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철학의 현대적 기원, 분석철학
탁양현 | 퍼플
9,500원 | 20190707 | 9788924063103
◈ 분석철학은 무엇인가 1. 분석철학과 미국철학‘分析哲學(Analytic philosophy)’은 철학연구에서 言語分析의 방법이나, 記號論理의 활용이 不可缺하다고 믿는 이들의 철학을 총칭한다. 이러한 분석철학의 흐름은, 특히 현대 美國哲學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상 현대의 미국철학은 분석철학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분석철학의 바탕에는, 그야말로 東西古今의 온갖 철학사상들이 녹아들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非但 분석철학만의 상황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철학사상에 접급하기 위해서는, 그 裏面에 배치되어 있는 哲學思想的 흐름을 이해하고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내 편향적이며 단편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분석철학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분석함으로써 철학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분석철학은, 그러한 분석의 대상을 주로 언어로 삼는다. 언어라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현실세계 자체를 알 수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實證하고 檢證하고 反證하기도 한다. 또한 논리적인 상태를 지향하여 과학적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지극히 현대적인 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대상에 대한 엄밀한 분석으로써 그 대상 자체를 理解할 수 있는가. 여전히 분석철학조차도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南韓과 北韓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국가공동체였다. 朝鮮族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런데 역사의 桎梏 안에서 적잖은 세월이 흐른 후, 이제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21세기에 이르러 韓國人들이, 美國人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北韓人이나 朝鮮族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일마저도 이처럼 난감할 따름인데, 인간존재가 과연 天地自然 자체를 理解할 수 있을까. 分析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굳이 不可知論 따위를 거론코자 함은 아니다. 인류의 天才였던 빼어난 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분석하지 못한 대상을, 과연 ‘개돼지 군중’으로서나 근근이 살아내는 서민대중이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실로 난감할 따름이다. 다음은, ‘비트겐슈타인’이 1921년 10월, ‘버트런드 러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저는 여전히 ‘트라텐바흐’에서 憎惡와 卑賤에 둘러싸인 채 있습니다. 저는 數量이나 程度 따위가 中間인 사람이란, 어디서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더 나은 것이 없고, 어디보다도 무책임합니다.” 이로써 분석철학의 開祖인 ‘비트겐슈타인’이 현실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크게 그릇되지 않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 대부분은, ‘그저 그렇고 그런 중간치’일 따름이다. 그래서 한평생 ‘그저 그렇고 그렇게’ 살아내다가 죽어간다. 실로 그런 것이, 현실세계 인간존재들의 흔한 삶이다. 그러다보니 철학자는 현실세계에 접근하지 못한다. 증오에 찬 群衆, 비천한 ‘개돼지 군중’, 그러한 증오와 비천 속에서, 쓰레기더미에서 피어나는 한송이 연꽃처럼, 철학자는 자기만의 꽃을 피운다. 左派 同性愛者 ‘비트겐슈타인’의 고독한 哲學旅行은, 그러한 과정의 지속이었다. 시대의 ‘금수저 유대인’로서 태어났지만, 그런 탓에 여러 이유로 결코 현실세계와 타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런 것이, 고독한 人文學者의 삶인 것이다. 生來的으로 고독한 탓에 인문학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인문학자인 탓에 고독하다. 분석철학은 그러한 고독의 토대 위에서 피어났다. 그러니 고독을 體得치 못한다면 분석철학을 알 수 없으며, 나아가 철학은 물론 인문학 역시 알 수 없다. 더욱이 현실세계 대부분의 중간치들은, 증오와 비천 속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은 이미 商品과 資本에 절실히 眩惑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