월 1·8일자 등의 기사가 공중평화를 해치고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1908년 5월 27일 영국 상해고등법원 검사 윌킨슨(Wilkinson, H. P.)과 연서(連書)로써 베델(배설)을 제소하였다. 이번에도 국한문판 1908년 4월 17·29일자, 5월 16일자의 논설이 우리나라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폭동을 격려하고 우리나라 정부와 인민 간에 원수되는 뜻을 격동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6월 15일부터 3일간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논설은 양기탁이 집필한 것이며, 베델(배설)은 그 전권을 양기탁에게 맡기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나, 재판장 보온(Bourne, F.S.A.)은 베델(배설)에게 제1종 경벌죄의 유죄를 선고하였다. 세번째로 1908년 같은 해 7월 12일 밤 돌연 양기탁이 구속기소되었다. 영국총영사 코크번은 양기탁의 즉시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통감부는 구속이 아니라 잠시 유치(留置)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양기탁에게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기소하였다. 그러나 전후 5차에 걸친 공판 끝에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석방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싸우던 과정에서 베델(배설)이 물러나고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万咸, Marnham, A. W.)이 사장이 되었는데, 1910년 6월 14일 만함은 갑자기 판권 일체를 전 사원이었던 이장훈(李章薰)에게 금 4만 원에 매도하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6월 14일자(1408호)부터 이장훈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양기탁은 각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뜻대로 통감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8월 28일까지(1461호) 발행되다가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大韓)’의 두 자를 떼어낸 채 『매일신보』가 되어 총독부기관지로 바뀌었다. 『매일신보』는 1945년 11월 10일 정간 처분이 내려졌고, 이후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1945년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791168873360

대한매일신보 2: 1905. 8 ∼ 1906. 7(영인본) (1905.04 ~ 1906.07,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국문판 - 영인본)

베델  | 한국학자료원
315,000원  | 20250716  | 9791168873360
서울 전동에서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여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국문판 한(韓)·영(英)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磚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 성명은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朴殷植)이 활약하였고, 그 밖에 신채호(申采浩)·최익(崔益)·장달선(張達善)·황희성(黃犧性) 등이 필진으로, 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 등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 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 통감부 당국은 회유와 매수작전 등 갖가지 수법으로 그 논조를 꺾으려 하였으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신문지법(新聞紙法)」을 일부 고쳐 내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외국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 등을 압수 및 판매금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이어 베델(배설)과 양기탁을 구속 또는 국외로 추방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첫번째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 코크번(Cockburn)에게 베델(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는데, 그들은 국한문판 및 영문판의 9월 3·12·21·26일자, 한글판 9월 18일자, 10월 1·8일자 등의 기사가 공중평화를 해치고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1908년 5월 27일 영국 상해고등법원 검사 윌킨슨(Wilkinson, H. P.)과 연서(連書)로써 베델(배설)을 제소하였다. 이번에도 국한문판 1908년 4월 17·29일자, 5월 16일자의 논설이 우리나라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폭동을 격려하고 우리나라 정부와 인민 간에 원수되는 뜻을 격동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6월 15일부터 3일간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논설은 양기탁이 집필한 것이며, 베델(배설)은 그 전권을 양기탁에게 맡기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나, 재판장 보온(Bourne, F.S.A.)은 베델(배설)에게 제1종 경벌죄의 유죄를 선고하였다. 세번째로 1908년 같은 해 7월 12일 밤 돌연 양기탁이 구속기소되었다. 영국총영사 코크번은 양기탁의 즉시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통감부는 구속이 아니라 잠시 유치(留置)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양기탁에게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기소하였다. 그러나 전후 5차에 걸친 공판 끝에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석방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싸우던 과정에서 베델(배설)이 물러나고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万咸, Marnham, A. W.)이 사장이 되었는데, 1910년 6월 14일 만함은 갑자기 판권 일체를 전 사원이었던 이장훈(李章薰)에게 금 4만 원에 매도하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6월 14일자(1408호)부터 이장훈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양기탁은 각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뜻대로 통감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8월 28일까지(1461호) 발행되다가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大韓)’의 두 자를 떼어낸 채 『매일신보』가 되어 총독부기관지로 바뀌었다. 『매일신보』는 1945년 11월 10일 정간 처분이 내려졌고, 이후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1945년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791191175844

한국고전비평론자료집 세트(1988년판 영인본) (1988년판 영인본)

김동욱  | 한국학자료원
162,000원  | 20211230  | 9791191175844
한국고전비평론자료집 영인본. 단편적인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자들에게 편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 본 자료집을 엮는 가장 큰 뜻이다. 수록된 자료는 이 방면의 전문 연구논저에서 인용된 자료를 우선적으로 선정하였으며 새로운 자료로써 소개한 것도 적지 않다.
9791185026008

일제하 문예광의 의미와 그 지평 (문예광 창간호 영인본 예산 문단의 측면사)

이재인, 전하정, 임종본  | 화백
9,000원  | 20130430  | 9791185026008
고향의 문학을 다시 찾고 연구하는 일은 예산의 후손에게 귀한 보물을 안겨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일제하에 첫 발행을 하고 발행과 동시에 일본경찰에게 압수를 당해 남아있을 수 없었던 것을 어렵사리 1권을 손에 쥐게 된 문예지가 얼마나 벅찬 감동이었겠는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 시절 그 문예지가 예산문학사에 길이 남겨져야할 자료로 다시 태어났다.
9788995882726

제정공 이달충 문학 (연구논문과 해설 번역 및 영인본)

이정자  | 국학자료원
25,200원  | 20060611  | 9788995882726
서에서는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순조32년, 곧 1832년 단행 목판본(제정선생문집)을 영인본으로 하여 싣는다. 인쇄본과 간사본과는 그 느낌부터 다르다.특히 번역본과 함께 읽으면 선인의 향기가 묻어나는 과거로의 여행에 감회와 재미를 맛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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