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재 김천일 전집 1~2 세트 - 전2권 (신역본 건재 선생 문집 / 조선왕조실록 김천일 관련 기사)
김천일 외 | 문예원
117,000원 | 20180515 | 9788997916986
김천일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1537/중종 32~1593/선조 26) 선생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호남 유학의 비조鼻祖인 정읍의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연산군 5~1576/선조 9) 선생의 수제자로 성장하여, 당대 호남의 거유巨儒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등의 총애를 받으며 관계官界에 나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사암思庵 박순朴淳·송강松江 정철鄭澈·우계牛溪 성혼成渾·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당대 서인西人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용안현감龍安縣監, 강원도사江原都事, 경상도사慶尙都事,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임실현감任實縣監, 순창군수淳昌郡守, 담양부사潭陽府使,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수원부사水原府使 등을 역임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닥쳐올 왜란에 대비하는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맨 처음으로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어,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의병을 모아 곧 바로 서울 쪽으로 북상, 수원 독성산성전투를 거쳐 금령전투를 치르고, 강화도로 들어가 전력을 가다듬으며, 의주義州로 피난 가 있던 선조宣祖 임금의 명령이 처음으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였고, 왜적에게 사역한 서울 도성과 경기의 백성들을 개유하여 마음을 돌리게 하고 왕릉王陵의 도굴을 막았다. 한강 일대 양화도 등지의 선유봉 전투, 노량전투, 사현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면서, 명나라 원군援軍 이여송李如松의 군대와 연계하여, 서울을 탈환하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자, 선생은 그동안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남은 군사 300명을 이끌고 다시 남하하여 곧바로 진주성으로 들어가, 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양산숙梁山璹·고종후高從厚·장윤張潤·이종인李宗仁·김준민金俊民 등과 더불어 9일 동안 진주성을 목숨을 다해 지키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여러 전우들 및 맏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순절함으로써, 왜적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켜 조선의 곡창 호남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이후 이순신李舜臣의 정유재란 전투까지의 군량미 조달이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위대한 공로는, 이후 조선왕조가 끝나는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무려 120여 차례 이상이나 언급되고 있으며,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나주 정렬사旌烈祠, 진주 창렬사彰烈祠, 정읍 남고서원南皐書院,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 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 등 여러 곳에 배향配享되었다.
선생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결코 의병활동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평생 동안 극심한 한병寒病으로 시달리게 하였을 정도의 지극한 효성, 하던 벼슬을 즉시 그만두고 돌아가 서거한 스승을 극진히 영결하고 사당祠堂과 서원書院을 지었던 제자의 의로운 도리,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비롯한 당대의 임금과 명신들이 두루 깊이 감동하였던 개결하고 공평무사했던 공직수행,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끝없이 타오르던 그의 붉은 애국충절, 그리고 스승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계승하는 호남 유학자·문인·예악인禮樂人으로서의 중심적인 역할 등, 그가 남긴 인품과 업적들은 그 어느 면에서도 조선시대의 사표가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