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질체 - 북프라이스

이 소설은 이현신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으로 중편소설 두 편을 묶었다. 「사랑의 이성질체」는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인간의 내면을 그렸다. 성민은 고등학생일 때 후두암 판정을 받고 목의 기관을 모두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도 목에 구멍을 뚫어서 쉴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병원에서 탈출한다. 우연히 알게 된 천연치유요양원에 들어가 삼 년을 보낸다.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요양원에 간 날 한 교수의 죽음과 맞닥뜨린다. 한 교수의 가족에게 연락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집은 비어있다. 수소문 끝에 그의 아내를 찾아서 지리산에 있는 절로 가고, 한 교수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교수의 아내는 성민을 데리고 혼외자의 엄마를 만나러 간다. 성민은 요양원에서 우 목사와 정 선생과 신 여사의 사랑에 힘입어 완치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타인을 위한 헌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너무나 이기적인 한 교수의 사랑을 알고 나니 사랑에도 이성질체가 있나? 의심이 든다. 거울에 비친 상처럼 모양은 완전히 같은데 방향만 반대인 이성질체처럼 방향이 다른 사랑의 이성질체. 사랑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갈등한다. …불현듯 성민은 사랑에도 거울상 이성질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증오만이 사람을 상처입히는 건 아니다. 사랑이 입히는 상처도 많다. 상처입히지 않는 사랑은 없을까. 당장 요양원으로 돌아가서 정 선생에게 묻고 싶었다. 물질은 편광으로 이성질체를 구별한다지만 사랑의 이성질체는 어떻게 구별하는지? -「사랑의 이성질체」 중에서 「파란고리문어」는 제14회해양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남편은 파란고리문어를 보고 싶어 했다. 언젠가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결심했으나 함께 바다에 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바빴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에 관한 기록이다. 감정 표현이 서툰 남자와 그런 남자를 사랑한 여자는 대학교 독서 동아리에서 만났다. 헤엄을 치기는커녕 바닷가에 놀러 간 적도 없는 남자와, 연 년 열두 달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바닷가 마을의 여자는 바다 이야기를 매개로 연인이 된다. 결혼했으나 자식은 없었다. 급성 간암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여자는 남편과 바다에 가지 못했던 걸 후회하며 파란고리문어를 보기 위해 필리핀으로 간다. 남편이 너무 그리워서 파란고리문어를 먹고 죽으려고 했으나 남편은 전날 꿈속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설파하며 저승에서도 여자를 지키려고 한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파란고리문어’가 말하는 거 같기도 했고 남편이 말하는 거 같기도 했다. 너 자신을 지키라고. 독립된 영혼을 가진 독립된 존재가 되라고. 사랑이란 자신의 독립성을 잃지 않고 모든 사물과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고 다그치듯 말하는 소리는 고막 안쪽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두개골 속에서 울렸다. -「파란고리문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