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체가 있던 자리, 금호동 (정승재 소설집)
정승재 | 강
12,600원 | 20210220 | 9788982182730
정승재의 두번째 소설집 『로체가 있던 자리, 금호동』은 새로운 형식적 시도를 통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호출해낸다. 그는 “사랑이 부재한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는 단호한 언표를 내놓았는데, 그 사랑의 대상은 ’선희’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유형의 선희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화자는 ‘정승재’라는 작가의 본명을 입고 있다.
작가는 “인본주의적 이성은 쇠락하고 자본주의적 탐욕이 최고조에 다다른 지금. 내가 세상에 외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라고 자문한다. 그 대답이 선희인 셈이다. 선희와의 이야기를 통해 결핍으로 얼룩진 화자의 어린 시절이 드러나고, 죽음을 무릅쓴 에베레스트 등반가와 목숨을 잃은 한 셰르파의 서사가 펼쳐진다. 그리고 구의역 9-4번 스크린도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가 짙은 흔적을 남긴다. 소설 곳곳에 녹아 있는 2014년(선희가 살고 있는 “행성 SH2014J”)과 4월 16일이라는 날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깊은 아픔을 향해 작가가 새겨놓은 각인이다.
「부산, 대티터널」의 정승재는 선희를 만나기 위해 부산의 대티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둘은 스물두 살 차이이고, 선희는 젊은 유부녀다. 이 요령부득의 상황은 「삼촌」에서는 주요섭 「사랑손님과 어머니」 패러디로 변주되어 어머니인 선희와 ‘삼촌’의 관계를 어린 화자가 지켜보는 상황으로 바뀐다. 한편 「독재자의 딸」 속 선희는 독재자인 아버지를 살인 청부하는, 모질고 이성적이며 정의로운 딸로 등장한다. 암살자인 승재와 살인을 청부한 선희의 서술이 번갈아 교차되는 구조 속에서 소설은 두 사람의 사랑을 발견해내는 것에 침윤해 있다. 이 공간 안에서는 “옳고 그름도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편 「로체가 있던 자리, 금호동」의 선희는 등산가다. 로체는 티베트어로 ‘남쪽 봉우리’란 의미로, 히말라야산맥 중 에베레스트 남쪽에 위치한 고봉(高峰)이다. 해발고도가 8,516미터인 이 산을 화자는 선희와 함께 등반하려 한다. 숨을 쉴 산소가 부족하고 사방이 흰 눈밭인 등반로에서, 그의 머릿속에는 선희와의 추억, 로체에 있다는 설인 예티의 설화, 어머니가 들려준 북한산 장사의 전설 등이 눈보라 치듯 뒤섞이고 있다. 그를 도와주는 셰르파 뒬마는 고용인인 그에게 자신의 산소통까지 넘겨주는 바람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오직 선희와의 약속 때문에, 뒬마의 희생까지 불사하며 오르기 시작한 로체이지만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선희와 연락이 두절되고 만다. 등반이 아니라 화자와 선희의 “기억의 공유” 과정 자체가 중점적인 과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구 깊은 곳에는 외계인이 산다」와 「추정 혹은 치정」에도 여지없이 선희가 등장한다. 두 작품에서 선희는 정승재의 공인된 여인이다. 「지구 깊은 곳에는 외계인이 산다」는 “오늘도 나는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화자를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은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인물이다. 그와 함께 웜홀과 금속 철벽을 지나 보랏빛 외계인을 만나는 일은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풍경이다. 현실의 화자는 선희라는 이름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K마트의 캐셔로 일하고 있는데, 그토록 원하던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비참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구멍 너머의 외계 세계는 비참함과 절망이 도사리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인 것이다. 화자가 외계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방은 금호동에 있다. 금호동은 스테인리스 그릇 행상을 하던 어머니와의 궁핍하고 아픈 과거가 남아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금호동 선희」는 어머니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있는데, 금호동 해병대산과 양평의 청수헌으로 이어지는 공간에서 어머니는 늘 ‘좁쌀베개’나 ‘스테인리스 그릇’ 등의 소도구와 함께 과거의 시간 속에 남아 있다.
더불어 「추정 혹은 치정」에는 겸임교수 세 사람의 무력한 학과 생활이 나열된다. 그들은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의하지 못한 채 권력자인 학과장의 지시로 밤새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화자는 자동차 트렁크 속에 몰래 조니워커를 숨겨두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결코 그 술을 함께 마시지 못한다. 집에서 그런 화자를 기다리고 있는 선희는 그와 같은 “요셉의 집 자활센터” 출신으로, 엄혹한 시기를 함께 경험한 공유자라고 설정되어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선희라는 인물에는 작가의 모든 꿈과 사랑, 사유와 경험, 온 생애에 걸친 아픔과 기꺼움 등이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젊은 생명을 앗아간 사고가 있었던 지하철 역사 내 스크린도어를 바라보며 화자가 허망함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순간에도, 선희는 그의 곁에 있다. 스크린도어 앞에 「빅뱅은 스켈레톤을 타고」라는 그림이 세워져 있는데, 그림 속의 남자는 왼쪽 몸통과 얼굴 반쪽만 남은 불완전한 모습이다. 그 그림을 그린 이는 선희다. 자유자재로 변용되면서도 그녀는 소설 속 모든 화자의 주변부에 존재하며 그를 지켜보고 있다. 선희는 소설 속 정승재가 연모하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정신적 형용이기도 하다. “슬픔은 밑으로 가라앉아 앙금으로 남는”데, 그들은 지금 “더 내려갈 수 없는 지하 260계단 밑에” 있다.(99쪽) 내면 깊은 곳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어떤 기원을 찾기 위해 작가는 선희라는 이름을 발설하며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의 이름, 사랑이라고 호칭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불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