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일간
|
주간
|
월간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 네이버책
  • 알라딘
  • 교보문고
"조선총독부"(으)로 143개의 도서가 검색 되었습니다.
9791168879287

조선의 언론과 세상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162,000원  | 20250130  | 9791168879287
『朝鮮의 언론과 세상』은 근대 조선 사회에서 언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한 연구서입니다. 이 책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언론 매체가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특히, 신문, 잡지, 서적, 연설과 같은 언론 매체들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다룹니다. 독립운동, 계몽 운동, 그리고 식민지 체제 아래의 검열과 억압 속에서 언론이 보여준 저항과 창의성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조명합니다. 또한, 이러한 언론 활동이 대중의 의식 형성과 사회적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적 정서를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근대화와 전통의 갈등, 서구 문명의 수용과 그에 대한 조선인의 반응, 일상 속에서의 대중의 삶과 생각이 언론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되었는지를 탐구합니다. 이는 단순히 언론 매체에 국한되지 않고, 당시의 세태와 민중의 의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朝鮮의 언론과 세상』은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조선의 근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언론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과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필독서입니다. 이 책은 언론을 통해 근대 조선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하며, 현대 사회의 언론과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9791168878402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서방모본 [普通學校 書方毛本] 전7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756,000원  | 20241130  | 9791168878402
『보통학교 서방모본』 전7권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행된 한글 교과서 시리즈입니다. 이 책은 조선의 초등 교육 기관인 보통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글의 기초 지식과 글쓰기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따라 편찬된 『서방모본』은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일본어와 일본 역사, 문화 교육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조선의 전통적인 교육방식과는 달리 일본식 교육 방침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당시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조선인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전 7권으로 이루어진 『서방모본』은 기초적인 문자 학습을 시작으로 문장 구성과 독해 능력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사(쓰는 법)에 중점을 둔 학습 방식을 특징으로 합니다.
9791168878464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도화첩 [普通學校 圖畵帖] 전11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1,188,000원  | 20241030  | 9791168878464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보통학교 도화첩**은 한국의 초등 교육 과정에 사용된 미술 교과서 시리즈입니다. 총 11권으로 구성된 이 도화첩은 미술을 통해 어린 학생들에게 시각적 교육과 일본 제국의 이념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림 그리기와 같은 실습 위주의 활동뿐 아니라 일본 문화를 홍보하고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다양한 주제와 기법을 다루었습니다. **보통학교 도화첩**은 초등학생들에게 미술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표현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전통 미술 양식을 강조하거나 자연 경관, 동식물 등을 다룬 그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일본 중심의 문화적 감수성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 책은 단순한 미술 교재에 그치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교육정책과 식민지 교육의 목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도 평가됩니다.
9791168878426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국사 [普通學校 國史] 전5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540,000원  | 20241030  | 9791168878426
*보통학교 국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의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에서 사용하도록 편찬한 국사 교과서입니다.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교과서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 조선인의 역사관을 왜곡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교과서에는 일본의 조선 지배가 필연적이고 긍정적이라는 논리가 담겨 있으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폄하하거나 일본에 종속된 역사로 기술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일본 중심의 시각으로 왜곡하고, 조선의 문화를 미개하거나 뒤처진 것으로 묘사하면서, 일본의 식민 통치가 ‘문명화’를 위한 것이라는 서사를 강조했습니다. 이 책은 당시 일제의 통치 이념과 식민지 교육 정책을 반영하는 중요한 자료로, 일제강점기 시기 식민지 교육과 역사 왜곡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9791168878471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산술서 [普通學校 算術書] 전6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648,000원  | 20241030  | 9791168878471
**보통학교 산술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 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수학 기초 교육을 위해 편찬한 교과서 시리즈로,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산술, 즉 수학적 계산과 논리를 교육하여 학생들에게 기초 수학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교육 과정 곳곳에 일본의 경제적·사회적 배경을 반영하여 일본 제국의 생활 방식과 가치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보통학교 산술서**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같은 기초 연산을 시작으로, 점차 분수와 소수, 도형과 측정 등의 기초적인 수학 개념을 익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예시는 주로 일본의 통화와 단위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들이 일본식 사고방식을 익히도록 유도하며, 일본 사회의 일상적 장면을 반영한 문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단순한 수 학적 훈련을 넘어, 학생들이 일본 중심의 경제와 사회 구조에 익숙해지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합니다. **보통학교 산술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초등 교육에서 수리 능력을 기르는 동시에, 일본 제국의 생활 방식을 학습하는 데 기여한 교과서입니다. 이를 통해 수학적 사고력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의도된 교육 자료로 평가되며, 당시 식민지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9791168878419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한문독본 [普通學校 漢文讀本] 5.6학년용 (전2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216,000원  | 20241030  | 9791168878419
'조선어'와 '한문'을 통합한 첫 교과서 『보통학교 조선어급한문독본(普通學校 朝鮮語及漢文讀本)』은 ‘조선어’와 ‘한문’ 두 교과를 합하여 편찬 · 발행한 첫 보통학교용 국어과 교과서이다. 일제는 1911년 8월 23일자로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는데, 이에 따라 펴낸 교과서가 『보통학교 조선어급한문독본』이다. 이 교과서의 저작 · 발행자는 조선총독부이다. 인쇄소는 권 5까지 ‘서무부인쇄소’1)이고, 권 6의 경우는 도쿄의 돗판(凸版)인쇄주식회사로 되어 있다. 1915년 3월부터 1918년 3월까지 권 1~권 5가 편찬 · 발행되었고, 권 6의 경우는 1921년 3월에 편찬 · 발행되었다. 정가는 권 1~권 3이 6전이며, 권 4~권 5가 22전, 그리고 권 6이 25전으로 매겨 있다. 『보통학교 조선어급한문독본』이 보급된 시기(1915~1921)를 말하여 ‘조선어 교과의 합본기’라 한다2). 바로 그 시기의 첫 해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 교과서는 일제가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들어앉히고(1910)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1911.8.23.)한 다음, 그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던 것이다. 이 교과서의 기본적인 성격으로 굳혀진 것은 ‘조선어’가 외국어로 탈바꿈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제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이로부터 약 2개월 뒤인 10월 20일에 잇따라 보통학교규칙을 발포하는 등 일련의 제도적 장치를 속속 마련해 나갔다. 물론, 이 법령들에서 ‘조선어’와 ‘조선어 및 한문’ 등의 교과목 설정을 명시했다. 즉, 보통학교규칙 제2장 6조에 의하면, "보통학교의 교과목은 수신, 국어3), 조선어 및 한문, 산술, 이과, 창가, 체조, 도화, 수공, 재봉 및 수예, 농업초보, 상업초보로 함."이라 되어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통학교 조선어급한문독본 [普通學校 朝鮮語及漢文讀本]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교과서로 보는 시대별 교육)
9791168878440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수신서 [普通學校 修身書] 전12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1,296,000원  | 20241030  | 9791168878440
**보통학교 수신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 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윤리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편찬한 교과서 시리즈로,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수신’(修身), 즉 도덕과 윤리 교육을 목적으로 하며, 학생들에게 일본 제국의 가치관과 규범을 주입하고자 하는 목표를 담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이 책을 통해 학생들이 일본의 국가와 황실에 충성하고, 군국주의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보통학교 수신서**는 주로 효(孝), 충(忠), 예(禮), 성실(誠實) 등의 덕목을 강조하며, 일본 황실과 관련된 일화나 이야기, 모범적 행동의 예시를 담고 있어 일본 중심의 윤리관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두드러집니다. 이 교과서는 가정과 학교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과 생활 태도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제시하며, 어린 학생들이 일상 속에서 일본식 도덕과 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도덕 교육서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육정책과 식민지적 통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9791168878433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국어독본 [普通學校 國語讀本] 전8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864,000원  | 20241030  | 9791168878433
*보통학교 국어독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의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을 위해 편찬한 교과서로, 총 8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교과서는 조선 어린이들에게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습득시키고,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국어독본*의 내용은 일본의 역사, 문화, 가치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주입하는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조선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학습하도록 강제하고, 일본 문화와 관습을 이상화하며,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조선의 전통과 문화는 폄하되거나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일제가 조선인의 정체성을 억압하고 일본어와 일본적 가치관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한 교육 도구로서, 식민지 교육과 문화 동화 정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입니다.
9791168878457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이과서 [普通學校 理科書] 전6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648,000원  | 20241030  | 9791168878457
**보통학교 이과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과학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편찬한 교과서 시리즈로,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자연과학 전반에 걸친 기초 지식을 전달하는 교재로서, 당시 일본 제국이 원하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자연관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보통학교 이과서**는 동식물, 지리, 기상, 인간 신체, 그리고 자연 현상에 대한 기초 지식을 다루며, 일상 속 과학을 이해시키기 위한 다양한 삽화와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과학 교육의 범위를 넘어, 일본 중심의 자연관을 강조하거나 식민지적 관점을 담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자연환경을 우월하게 소개하거나, 학생들이 자연을 다루는 태도에서 일본의 사상을 내면화하도록 구성된 내용도 엿보입니다. 이 교과서는 당시 조선의 초등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을 이해시키는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과학 교육 및 식민지 교육 정책의 일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9791168878488

조선총독부편 교과서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普通學校 朝鮮語讀本] 전6권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648,000원  | 20241030  | 9791168878488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 교과서로,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전 6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조선어 교육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어와 일본어 병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조선어 독해력과 어휘력을 교육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에 따라 민족어를 제한적으로 가르쳤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은 조선의 전통 생활과 문화, 일상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일본의 식민 통치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이를 정당화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어독본』은 단순한 교과서를 넘어, 식민지 시대의 교육과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9791168872752

조선미술전람회도록 1: 1922년 (1922년)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90,000원  | 20230515  | 9791168872752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한국 현대 미술의 전개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미술전람회는 비록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자율적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하더라도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따른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9791168872745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세트(70세트 한정판)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2,700,000원  | 20230430  | 9791168872745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한국 현대 미술의 전개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미술전람회는 비록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자율적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하더라도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따른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약칭으로 ‘선전(鮮展)’ 또는 '조선미전(朝鮮美展)'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하였다. 관전(官展)주1 형식의 권위 주위로 한국 근대 미술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문치 정책의 하나로 창설되어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 성장하게 하는 등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기여한 바도 있다. 하지만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에 촉진적 구실을 함으로써 화단을 일본화(日本畵)의 영향으로 물들게 하였다. 전람회의 창설은 1921년 10월 28일 개최 취지를 발표한데 이어 같은 해 12월 27일 당시 김돈희(金敦熙), 정대유(丁大有), 이도영(李道榮), 김규진(金圭鎭) 등의 서화계 인사를 총독부로 초청하여 이에 관한 의견 교환회를 가짐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전람회의 명칭이 조선미술전람회로 정해졌다. 공모 부문은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및 조각, 제3부 서예의 3개의 부로, 제1회 전람회를 1922년 봄에 열기로 하는 등의 시안이 마련되었다. 공모 부문에 있어서 서양화 및 조각을 독립되게 설정한 것은 우리나라 미술의 근대화에 뜻깊은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명명한 것은 한국 전통 회화의 타율적 전개를 반영하는 불투명한 용어로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람회의 운영 제도는 그 당시 일본의 가장 큰 관전이었던 제전(帝展)으로 약칭되는 제국미술원전람회(帝國美術院展覽會展)의 체제를 따라 공모 심사의 입선 · 낙선제 및 시상제를 채택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규정’에 의하면, 조선의 미술을 장려, 발전시키기 위한다는 취지하에 ① 매년 한 번씩의 개최 횟수와 공모 부문, 출품 및 무감사(無監査)의 한계, 그리고 출품시의 운송비와 보관상의 책임 소재, 출품된 작품에 대한 투영 묘사 등의 규제, ② 출품에 관한 사항을 10개 조항으로 나누어 1인당 2점 이내의 출품 작품수의 제한과 작품의 크기, 출품할 수 없는 작품의 한계와 출품과 반출상의 주의할 점 등의 규정, ③ 감사 및 심사에 관한 사항으로, 각각 위원의 과반수 출석과 출석 위원 과반수의 동의에 의하여 제반 사항을 결정하되 심사의 등급을 1∼4등으로 나누어 결정, ④ 포상에 관한 규정, ⑤ 출품작에 대한 매매시의 계약 방법과 대금 지불 방법, 폐회 후의 반출 방법의 명시, ⑥ 관람 시간과 관람시의 주의 사항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규정은 전람회가 1944년 제23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6차의 부분적인 운영 제도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1924년 제3회 전람회의 개막 전에 첫 번째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는데, 제1부의 동양화부에 속해 있던 사군자(四君子)주2를 제3부인 서예부로 옮겼다. 1926년의 제5회 전람회에서는 1등에서 4등까지 등급으로 나누어졌던 시상 제도를 특선제로 바꾸었고, 특선자의 무감사 폭을 넓혀 놓았다. 그리고 평의원주3의 자격이 조선총독부 관리로 한정되어 있던 것을 조선 미술에 공이 있는 자로 바꾸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한 사람 중에서 총독이 위촉하는 참여 제도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제7회 전람회가 열렸던 1928년에는 출품 자격에 관하여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다. 한국에 본적이 있는 자 또는 전람회 개회 때까지 6개월 이상 거주한 자로 출품 자격이 제한되었다. 단, 계속해서 3회 이상 입상 또는 특선한 자는 이 제한을 받지 않게 하였다. 1932년의 제11회 전람회부터는 서예 부분을 없애고 사군자는 동양화부로 합치게 함으로써 전통서화 부문을 축소시켰다. 그 대신 공예부를 신설하였다. 1936년 제15회 전람회에서는 추천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 제도에 의하여 추천 작가는 전람회 초기부터 출품하여 특선을 계속한 사람으로 동양화부와 서양화부에 각각 5명씩, 그리고 공예부에 3명을 두되, 심사 위원장의 추천에 의하여 계속 무감사 진열의 특혜를 받게 하였다. 이 때 한국인으로서 추천된 자는 동양화부에 제4회 전람회(1925년) 이후 연속 특선의 기록을 세운 이상범(李象範)과 역시 특선을 거듭한 이영일(李英一) 두 사람이었다. 1937년의 제16회 전람회부터는 다시 참여 작가 제도가 실행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인으로는 김은호(金殷鎬)가 맨 먼저 참여 작가에 오르고, 다음 해에는 이상범이 두 번째로 참여 작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체제와 규정은 광복 이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23회를 거듭하는 동안에 많은 작가들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배출되고 성장하였다. 특선 이상의 대표적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동양화부를 보면, 1922년 제1회전 때 허백련(許百鍊, 추경산수도, 2등상), 김은호(미인승무도, 4등상), 이용우(李用雨, 고성춘심도, 4등상), 김용진(金容鎭, 묵란, 4등상) 등이 입상하였다. 제2회전(1923)에서는 노수현(盧壽鉉)의 「귀초(歸樵)」와 허백련의 「추산모애(秋山暮靄)」가 각각 3등상을 받았으며, 제3회전(1924) 때는 이한복(李漢福, 엉겅퀴, 2등상), 김은호(부활후, 3등상), 변관식(卞寬植, 가을, 4등상)이 각각 입상하였다. 제4회전(1925)에서는 이상범, 이영일이 3등상을, 변관식이 「추산모연도(秋山暮煙圖)」로 4등상을 받았다. 그리고 제5회전(1926)에서 제8회전(1929)까지는 이상범이 계속 특선을 하였고, 노수현(5회전), 이영일(6 · 7회전), 김은호(6 · 7회전), 허백련(6회전), 변관식(8회전), 최우석(崔禹錫, 6회전)도 특선을 하였다. 제9회전(1930)에서 박승무(朴勝武)의 「만추도(晩秋圖)」가 처음 특선되었고, 이상범, 이영일, 최우석이 연속 특선을 하였다. 제10회전(1931) 때 이응노(李應魯)가 「청죽(晴竹)」으로 처음 특선하였고, 이상범의 「한교도(閑郊圖)」와 「귀초도」 두 점이 특선되기도 하였다. 제11회전(1932)에서는 이상범과 백윤문(白潤文)이, 제12회전 때는 이상범과 이용우가, 제13회전(1934)에는 이상범과 백윤문이 특선하였다. 이상범은 연속 특선으로 제14회전(1935)부터는 추천 작가가 되었다. 제14회전부터는 신진 작가들의 진출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찬영(鄭燦英)이 「소녀」로 특선하였다. 제15회전(1936)에서는 김중현(金重鉉)이 「춘양도(春陽圖)」로 특선하였고, 이 때 백윤문도 같이 특선하였다. 제16회전(1937)부터는 김은호가 추천되어 참여 작가가 되었으며, 이 때 김기창(金基昶)이 「고담(古談)」으로, 박원수(朴元壽)가 「만추(晩秋)」로 처음 특선하였다. 제17회전(1938)에서 김기창이 「하일(夏日)」로, 심은택(沈銀澤)이 「정교(靜郊)」로, 그리고 제18회전(1939)에서는 김기창이 「고완(古翫)」으로, 이응노가 「황량(荒凉)」으로, 이용우가 「하정(夏汀)」으로 각각 특선하였다. 1940년의 제19회전에서는 김기창이 「여일(麗日)」로, 최근배(崔根培)가 「봉선화」로, 정종여(鄭鍾汝)가 「석굴암의 아침」으로, 1941년의 제20회전(1941)에서는 김기창이 연속 특선으로 추천 작가가 되었다. 장우성(張遇聖)과 정말조(鄭末朝)가 「푸른 전승」과 「여(旅)」로 처음 특선을 하였다. 제21회전(1942) 때는 장우성, 정말조, 조중현(趙重顯)이, 제22회전(1943)에는 장우성, 정말조, 박내현(朴崍賢)이, 그리고 마지막회인 23회전(1944)에서는 장우성, 이유태(李惟台), 정말조, 조중현, 허건(許楗)이 특선을 하였다. 이밖에도 1935년경부터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작가로 배렴(裵濂), 박생광(朴生光), 김영기(金永基), 천경자(千鏡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김은호와 이상범의 제자들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배출되고 성장하여 한국 현대 화단의 전통 회화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되었다. 서양화 부문에서도 박수근(朴壽根), 박영선(朴泳善), 이마동(李馬銅), 이봉상(李鳳商), 이인성(李仁星),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 등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하면서 한국 서양화단의 선구를 이루었다. 조각 부문은 제4회전(1925) 때 처음 신설되어 김복진(金復鎭)이 3등으로 입상하였고, 제5회전 때 역시 김복진이 특선하였으며, 제6회전 때는 구본웅(具本雄)이 「목의 습작」으로 특선하였다. 제16회전에서 김복진이 「나부」로 다시 특선하였고, 제17회전 때 김복진은 무감사로 출품하였다. 제22회전 때 김경승(金景承)이 추천 작가가 되었고, 조규봉(曺圭奉)과 윤효중(尹孝重)도 특선을 하였다. 그리고 이 밖에 윤승욱(尹承旭), 이국전(李國銓)도 이 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하였다. 1932년(제11회)에 신설된 공예부에서는 응모수 95점에 입선수가 56점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의 작품은 6점이었다. 이 때 이남이(李男伊)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촛대 형식에 촛불 대신 전기를 켤 수 있는 「플로아 스탠드」로 특선하였다. 제12회전 때는 강창규(姜昌奎)가 동경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귀국하여 처음 특선한 이래 제13 · 16 · 17 · 18 · 19회전에서 특선하여 우리나라 공예계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 장기명(張基命) 등도 이 전람회를 통하여 작가로서의 발판을 굳혔다.
9791168872738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동아일보(영인본)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신문의 압수기사를 일어로 번역하여 1932년에 발행한 종합서 - 영인본)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30430  | 9791168872738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신문의 압수기사를 일어로 번역하여 1932년에 발행한 종합서 경무국 도서과에서는 1920년에 민간지가 발행되기 시작한 이후 일제하의 3개 민간 신문인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를 철저히 검열하여 삭제 또는 압수한 기사를 보관하였다가 10년의 분량을 모아 일어로 번역하여 동아일보(조사자료 제29집), 조선일보(조사자료 제30집), 시대일보·중외일보(조사자료 제31집)를 3권의 책으로 만들어 1932년에 발행하였다. 서문에서 “조선에서 발행되는 언문신문의 논조를 조사하면 조선 통치상 가장 좋은[好適] 참고자료가 되며, 조선과 조선 민족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고 적고 있다. 이 자료는 표지에 ‘비(秘)’ 표시를 하여 특정한 사람만이 열람하였으므로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0년대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더욱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로 되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체계화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언론의 논조가 1920년대보다 한층 위축되었다. 언론탄압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30년대에는 기사가 압수 당하는 건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총독부는 1932년에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3책을 발행한 후 1931년부터 1932년까지 2년간의 압수기사를 묶은 비밀자료를 또 한 권 발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37년 5월에는 또 한 권의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을 편찬하였다. 이 자료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4년간 3개 민간지의 압수기사를 한 권에 묶은 것으로 압수기사집록은 세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3개 신문의 기사 4년치를 합쳐도 74쪽의 작은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언문신문 차압기사 집록≫의 발행상황은 다음과 같다. 제1차는 1920년부터 1930년까지의 압수기사로 ≪동아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29집:1932년 9월 발행) 574쪽, ≪조선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30집:1932년 12월 발행) 512쪽, ≪시대일보·중외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31집:1932년 6월 발행) 311쪽으로 발행되었다. 제2차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의 압수기사를 한 책으로 묶어 발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제3차는 1933년부터 1936년 사이의 3개 신문 압수기사를 한 책에 1937년 5월에 묶어서 74쪽으로 발행되었다. 압수기사집록은 일제하 민간신문의 항일논조를 연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중요 자료가 된다. 민족 언론사의 관점에서는 항일 언론 투쟁의 실상이 축약되어 있는 것이며, 언론을 탄압한 총독부의 언론정책은 물론이고 조선 통치의 방침까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압수 기사 가운데는 신문이 정간 당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도 있고, 집필자가 사법처분에 회부되어 형무소살이까지 하게 되었던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압수처분으로 그친 기사라 하더라도 압수건수가 누적되면 일제는 더욱 강력한 탄압을 가하였다. 이 자료의 존재가 알려지자 1972년에는 국내의 민간업자가 영인 출판하였다. 1990년에는 일본의 코리아연구소에서 ‘消された言論(사라진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하여 정치편·사회편으로 나누어 2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는 ≪시대일보≫·≪중외일보≫의 압수 기사는 수록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일제하 민족언론 압수기사 모음’이라는 제목으로 압수기사의 원문을 다시 찾아 보도기사, 논설-논평기사, 기명기사·기타의 3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LG상남언론재단에서 출판하였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791168873131

조선미술전람회도록 13: 1934년 (1934년)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90,000원  | 20230515  | 9791168873131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한국 현대 미술의 전개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미술전람회는 비록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자율적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하더라도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따른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약칭으로 ‘선전(鮮展)’ 또는 '조선미전(朝鮮美展)'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하였다. 관전(官展)주1 형식의 권위 주위로 한국 근대 미술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문치 정책의 하나로 창설되어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 성장하게 하는 등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기여한 바도 있다. 하지만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에 촉진적 구실을 함으로써 화단을 일본화(日本畵)의 영향으로 물들게 하였다. 전람회의 창설은 1921년 10월 28일 개최 취지를 발표한데 이어 같은 해 12월 27일 당시 김돈희(金敦熙), 정대유(丁大有), 이도영(李道榮), 김규진(金圭鎭) 등의 서화계 인사를 총독부로 초청하여 이에 관한 의견 교환회를 가짐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전람회의 명칭이 조선미술전람회로 정해졌다. 공모 부문은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및 조각, 제3부 서예의 3개의 부로, 제1회 전람회를 1922년 봄에 열기로 하는 등의 시안이 마련되었다. 공모 부문에 있어서 서양화 및 조각을 독립되게 설정한 것은 우리나라 미술의 근대화에 뜻깊은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명명한 것은 한국 전통 회화의 타율적 전개를 반영하는 불투명한 용어로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람회의 운영 제도는 그 당시 일본의 가장 큰 관전이었던 제전(帝展)으로 약칭되는 제국미술원전람회(帝國美術院展覽會展)의 체제를 따라 공모 심사의 입선 · 낙선제 및 시상제를 채택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규정’에 의하면, 조선의 미술을 장려, 발전시키기 위한다는 취지하에 ① 매년 한 번씩의 개최 횟수와 공모 부문, 출품 및 무감사(無監査)의 한계, 그리고 출품시의 운송비와 보관상의 책임 소재, 출품된 작품에 대한 투영 묘사 등의 규제, ② 출품에 관한 사항을 10개 조항으로 나누어 1인당 2점 이내의 출품 작품수의 제한과 작품의 크기, 출품할 수 없는 작품의 한계와 출품과 반출상의 주의할 점 등의 규정, ③ 감사 및 심사에 관한 사항으로, 각각 위원의 과반수 출석과 출석 위원 과반수의 동의에 의하여 제반 사항을 결정하되 심사의 등급을 1∼4등으로 나누어 결정, ④ 포상에 관한 규정, ⑤ 출품작에 대한 매매시의 계약 방법과 대금 지불 방법, 폐회 후의 반출 방법의 명시, ⑥ 관람 시간과 관람시의 주의 사항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규정은 전람회가 1944년 제23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6차의 부분적인 운영 제도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1924년 제3회 전람회의 개막 전에 첫 번째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는데, 제1부의 동양화부에 속해 있던 사군자(四君子)주2를 제3부인 서예부로 옮겼다. 1926년의 제5회 전람회에서는 1등에서 4등까지 등급으로 나누어졌던 시상 제도를 특선제로 바꾸었고, 특선자의 무감사 폭을 넓혀 놓았다. 그리고 평의원주3의 자격이 조선총독부 관리로 한정되어 있던 것을 조선 미술에 공이 있는 자로 바꾸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한 사람 중에서 총독이 위촉하는 참여 제도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제7회 전람회가 열렸던 1928년에는 출품 자격에 관하여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다. 한국에 본적이 있는 자 또는 전람회 개회 때까지 6개월 이상 거주한 자로 출품 자격이 제한되었다. 단, 계속해서 3회 이상 입상 또는 특선한 자는 이 제한을 받지 않게 하였다. 1932년의 제11회 전람회부터는 서예 부분을 없애고 사군자는 동양화부로 합치게 함으로써 전통서화 부문을 축소시켰다. 그 대신 공예부를 신설하였다. 1936년 제15회 전람회에서는 추천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 제도에 의하여 추천 작가는 전람회 초기부터 출품하여 특선을 계속한 사람으로 동양화부와 서양화부에 각각 5명씩, 그리고 공예부에 3명을 두되, 심사 위원장의 추천에 의하여 계속 무감사 진열의 특혜를 받게 하였다. 이 때 한국인으로서 추천된 자는 동양화부에 제4회 전람회(1925년) 이후 연속 특선의 기록을 세운 이상범(李象範)과 역시 특선을 거듭한 이영일(李英一) 두 사람이었다. 1937년의 제16회 전람회부터는 다시 참여 작가 제도가 실행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인으로는 김은호(金殷鎬)가 맨 먼저 참여 작가에 오르고, 다음 해에는 이상범이 두 번째로 참여 작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체제와 규정은 광복 이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23회를 거듭하는 동안에 많은 작가들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배출되고 성장하였다. 특선 이상의 대표적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동양화부를 보면, 1922년 제1회전 때 허백련(許百鍊, 추경산수도, 2등상), 김은호(미인승무도, 4등상), 이용우(李用雨, 고성춘심도, 4등상), 김용진(金容鎭, 묵란, 4등상) 등이 입상하였다. 제2회전(1923)에서는 노수현(盧壽鉉)의 「귀초(歸樵)」와 허백련의 「추산모애(秋山暮靄)」가 각각 3등상을 받았으며, 제3회전(1924) 때는 이한복(李漢福, 엉겅퀴, 2등상), 김은호(부활후, 3등상), 변관식(卞寬植, 가을, 4등상)이 각각 입상하였다. 제4회전(1925)에서는 이상범, 이영일이 3등상을, 변관식이 「추산모연도(秋山暮煙圖)」로 4등상을 받았다. 그리고 제5회전(1926)에서 제8회전(1929)까지는 이상범이 계속 특선을 하였고, 노수현(5회전), 이영일(6 · 7회전), 김은호(6 · 7회전), 허백련(6회전), 변관식(8회전), 최우석(崔禹錫, 6회전)도 특선을 하였다. 제9회전(1930)에서 박승무(朴勝武)의 「만추도(晩秋圖)」가 처음 특선되었고, 이상범, 이영일, 최우석이 연속 특선을 하였다. 제10회전(1931) 때 이응노(李應魯)가 「청죽(晴竹)」으로 처음 특선하였고, 이상범의 「한교도(閑郊圖)」와 「귀초도」 두 점이 특선되기도 하였다. 제11회전(1932)에서는 이상범과 백윤문(白潤文)이, 제12회전 때는 이상범과 이용우가, 제13회전(1934)에는 이상범과 백윤문이 특선하였다. 이상범은 연속 특선으로 제14회전(1935)부터는 추천 작가가 되었다. 제14회전부터는 신진 작가들의 진출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찬영(鄭燦英)이 「소녀」로 특선하였다. 제15회전(1936)에서는 김중현(金重鉉)이 「춘양도(春陽圖)」로 특선하였고, 이 때 백윤문도 같이 특선하였다. 제16회전(1937)부터는 김은호가 추천되어 참여 작가가 되었으며, 이 때 김기창(金基昶)이 「고담(古談)」으로, 박원수(朴元壽)가 「만추(晩秋)」로 처음 특선하였다. 제17회전(1938)에서 김기창이 「하일(夏日)」로, 심은택(沈銀澤)이 「정교(靜郊)」로, 그리고 제18회전(1939)에서는 김기창이 「고완(古翫)」으로, 이응노가 「황량(荒凉)」으로, 이용우가 「하정(夏汀)」으로 각각 특선하였다. 1940년의 제19회전에서는 김기창이 「여일(麗日)」로, 최근배(崔根培)가 「봉선화」로, 정종여(鄭鍾汝)가 「석굴암의 아침」으로, 1941년의 제20회전(1941)에서는 김기창이 연속 특선으로 추천 작가가 되었다. 장우성(張遇聖)과 정말조(鄭末朝)가 「푸른 전승」과 「여(旅)」로 처음 특선을 하였다. 제21회전(1942) 때는 장우성, 정말조, 조중현(趙重顯)이, 제22회전(1943)에는 장우성, 정말조, 박내현(朴崍賢)이, 그리고 마지막회인 23회전(1944)에서는 장우성, 이유태(李惟台), 정말조, 조중현, 허건(許楗)이 특선을 하였다. 이밖에도 1935년경부터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작가로 배렴(裵濂), 박생광(朴生光), 김영기(金永基), 천경자(千鏡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김은호와 이상범의 제자들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배출되고 성장하여 한국 현대 화단의 전통 회화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되었다. 서양화 부문에서도 박수근(朴壽根), 박영선(朴泳善), 이마동(李馬銅), 이봉상(李鳳商), 이인성(李仁星),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 등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하면서 한국 서양화단의 선구를 이루었다. 조각 부문은 제4회전(1925) 때 처음 신설되어 김복진(金復鎭)이 3등으로 입상하였고, 제5회전 때 역시 김복진이 특선하였으며, 제6회전 때는 구본웅(具本雄)이 「목의 습작」으로 특선하였다. 제16회전에서 김복진이 「나부」로 다시 특선하였고, 제17회전 때 김복진은 무감사로 출품하였다. 제22회전 때 김경승(金景承)이 추천 작가가 되었고, 조규봉(曺圭奉)과 윤효중(尹孝重)도 특선을 하였다. 그리고 이 밖에 윤승욱(尹承旭), 이국전(李國銓)도 이 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하였다. 1932년(제11회)에 신설된 공예부에서는 응모수 95점에 입선수가 56점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의 작품은 6점이었다. 이 때 이남이(李男伊)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촛대 형식에 촛불 대신 전기를 켤 수 있는 「플로아 스탠드」로 특선하였다. 제12회전 때는 강창규(姜昌奎)가 동경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귀국하여 처음 특선한 이래 제13 · 16 · 17 · 18 · 19회전에서 특선하여 우리나라 공예계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 장기명(張基命) 등도 이 전람회를 통하여 작가로서의 발판을 굳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791168873117

조선미술전람회도록 11: 1932년 (1932년)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90,000원  | 20230515  | 9791168873117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한국 현대 미술의 전개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미술전람회는 비록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자율적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하더라도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따른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약칭으로 ‘선전(鮮展)’ 또는 '조선미전(朝鮮美展)'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하였다. 관전(官展)주1 형식의 권위 주위로 한국 근대 미술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문치 정책의 하나로 창설되어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 성장하게 하는 등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기여한 바도 있다. 하지만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에 촉진적 구실을 함으로써 화단을 일본화(日本畵)의 영향으로 물들게 하였다. 전람회의 창설은 1921년 10월 28일 개최 취지를 발표한데 이어 같은 해 12월 27일 당시 김돈희(金敦熙), 정대유(丁大有), 이도영(李道榮), 김규진(金圭鎭) 등의 서화계 인사를 총독부로 초청하여 이에 관한 의견 교환회를 가짐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전람회의 명칭이 조선미술전람회로 정해졌다. 공모 부문은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및 조각, 제3부 서예의 3개의 부로, 제1회 전람회를 1922년 봄에 열기로 하는 등의 시안이 마련되었다. 공모 부문에 있어서 서양화 및 조각을 독립되게 설정한 것은 우리나라 미술의 근대화에 뜻깊은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명명한 것은 한국 전통 회화의 타율적 전개를 반영하는 불투명한 용어로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람회의 운영 제도는 그 당시 일본의 가장 큰 관전이었던 제전(帝展)으로 약칭되는 제국미술원전람회(帝國美術院展覽會展)의 체제를 따라 공모 심사의 입선 · 낙선제 및 시상제를 채택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규정’에 의하면, 조선의 미술을 장려, 발전시키기 위한다는 취지하에 ① 매년 한 번씩의 개최 횟수와 공모 부문, 출품 및 무감사(無監査)의 한계, 그리고 출품시의 운송비와 보관상의 책임 소재, 출품된 작품에 대한 투영 묘사 등의 규제, ② 출품에 관한 사항을 10개 조항으로 나누어 1인당 2점 이내의 출품 작품수의 제한과 작품의 크기, 출품할 수 없는 작품의 한계와 출품과 반출상의 주의할 점 등의 규정, ③ 감사 및 심사에 관한 사항으로, 각각 위원의 과반수 출석과 출석 위원 과반수의 동의에 의하여 제반 사항을 결정하되 심사의 등급을 1∼4등으로 나누어 결정, ④ 포상에 관한 규정, ⑤ 출품작에 대한 매매시의 계약 방법과 대금 지불 방법, 폐회 후의 반출 방법의 명시, ⑥ 관람 시간과 관람시의 주의 사항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규정은 전람회가 1944년 제23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6차의 부분적인 운영 제도에 대한 개정이 있었다. 1924년 제3회 전람회의 개막 전에 첫 번째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는데, 제1부의 동양화부에 속해 있던 사군자(四君子)주2를 제3부인 서예부로 옮겼다. 1926년의 제5회 전람회에서는 1등에서 4등까지 등급으로 나누어졌던 시상 제도를 특선제로 바꾸었고, 특선자의 무감사 폭을 넓혀 놓았다. 그리고 평의원주3의 자격이 조선총독부 관리로 한정되어 있던 것을 조선 미술에 공이 있는 자로 바꾸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한 사람 중에서 총독이 위촉하는 참여 제도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제7회 전람회가 열렸던 1928년에는 출품 자격에 관하여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다. 한국에 본적이 있는 자 또는 전람회 개회 때까지 6개월 이상 거주한 자로 출품 자격이 제한되었다. 단, 계속해서 3회 이상 입상 또는 특선한 자는 이 제한을 받지 않게 하였다. 1932년의 제11회 전람회부터는 서예 부분을 없애고 사군자는 동양화부로 합치게 함으로써 전통서화 부문을 축소시켰다. 그 대신 공예부를 신설하였다. 1936년 제15회 전람회에서는 추천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 제도에 의하여 추천 작가는 전람회 초기부터 출품하여 특선을 계속한 사람으로 동양화부와 서양화부에 각각 5명씩, 그리고 공예부에 3명을 두되, 심사 위원장의 추천에 의하여 계속 무감사 진열의 특혜를 받게 하였다. 이 때 한국인으로서 추천된 자는 동양화부에 제4회 전람회(1925년) 이후 연속 특선의 기록을 세운 이상범(李象範)과 역시 특선을 거듭한 이영일(李英一) 두 사람이었다. 1937년의 제16회 전람회부터는 다시 참여 작가 제도가 실행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인으로는 김은호(金殷鎬)가 맨 먼저 참여 작가에 오르고, 다음 해에는 이상범이 두 번째로 참여 작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체제와 규정은 광복 이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23회를 거듭하는 동안에 많은 작가들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배출되고 성장하였다. 특선 이상의 대표적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동양화부를 보면, 1922년 제1회전 때 허백련(許百鍊, 추경산수도, 2등상), 김은호(미인승무도, 4등상), 이용우(李用雨, 고성춘심도, 4등상), 김용진(金容鎭, 묵란, 4등상) 등이 입상하였다. 제2회전(1923)에서는 노수현(盧壽鉉)의 「귀초(歸樵)」와 허백련의 「추산모애(秋山暮靄)」가 각각 3등상을 받았으며, 제3회전(1924) 때는 이한복(李漢福, 엉겅퀴, 2등상), 김은호(부활후, 3등상), 변관식(卞寬植, 가을, 4등상)이 각각 입상하였다. 제4회전(1925)에서는 이상범, 이영일이 3등상을, 변관식이 「추산모연도(秋山暮煙圖)」로 4등상을 받았다. 그리고 제5회전(1926)에서 제8회전(1929)까지는 이상범이 계속 특선을 하였고, 노수현(5회전), 이영일(6 · 7회전), 김은호(6 · 7회전), 허백련(6회전), 변관식(8회전), 최우석(崔禹錫, 6회전)도 특선을 하였다. 제9회전(1930)에서 박승무(朴勝武)의 「만추도(晩秋圖)」가 처음 특선되었고, 이상범, 이영일, 최우석이 연속 특선을 하였다. 제10회전(1931) 때 이응노(李應魯)가 「청죽(晴竹)」으로 처음 특선하였고, 이상범의 「한교도(閑郊圖)」와 「귀초도」 두 점이 특선되기도 하였다. 제11회전(1932)에서는 이상범과 백윤문(白潤文)이, 제12회전 때는 이상범과 이용우가, 제13회전(1934)에는 이상범과 백윤문이 특선하였다. 이상범은 연속 특선으로 제14회전(1935)부터는 추천 작가가 되었다. 제14회전부터는 신진 작가들의 진출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찬영(鄭燦英)이 「소녀」로 특선하였다. 제15회전(1936)에서는 김중현(金重鉉)이 「춘양도(春陽圖)」로 특선하였고, 이 때 백윤문도 같이 특선하였다. 제16회전(1937)부터는 김은호가 추천되어 참여 작가가 되었으며, 이 때 김기창(金基昶)이 「고담(古談)」으로, 박원수(朴元壽)가 「만추(晩秋)」로 처음 특선하였다. 제17회전(1938)에서 김기창이 「하일(夏日)」로, 심은택(沈銀澤)이 「정교(靜郊)」로, 그리고 제18회전(1939)에서는 김기창이 「고완(古翫)」으로, 이응노가 「황량(荒凉)」으로, 이용우가 「하정(夏汀)」으로 각각 특선하였다. 1940년의 제19회전에서는 김기창이 「여일(麗日)」로, 최근배(崔根培)가 「봉선화」로, 정종여(鄭鍾汝)가 「석굴암의 아침」으로, 1941년의 제20회전(1941)에서는 김기창이 연속 특선으로 추천 작가가 되었다. 장우성(張遇聖)과 정말조(鄭末朝)가 「푸른 전승」과 「여(旅)」로 처음 특선을 하였다. 제21회전(1942) 때는 장우성, 정말조, 조중현(趙重顯)이, 제22회전(1943)에는 장우성, 정말조, 박내현(朴崍賢)이, 그리고 마지막회인 23회전(1944)에서는 장우성, 이유태(李惟台), 정말조, 조중현, 허건(許楗)이 특선을 하였다. 이밖에도 1935년경부터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작가로 배렴(裵濂), 박생광(朴生光), 김영기(金永基), 천경자(千鏡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김은호와 이상범의 제자들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배출되고 성장하여 한국 현대 화단의 전통 회화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되었다. 서양화 부문에서도 박수근(朴壽根), 박영선(朴泳善), 이마동(李馬銅), 이봉상(李鳳商), 이인성(李仁星),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 등이 이 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하면서 한국 서양화단의 선구를 이루었다. 조각 부문은 제4회전(1925) 때 처음 신설되어 김복진(金復鎭)이 3등으로 입상하였고, 제5회전 때 역시 김복진이 특선하였으며, 제6회전 때는 구본웅(具本雄)이 「목의 습작」으로 특선하였다. 제16회전에서 김복진이 「나부」로 다시 특선하였고, 제17회전 때 김복진은 무감사로 출품하였다. 제22회전 때 김경승(金景承)이 추천 작가가 되었고, 조규봉(曺圭奉)과 윤효중(尹孝重)도 특선을 하였다. 그리고 이 밖에 윤승욱(尹承旭), 이국전(李國銓)도 이 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하였다. 1932년(제11회)에 신설된 공예부에서는 응모수 95점에 입선수가 56점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의 작품은 6점이었다. 이 때 이남이(李男伊)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촛대 형식에 촛불 대신 전기를 켤 수 있는 「플로아 스탠드」로 특선하였다. 제12회전 때는 강창규(姜昌奎)가 동경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귀국하여 처음 특선한 이래 제13 · 16 · 17 · 18 · 19회전에서 특선하여 우리나라 공예계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 장기명(張基命) 등도 이 전람회를 통하여 작가로서의 발판을 굳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