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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김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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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 분류 : 전자책 > 사회과학 > 사회운동 > 사회운동가/혁명가
· ISBN : 9791163478812
· 출판일 : 2020-01-03

목차

목차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1. 나는 안동김씨 경순왕 자손이다
2. ‘김자점’의 시대에 멸문지화를 당해, 해주로 망명하다
3. 살기 위해 상놈 행세를 하다가, 진짜로 상놈이 되다
4.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에게 천대를 받다
5. 나의 증조부는 가짜 암행어사 노릇을 하였다
6. 나의 아버지는 삼각혼인을 하였다
7. 나의 태몽, 푸른 밤송이 속 감추어 둔 붉은 밤 한 개
8. 일생이 기구할 조짐처럼, 유례없는 난산으로 태어나다
9. 어머니 젖이 말라, 동냥젖을 먹다
10. 천연두에 걸려, 곰보 자국이 생기다
11. 우리 집 문 앞으로,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지나갔다
12. 주변 아이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다
13. 집단구타한 자들을 죽이기 위해, 식칼을 들고 가다
14. 성한 숟가락을 분질러서, 엿을 사먹다
15. 엽전 스무 냥을 훔쳐, 몰래 떡 사먹으러 가다
16. 들켜서 아버지에게 죽도록 매를 맞다
17. 장련 할아버지가, 매질하는 아버지를 책망하다
18. 물감 장난을 하다가, 어머니에게 몹시 매를 맞다
19. 술에 취하면 사람을 때리는 아버지
20. 아전들을 포섭하는 ‘계방’
21. 공금유용으로 면직당한 아버지 ‘김순영’
22. 술주정이 심했던 계부
23. 계부를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정하다
24. 계부의 행동은, 상놈의 행동거지였다
25. 내가 글공부를 하게 된 동기
26. 새로 서당을 만들고, 선생을 모셔 오다
27.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28. 중풍으로 전신불수가 된 아버지
29. 다시 서당에 다니게 되다
30.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
31. 과거시험장 풍경
32. 과거시험의 실상에 크게 실망하다
33. 마의상서를 보며, 관상 공부를 하다
34. 관상서를 덮고, 병법서를 읽다
35. ‘동학’에 관심을 갖다
36.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동하다
37. ‘동학’에 입도하다
38. ‘연비’ 수천에 달하는, ‘아기접주’가 되다
39. ‘수운 최제우’의 조카 ‘해월 최시형’을 만나다
40. ‘최시형’에게 신통력이나 초능력은 없었다
41. ‘전봉준’이 군사를 일으키다
42. ‘최시형’이 동학군 총동원령을 내리다
43.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체포하다
44. 동학군 선봉장이 되다
45. ‘정덕현’과 ‘우종서’가 찾아오다
46. ‘안중근’이 밀사로서 찾아오다
47. 동학군 ‘이동엽’의 군사와 내분이 일어나다
48. 홍역을 앓다
49. ‘이동엽’의 군대가 쳐들어오다
50. ‘이동엽’이 ‘이종선’을 죽이다
51. ‘이종선’을 매장하고서, ‘정덕현’의 집으로 가다
52. 황해도 동학당 전멸되다
53. ‘안진사’의 ‘청계동’에 머무르다
54. ‘안진사(안태훈)’에 대하여
55. ‘안중근’에 대하여
56. ‘고산림(고능선)’에 대하여
57. ‘과거시험 관상학 동학’에 죄다 실패하다
58. ‘고산림’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다
59. ‘이씨조선’은 더럽게 망해가고 있다
60. ‘중국’으로 갈 결심을 하다
61. 참빗장수 ‘김형진’과 방랑길을 떠나다
62. ‘혜산진’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너다
63. ‘향마적’ 때문에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다
64. ‘만주’에서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라는 앞잡이다
65. 의병을 도모하는 ‘김이언’을 찾아 나서다
66. 만주 군벌 ‘서옥생’의 아들을 만나다
67. ‘김이언’의 의병활동에 가담하다
68. ‘강계성 습격’에 실패하여 몸을 피하다
69. ‘고산림’의 손녀와 약혼을 하다
70.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다
71. 단발령이 시행되다
72. ‘안진사’와 ‘고산림’이 절교하다
73.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다
74. 다시 방랑길이 시작되다
75.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다
76. 살인 혐의로 체포되다
77. ‘인천’으로 이감되다
78. 자살을 시도하다
79. 심문이 시작되다
80. 국모의 원수, 왜구를 때려죽였다고 주장하다
81. 옥중에서 왕이 되다
82. 면회자들이 밀려오다
83. 사진 촬영하는 문제가 발생하다
84. 국제정치적 학문을 접하게 되다
85. 국제정치적 안목을 갖게 되다
86. 죄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87. 화개동 갈보 기둥서방 ‘조덕근’을 가르치다
88. 사형 당한다는 황성신문 기사를 보다
89. 특별사면을 받다
90. ‘김주경’이 석방운동을 하다
91. 탈옥을 결심하다
92. 동성애자 ‘황석용’을 이용하여 탈옥을 도모하다
93. 아편중독자 간수를 매수하다
94. 탈옥을 실행하다
95. 탈옥하여 ‘서울’로 향하다
96. 거지 노릇을 하다
97. 지인들을 만나며, 전국 팔도를 방랑하다
98.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되다
99. ‘마곡사’를 떠나 방랑길을 나서다
100. ‘극암 최재학’을 만나다
101. ‘영천암’ 주지가 되다
102. 해주 본향으로 돌아오다
103. 다시 ‘강화도’로, 고향을 떠나다
104. ‘유인무’를 찾아가다
105. ‘유인무’가 ‘김구’라는 이름을 지어주다
106. 아버지가 돌아가시다
107. ‘여옥’과 약혼을 하다
108. ‘여옥’이 중한 감기에 걸려 죽다
109. ‘오인형’을 만나, 학교를 설립하다
110. ‘최준례’와 결혼하다
111. ‘을사조약’이 체결되다
112.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원이 되다
113. ‘전봉훈’의 초청을 받다
114.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다
115. ‘나석주’를 만나다
116. ‘이재명’을 만나다
117.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을 만나다
118. 신해년(1911) 정월, 다시 체포되다
119. ‘종로 구치감’으로 이감되다
120. 재판을 받다
121.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다
122. ‘불한당 김진사’를 만나다
123.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다
124. 백범(白凡)은 백정과 범부를 합친 것이다
125.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다
126. 가출옥하다
127.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다
128. 고국을 떠나 ‘상해’로 가다
129. 나의 소원

저자소개

김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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