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골목 탐험기 (섬의 역사와 사람의 숨결이 깃든 작은 세계)
정광일 | 퍼플
11,800원 | 20251103 | 9788924180459
바람이 말을 걸어오는 섬, 오키나와. 이 책은 그곳을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기억이 살아 있는 장소’로 바라본 기록이다. 여행자는 비행기 창밖의 푸른 바다를 처음 바라보던 순간으로부터, 걸음 하나하나 속에 쌓여 있는 시간의 결을 더듬는다. 붉은 돌길, 해풍이 스미는 골목, 시장의 웃음소리, 그리고 전쟁의 흔적이 남은 언덕까지. 『걷는다는 것은 기억을 더듬는 일』은 걷기를 통해 ‘한 섬의 역사와 한 사람의 내면이 교차하는 풍경’을 그린 인문 여행서다.
이 책의 주인공은 화려한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조용히 듣는 사람”이다. 작가는 슈리성에서 나하까지 걸으며, 길 위의 언어와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 나간다. 왕이 걸었던 붉은 길 위에서는 사라진 왕국의 자취를, 평화기념공원의 바람 속에서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발견한다. 다케토미섬의 붉은 지붕 아래에서는 공동체의 힘을, 시장의 노인에게서 삶을 지탱하는 존엄을 배운다. 그 모든 순간은 한 사람의 발걸음으로 이어지며, 섬의 기억을 되살리는 여정이 된다.
『걷는다는 것은 기억을 더듬는 일』은 여행서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철학서’다. 바람의 방향으로 지어진 집들의 지혜, 남쪽 섬의 인사말 속에 담긴 정서, 전통 직물을 짜는 여인의 손끝이 가진 시간의 무게를 통해, 우리는 ‘오래된 삶의 리듬’을 다시 배우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오키나와의 골목은 잊혀진 세계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하는 장소다.” 낡은 벽돌 하나, 오래된 창문 하나에도 섬의 시간이 켜켜이 배어 있다.
책은 총 아홉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역사·문화·철학·감각이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류큐 왕국의 노래가 들려오는 골목에서 시작해, 전쟁의 흔적이 잠든 언덕을 지나, 별이 쏟아지는 야에야마 제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문장은 풍경을 단순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냄새와 소리, 바람의 방향’을 기록한다. 그래서 독자는 읽는 동안 마치 오키나와의 공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듯한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책의 후반부는 오키나와의 일상 속에서 발견한 ‘삶의 속도’에 초점을 맞춘다. “천천히”라는 말이 주는 위로, 낡은 골목이 품은 오래된 미래, 길 끝에서 깨닫는 여행의 이유. 그 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어떤 ‘사유의 쉼표’가 있다. 이 책은 독자에게 걷기를 권하지만,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걸음마다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고, 자신 안의 오키나와를 찾아가게 한다.
부록에는 실제로 걸을 수 있는 ‘슈리성부터 나하까지의 골목 여행 코스 지도’, 현지의 음악과 향을 담은 ‘오키나와의 소리와 향 리스트’, 그리고 여행자가 지켜야 할 존중의 언어를 정리한 ‘문화 예절 가이드’가 함께 실려 있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귀와 코, 마음이 섬의 기억을 계속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걷는다는 것은 기억을 더듬는 일』은 오키나와를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걷는다는 행위로 삶을 사유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에게는 추억을,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기다림의 향수를 선물한다.
바람이 부는 길 위에서 작가는 묻는다. “기억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걷는 동안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 한 문장으로, 오키나와의 바람은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다시 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