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착 (염혜원 디카시집)
염혜원 | 작가
13,500원 | 20250926 | 9791194366980
자아와 세계가 만나는 신박한 지점
올해 창간된 《세계디카시》 편집장을 맡고 있는 염혜원 시인의 디카시집 『불시착』이 도서출판 작가의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34번으로 출간되었다.
저자 염혜원 시인은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문예 창작 전문가과정을 공부 중이며, 〈문학고을〉이란 문예 모임을 중심으로 창작 및 문단 활동을 했다. 문예지 《시와 경계》 및 여러 공모전에서 디카시로 입상을 했으며, 또 여러 곳에서 디카시 특강을 해 왔다. 현재는 한국디카시인협회의 사무차장과 《세계디카시》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이렇듯 디카시에 투신한 염혜원은 자신의 첫 디카시집 제목을 『불시착』으로 정했다. 미상불 이 어휘는 많은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속성을 가졌다. 당장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가 떠오르지 않는가. 어느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내린, 왕자 복장을 한 어린아이! 그러나 그의 외형이 아이일 뿐 그 사고와 표현은 일급 철학자의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아이와 어른, 상상과 현실, 소혹성과 지구별, 자아와 세계가 만나는 그 중차대하고 신박한 지점을 사람으로 형용하자면 바로 이 어린 왕자가 되는 형국이다. 시집의 표제가 그러한 만큼 염혜원의 디카시들은 대개가 본질로서의 자아와 현상으로서의 세계가 만나는 그 문제적 지점에서, 자연경관이나 특정한 사물을 포착하고 그 심층적 의미를 읽어내는 포즈를 취한다.
유장한 의인 또는 활유의 상상력
어느 시에서나 활용되는 의인법은 동식물, 무생물, 추상적 개념 등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그런가 하면 활유법은 무생물을 살아 있는 생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염혜원의 시에서는 이 두 수사의 기법이 매우 활달하고 유장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이 시인이 가진 시적 상상력의 발현이기도 하다. 1부의 시 가운데 「등대」에서는 이병주문학관 앞뜰에 서 있는 펜촉 모양의 작은 오벨리스크에서 ‘불멸의 정기’를 보고, 이를 ‘세월의 파도를 지켜온 날 선 등대’로 호명한다. 「날아봐」에서는 수면에 비쳐져 데칼코마니의 형상을 이룬 도시의 하늘에 날개를 편 새 한 마리에서 ‘당신의 마음’을 읽는다. 그런가 하면 「틈」에서는 고목의 중동에 핀 꽃송이를 두고 ‘잊힌 자리에서’ 봄을 꺼내는 ‘너’를 도출한다.
농익은 기억
햇살이 읽고 바람이 넘긴다
비가 지우고 흙이 덮는다
아무도 읽지 못한 마지막 문장
- 「유서」 전문
‘유서’라니!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제목이다. 유서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는 글을 말한다. 그 문학적 또는 철학적 의미에 있어서는 자기 삶을 마무리하며 남기는 ‘최후의 말’로서, 존재의 흔적을 응축하는 글이다. 이를테면 유서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르에 해당한다. 인용된 시의 사진은 늦가을을 표상하는 적갈색 낙엽 몇 장이 뒹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낙엽의 시기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시인의 언사는 사뭇 남다르다. 햇살과 바람과 비와 흙이 전방위적으로 동원되고, 거기에 ‘아무도 읽지 못한 마지막 문장’이 남는다. 낙엽에서 속 깊은 글과 그 글의 주인인 사람을 보는 것이다.
하늘 꼭대기까지
유난스레 핀 꽃
- 「그리움」 전문
짙고 푸른 하늘에 대나무의 군엽을 딛고서 그 끝에 하얀 반달이 걸렸다. 시인은 이 달을 꽃, 그것도 ‘유난스레 핀 꽃’으로 보았다. 일찍이 달을 두고 시를 산출한 시인은 너무도 많다. 중국 당대의 시인 이백이 달과 더불어 시선이란 별호를 얻었다. 박목월은 「나그네」에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조지훈은 「완화삼」에서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는 나그네를 노래했다. 이 모두 달을 제재로 얻은 명편의 시다. 우리의 디카시인 염혜원은 중천의 달이 대나무 잎에 가늘게 걸린 형상을 보고 당장 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자니 그 꽃이 하늘 꼭대기까지 이른 절묘한 존재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 사물로서의 대나무 잎이나 달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성을 가진 각기 존재의 의지가 개재한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애틋한 서정
서정시의 주제로 아픔과 슬픔, 그리움과 기다림은 언제나 비상 대기자인 상비군의 지위에 있다. 김소월이나 백석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나 괴테가 남긴 시 가운데 지천으로 널려 있는 근원적 감정이 아닌가. 그리움이 표방하는 부재의 감각과 시간의 역행, 기다림이 포괄하는 미래 지향성과 시간의 지연 등은 요약하면, 시에 있어서의 부재와 결핍의 미학을 형성한다. 그리움은 회상과 추억의, 그리고 기다림은 예감과 소망의 정서이지만 이로 인하여 시인의 세계가 풍요롭고 아름다워진다. 2부의 시에서 「첫사랑」의 수려한 마음, 「그리움」에서 별이 된 엄마와 달이 된 아빠, 「무주택자」의 저 너머에 있는 기다림 등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 시적 관념들이다.
아직도 줄 것이 남은 듯
바싹 마른 몸으로
어여 오라고
와서 한 보따리 가져가라고
들판에 켜둔 붉은 등 하나
- 「신호등」
가을걷이가 끝난 전답에 마른 고추나무 하나 서 있고 붉게 익은 고추 열매 하나 외롭게 매달려 있다. 왜 이 열매만 남겨 두었을까. 시인은 이를 단호하게 ‘신호등’이라 명명命名했다. ‘아직도 줄 것이 남은 듯’이란 표현은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싹 마른 몸으로’ 어서 와서 한 보따리 가져가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연로한 어머니의 심사다. 우리는 이와 같은 담화의 사례를 부지기수로 알고 있다. 그 어머니가 ‘들판에 켜둔 붉은 등 하나’라는 어의에 이르면, 이 막막한 들판은 문득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모정의 현장이 된다. 붙들기 어려운 사진에 수발한 시다.
푸르른
기억이 번지는 날
그리움 그러모아
징검다리를 놓는다
- 「너에게 가는 법」
너에게 가는 법’이라는 만남의 지도를 보여줄 태세다. 사진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중앙광장. 드문드문 국민소설 「소나기」의 소년 소녀가 비를 긋던 수숫단이 서 있다. 멀리 흐릿하게 초가지붕을 인 원두막도 보인다. 그리고 이 광경에 대비된 것은 흰색과 연노랑의 꽃잎이 환한 얼굴을 드러낸 페츄니아다. 시인은 이 풍광에 대해 ‘푸르른 기억이 번지는 날’이라고 한다. 과연 시인의 기억은 어떤 모양 어떤 색깔일까. ‘푸르른’이란 통칭 외에 보다 구체적인 사연이 있을 법도 하다. 그리고 그의 다음 행보는 ‘그리움 그러모아’ 징검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소년과 소녀가 만난 징검다리, 또는 시인의 푸르른 기억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터이다. 맑고 밝고 싱그러운 시다.
디카시인은 단순히 사물이나 풍경의 겉모습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 안에 잠복한 본원적 의미나 존재의 울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결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는 까닭에서다. 예컨대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그 외형이 덮고 있는 시간의 축적, 세대의 기억, 인내의 상징 등의 재해석을 견인하지 못한다면 그저 그런 시인에 그치고 말지 않겠는가. 이 시집 3부에 수록된 시들 가운데는 이 대목에 강점을 가진 사례가 많다. 「대상포진」에서 물방울과 ‘세포들의 혁명’을, 「운명」에서 시멘트벽의 틈새에서 자란 풀과 ‘당신이라는 이름’을, 「페르소나」에서 보도블록에 앉은 참새와 그 그림자로 ‘내 안에 거인’을 대위법적으로 묘사하는 시적 기량 등이 바로 그렇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모빌」
능소화 한 떨기다. 여름철 담장이나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덩굴성 꽃나무다. 주황색이나 붉은빛이 도는 나팔 모양의 꽃이 피고, 한국에서는 부귀와 영화 또는 여인의 정절을 상징한다. 이 능소화는 주로 담장을 타고 높이 올라가는 속성이 있고, 그러기에 줄기가 위로 뻗어 있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여기 사진의 꽃은 한 줄기가 지구 중력 방향으로 아래로 늘어져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편 몇 송이 꽃은 싱그럽고 탄력 있어 보인다. 시인은 여기에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단 마디의 수사를 부여했다. 언뜻 도종환이 쓴 동명(同名)의 시가 떠오르지만, 그 문자 시와 이 디카시는 속한 영역 자체가 다르다. 거꾸로 피어서도 굽힘이 없는 꽃,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그리고 사물화(Reification)란 말이 있다. 원래 동적인 과정이나 관계나 경험 등이 마치 독립된 물체처럼 고정된 것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뜻한다. 그 가운데서도 ‘인식의 사물화’는 인간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주체적 경험이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단순히 객관적 대상처럼 다루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 일상의 주변에 있는 많은 대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의 주체와 소통되고 관계성을 맺기 이전에는 거개가 사물화 되어 있다. 여기에 혼과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시이며, 그것을 렌즈로 포착한 영상과 더불어 작동하게 하는 것이 디카시다. 이 시집 4부의 시 중에서 「응답하라」에서 가을과의 교통, 「불시착 2」에서 여린 풀꽃이 말하는 바람의 연서, 「허수아비」에서 흰 새 한 마리의 초록 바다가 모두 그렇다.
반짝이는 청춘
5월의 눈물은
별이 되어 내려앉았다
하늘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유
- 「5월의 별」
단풍나무의 아직 푸른 잎이 그 줄기가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하게 화면을 채웠다. 그러자니 위에서 내려다본 각도다. 시일이 지나 가을이 되면 더 빛나는 색감을 자랑할 것이다. 이 나무는 여름날 맥고모자처럼 흔히 눈에 띄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면 그냥 그런 사물의 한 형태다. 그러나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 인생의 성쇠와 흥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여겨진다. 문학작품에서 이를 소환할 때는 아름다운 소멸, 순환과 귀환, 고독과 사색, 사랑과 이별 등의 개념이 생성된다. 시인은 이 잎새들의 군집에서 ‘반짝이는 청춘 5월의 눈물’이 별이 되어 내려앉았다고 썼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에서 별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라고 강변했다. 염혜원 시인이 없었더라면, 언감생심 이 단풍잎들이 별의 정령이 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시가 공여하는 막강한 저력이 잠복해 있다.
이처럼 염혜원 시인이 표제로 내세운 ‘불시착’은 계획되지 않은 착륙, 혹은 긴급·강제 착륙이라 할 수 있다. 시의 눈으로 세상과 삶과 풍경과 사물을 보는 마당에 이 의미망을 차용해 온다면 그의 시가 가진 관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진 존재’의 지위에서, 그 근본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시적 대상으로부터 답변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김종회 문학평론가(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는 “이 시집에 수록된 61편의 시는 저마다 입을 열어 살아있는 생명으로 우리에게 육박해온다. 이번이 그의 첫 시집이니, 앞으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를 통해 좋은 시를 만나는 소망을 가꿀 수 있을 것 같다”고 평한다.
이 가을날, 눈밝은 독자들이 염혜원 시인의 시를 읽으며, 불시착의 모험이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시의 아름다운 메타포와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