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소송 실무 (제3판)
곽종훈 | 박영사
30,600원 | 20251130 | 9791130398839
제3판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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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던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이 2023년 시작된 소위 의료대란으로 응급의료체계가 붕괴되고 응급 환자가 골든타임 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는가 하면,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내과 등 필수 의료 서비스가 제때 제공되지 못하는 의료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문제가 된 수도권과 지방 간 의료 인프라 격차와 대형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는 쏠림 현상이 개선되기는커녕 수도권의 의료체계마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인구 대비 의사의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적은 상태이다 보니 전공의 및 의사들이 위험 부담이 크고 수익성이 낮은 필수 의료 과목(소아과, 산부인과, 내과 등)을 기피하면서 의료 공백이 발생하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의대 정원의 증원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고, 국민소득 증가와 고령화 및 의료산업의 발전에 따른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효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다가 코로나 19의 팬데믹으로 인한 비상사태를 겪으면서 의사 수의 증가가 강력히 요청되었다. 이에 정부는 2023. 10. 19.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하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고 갑작스러운 정부시책에 대하여 의사, 전공의, 의대생들이 조직적인 반대를 벌이게 된 것이다. 전공의의 이탈로 대형 병원의 병상가동률이 50% 이하로 떨어지고, 응급환자에 대한 조치나 암 환자의 치료가 지연되는 불상사가 이어졌다. 의사 수의 증대에 관한 여론의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의료계에서 정부시책에 반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증원의 규모가 예상 밖으로 큰데다가 정부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강경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일방적인 강압정책이라는 인상을 짙게 주었고, 값싼 인건비에도 희생을 감수하면서 대형 병원을 지탱하여 오던 전공의들로 하여금 장차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리라는 불안감을 갖게 함으로써 집단이탈의 반발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대형 병원의 전체 의사 중 39%에 달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은 기존 의료체계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의료수가가 너무 낮고, 비합리적인 심사 등 규제가 많다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의료계로서는 의료의 모든 현안들이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라는 피해 의식을 갖게 되면서 정부와의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단순한 의대 증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미흡한 응급의료 제도, 의료분쟁으로 인한 외과계 기피, 빈약한 공공의료 등과 같은 잘못된 의료정책이 누적된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고령화와 소득 양극화의 심화 같은 사회환경의 변화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비급여진료에 따른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도입된 실손보험제도가 1차 의료기관에서 비급여진료가 보편화되면서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통증의학과와 같이 비급여진료가 가능한 과목에 개원의들이 몰리는 기현상을 가져왔다. 정부로서는 코로나 펜데믹의 비상사태를 헌신적으로 극복해 낸 의료계의 노고를 위로하고 저수가체계의 개선을 통하여 의료인의 협조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개혁을 끌어냈어야 함에도,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의대 정원 확대나 공공의대 설립과 같은 당장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공공정책을 강요하는 방식을 취한 데에 결정적인 정책상의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의료전문가로 양성하는 데에는 막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인프라가 필요함에도 그에 대한 충분한 사전 점검 및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아니한 채 일단 의과대학의 정원을 크게 늘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성급한 생각에서 서둘러 증원정책을 강행함에 따라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의사 직역의 자존심을 손상시킨 정책적인 실수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의료정책은 우선 환자가 충분히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이 자신의 의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의료시설과 진료시간이 보장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대가가 충분히 지급되어야 하는 한편, 의료과오가 발생하는 경우 이를 바로 찾아 내아 보전조치를 취함과 아울러 그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적절히 보상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의료는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이므로 이미 검증된 시술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치료효과가 있을 것 같으면 아직 시험단계에 있는 시술방법도 쓸 수밖에 없다. 또한 생명이 경각에 달하여 있는 응급상태에서 서둘러 시술을 행하는 것일 경우에는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고 할지라도 사소한 신체적 장애에까지 낱낱이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시술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요한 시술에도 시행착오를 범하기 쉽다. 그러므로 의료과오 여부를 판단할 때 사후적 관점에서 완벽한 시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고 의료수준이라는 통상의 시술 기준을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환자에게 적절한 시술을 받을 기회를 박탈할 우려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의료과오로 인한 손해전보의 문제는 환자와 의사 또는 의료기관 사이의 1:1의 민사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의료제도 전반을 이끄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담당하여야 할 사회보장적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이 광범위하게 행하여졌고 오늘날에도 의사의 윤리를 강화하여야 할 필요성이 여러 각도에서 대두되고 있으며, 어떠한 과제가 발견될 때마다 법적 규제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나 의료 현장에서 비전문가에 의한 법의 개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법은 윤리의 최저한에 그쳐야 하고 의료현장에서 생긴 문제를 의료전문가가 주체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의료전문가의 자발적인 노력(professional autonomy)이 더욱 강력히 요구되고 이러한 노력에 법률 전문가가 협력하여 보다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국 의료과오 소송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의료 사고나 악결과에 대하여 의료인이 환자 또는 가족에게 유감을 표하거나 사과하는 “Apology Laws”(사과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의사들은 의료과오 소송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하여 자신의 실수에 대해 환자측에 사과하도록 권고를 받아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의사들은 자신의 실수에 관하여 가급적 환자 측에 언급하지 말도록 권고를 받아 왔고 그 때문에 환자 측에서는 치료 과정에 발생하는 정당한 합병증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운 벽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연구에 따르면 환자들은 의사가 자신의 과실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며, 의사가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어떤 형태로든 배상할 경우 소송에 나설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 39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는 의사들이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장려하는 법안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법은 주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의사가 환자 측에 동정, 유감, 애도의 표현을 자발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할지라도 후속 소송에서 이를 의료과오의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당해 의사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과법이 의료과오소송의 감소에 실질적인 효과를 미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의사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환자측의 의문을 묵살하는 것보다 낫다는 인식을 의사들에게 심어준 점에서 사과법의 주된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한의사협회도 미국의 JCAHO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 및 환자 안전 확보를 위하여 의료과오의 예방 가이드를 제공하는 등 자율적인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의료는 의사와 환자가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질병과의 전투라는 점을 자각할 때,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의료과오사건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진솔한 자세로 연대관계를 유지함이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금번 제2차 증보판에서, 의료가 각국의 국경을 넘어 범세계적으로 폭넓게 교류하고 있고 의료과오 역시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법률적 현안임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 판례의 추이는 물론 미국, 일본 등 각국의 법률제도와 운영실태를 비교법적으로 검토하여 우리나라 의료소송 실무의 개선책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2025. 9. 30.
서립원에서 저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