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자와 한자어 연구
허화전 | 역락
45,000원 | 20250328 | 9791167428943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한자는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전파를 위한 매개체로 기능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의 지리적 근접성과 문화적 유대를 바탕으로, 인적 교류, 서적 전파, 유교와 과거 제도, 불교 전승, 문학과 예술, 상업과 무역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화문화가 지속적으로 주변 국가들에 전파되었고, 이로써 풍부하고 다채로운 동방문화(東方文化)가 형성되었다. 주변 나라들은 한자문화를 수용함과 동시에 자국문화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였으며, 한자를 바탕으로 가나[假名, 한자를 빌려서 만든 일본 문자], 언문(諺文), 쯔놈[喃字, 베트남식 한자] 등을 창제하여 문어(文語)와 구어(口語)를 융합시킴으로써, 오늘날 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은형(隱形)’의 ‘한자음 문화권(漢字音文化圈)’을 형성하였다.
중국과 한반도 간의 문화 교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箕子走朝鮮[기자가 조선으로 갔다]”이라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진(秦)나라 말기에는 한반도에 ‘삼한(三韓)’이 성립되었고, 중화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한대(漢代)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등지에서 한어언문자(漢語言文字)가 계속 사용되었으며, 한자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1443년 이후에도 한자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관용통용문자(官用通用文字)로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헌 또한 매우 풍부하여, 비명(碑銘), 각본(刻本), 사본(寫本), 유교 문헌(儒敎文獻), 불교 문헌(佛敎文獻), 어문학 문헌(語文學文獻)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문 용자(漢文用字)를 살펴보면, 한자의 쓰임은 중화 전통에 의거해 훈몽자회(訓蒙字會), 운회옥편(韻會玉篇), 삼운성휘(三韻聲彙),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 옥휘운고(玉彙韻考), 자류주석(字類注釋), 자전석요(字典釋要), 신자전(新字典) 등 고사서(古辭書)들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방각본(坊刻本) 문헌이나 필사본(筆寫本) 문헌 속에는 지역적 특징을 지닌 중국 속자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자 형체 변이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더불어 ‘국자(國字)’ 창제와 훈민정음의 창자(創字) 원리 역시 한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역대 문헌의 한자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일, 특히 현대 조선어와 한국어 속에 있는 방대한 한자어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한자가 일본에 처음 전래된 것은 왕망(王莽) 시대에 주조된 ‘화천(貨泉)’ 및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의 금인(金印)을 통해서이다. 일본이 실제로 한자를 접촉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 및 왕인(王仁) 등의 인물을 통해 논어(論語), 천자문(千字文)과 같은 유가 전적(儒家典籍)을 배우기 시작하면서이다. 한적(漢籍)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인들은 한자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게 되었고, 초기에는 중국의 자형을 많이 계승하였다. 금석문자(金石文字)에서는 丗, 乗, 亊, 亰, 仏, 囯, 圡 등 많은 속자가 나타났으며, 한자가 일본에 전래되는 과정은 전승뿐 아니라 그 속에서 나타난 변이의 양상도 함께 보여주었다. 오늘날 일본의 상용한자 중 일부는 자형과 구형(構形) 방식이 중국 한자를 따른 것이지만, 그 대규모 사용은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睪’을 ‘尺’으로 표기하거나, 이를 유추하여 ‘釈(釋)’, ‘鈬(鐸)’, ‘択(擇)’ 등의 글자를 창조하고 일상생활에서 널리 활용하였다.
한자는 점차 일본 사회생활의 모든 층면으로 침투되었고, 결국 일본 고유의 언어 체계인 히라가나[平假名], 가타카나[片假名], 국자(國字) 등을 만들어 냈으며, 나아가 독자적인 일본 한자 표기 체계를 형성하였다. 한자와 일본어의 융합은 한편으로는 한자와 중국어를 외래어로 받아들여 일본어에 흡수시켰는데, 일본어의 많은 한자어는 단어의 형태에서부터 음과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국어로부터 유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자를 차용하여 일본어 고유의 개념을 표현하였고, 이로써 대량의 ‘화제한어(和製漢語)’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어휘들은 근현대(近現代)에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중국어 어휘 체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본서는 한반도의 한자 및 한자어에 대한 연구는 다루지 않았으며, 또한 베트남의 한놈 문자(漢喃文字)에 대해서도 연구하지 않았다.
본서에서는 일본의 한자와 한자어 문제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전문(全文)은 예변(隸變) 이후의 근대(近代) 한자 체계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자가 일본에 전래된 이후의 본토화 개조 및 변이(變異) 현상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일본의 국자, 이체자, 속자의 연원과 변천을 살피고, 중일 근대 한자의 전승과 변이를 고찰함으로써, 한자의 일본 전파 과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또한 한자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중일 문헌 및 어휘의 형태와 의미의 변천 과정을 통해 언어 자료를 발굴하고 기원을 고증하며, 중일 언어 접촉의 역사적 실상을 재현하였으며, 중일 언어 속에 존재하는 난해한 한자어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증과 감별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학계의 관심과 후속 연구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본문은 총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중일 양국 자서에 수록된 일본 ‘국자(國字)’를 전수 조사하고, 양국 자서에서 ‘국자’의 어원 및 뜻풀이에 보이는 여러 결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164개의 일본 ‘국자’의 원류를 고증하고, ‘癌’, ‘熕’, ‘匁’ 등 ‘국자’의 자형과 의미를 상세히 고찰하였다. 제2장은 일본 「상용한자표(常用漢字表)」에 수록된 193개 간체자의 어원을 추적하고, 자서에서 일본 간체자를 수록하고 풀이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혼란과 오류를 지적하였는데, ‘釈’, ‘円’, ‘国’ 등 간체자의 본말(本末)을 상세히 고증하였다. 제3장은 차용(借用), 오용(誤用), 와자(訛字)의 관점에서 일본 속자의 유형과 원류를 고찰하고, 동문통고(同文通考)에서 수백 자에 이르는 이른바 일본 ‘속자’로 잘못 규정한 예들을 지적하고, 관련 자형에 대해 정오(訂誤)와 출전 고증을 수행하였다. 제4장은 일본 한자어의 관점에서 중일 양국의 대표 사전류를 함께 분석하여, 고대 중국어 어휘가 현대 일본어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변이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또한 화제한어(和製漢語)가 현대 중국어에 끼친 영향을 밝혔으며, ‘退嬰’, ‘新聞’, ‘小說’, ‘廣告’, ‘銀行’ 등 한자어의 형태와 의미의 변천을 상세히 고찰하면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본서의 12개 부록에서는 중일 한자 및 한자어의 개별 실례(實例)를 揶수록하여 본문 내용을 보완하고 확장하였으며, 독자들의 참고와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한자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요한 매개체로 한자 문헌은 동아시아 문명의 귀중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의 한자 전파 및 변천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문자학의 중요 과제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와 상호 이해를 위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 다문화적인 시각으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종합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또한 이를 통해 한자문화권의 역동적인 발전 양상을 재구성해 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