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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4015224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11-04-29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마릴린은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마릴린과 나는 입을 활짝 벌린 채 바람을 향해 달렸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목마름으로 길거리를 자유로이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나는 그 시대의 시련에 대한 감수성은 물론 고점과 저점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공유했는데, 이는 훗날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요소가 된다. 그녀가 내 안의 연기자를 불러내왔다면 나는 그녀 안의 철학자를 불러내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마릴린은 그럴 만한 끼가 있었고 재미있었으며 속속들이 예술가였다.
벤치에 앉은 마릴린이 손가락으로 내 턱을 쓰다듬었다. "인생은 열다섯 개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단다." 그녀가 말했다. "이상한 숫자 아니니, 흰둥아? 외판원한테서 들은 얘기였지. 열다섯 번의 큰 걸음, 이라고 그가 말했어. 그런데 어쩌면 단지 두 단계밖에 없는 게 아닐까? 이전과 이후, 이렇게."
우리는 보도의 가장자리를 걸었다. 내가 그림자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땅 위의 이 검은 물체는 마치 생명이 있는 존재처럼 이따금 방향을 바꿀 뿐 절대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묵묵히 나와 보조를 맞춰 걷고 있는 이 다리 넷 달린 친구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했다. 개와 사람과 그 밖의 폐허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대해 플라톤은 해명할 것이 아직 많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무시하지만 그림자야말로 가장 중요한 소유일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자아가 아닐는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그러나 강렬한 사실성을 갖고 존재하는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