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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893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25-07-18
책 소개
목차
묵주
달의 바다
마틸다
쳐 죽여도 시원찮을
거울의 반역
슈가 대디
쓰디쓴 단맛
하늘 유목민
무늬와 색채
해설
중력의 비극과 숙명의 인간상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주변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막상 그러려고 하니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핏덩이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간 엄마와 오 년 정도 술에 빠져 살다 간암으로 세상을 등진 아버지. 그들은 여자보다 먼저 정리를 끝낸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다르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운 엄마 같은 할머니. 할머니는 여자에게 사람의 살 내음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쳤다. 여자는 할머니로부터 묵상을, 또 오래도록 묵상하는 법을 배웠다. 묵상 속에서 들려오는 답이 진실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묵상 속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하나도 그른 게 없어. 진리는 묵상을 통해 들리는 법이야. 할머니는 교회에서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려주었다. 파이프 오르간 음을 처음 들은 여자는 그녀 본연의 가장 깊은 처소에 지워지지 않는 원초적 울림으로 아로새겨졌다. 건반을 떠난 음색은 사람들의 음습한 영혼을 향기가 짙은 마른 꽃다발로 건조 시킬 것 같았다. 바람이 일으켜 피워 올린 오르간 음은 지상의 바람과 천상의 숨결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여자는 믿었다. 할머니는 딸 같은 손녀에게 속삭였다. 세상에는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단다. 다만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할 뿐이지. 너도 언젠가는 네 가치를 알게 될 거야. 저 음률이 차례대로 하나씩 가르쳐 줄지도 몰라. (「묵주」 중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버지는 유리창을 쇠붙이로 긁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어떻게 할 거냐. 노루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예의 신음 소리와 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짐 싸고 내려와 있어요. 어차피 아버지 구완이라도 해드려야잖아요. 내 걱정 할 것 없다. 난 네가 더 걱정이다. 무슨 걱정요. …아니다. 용주는 떠올리면 온 몸의 신경을 쥐어뜯듯이 들쑤셔대는 아픈 기억을 애써 떨쳐냈다. 신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고통만을 준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 자리에는 신도 고통도 악마도 심지어 용주 자신마저도 없었다. 감각은 모두 휘발되어버리고 하얗게 빈 공간만이 채워진 시야.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그 이후부터였던가. 그녀는 하나 둘씩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 내다버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 그녀는 희망을 버렸다. 이어서 공포에 대한 두려움을.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온 신념을, 철학을, 본능적인 애착을, 그리고 인간이 지녀야 할 윤리마저도. 마침내 그녀는 휑하니 비어졌다. (「달의 바다」 중에서)
그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대신 연거푸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에틸알코올은 그날따라 힘을 쓰지 못했다. 미심쩍음과 께름칙함이 버무려진 그의 오래된 기억의 경계를 둘러싼 타성의 외피를 술은 뚫지 못했다. 각성을 가로막는 에탄올은 급기야 적당한 낙관주의와 타협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를테면 진통 효과를 발휘하는 신약 또는 독성을 완화하는 약물을 개발하기 위해 의뢰한 것일 뿐이다. 어쩌면 자극에 대한 인간 반응의 단계를 계량화시키는 계측기를 개발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다른 방식으로 상상의 과녁에 화살이 적중된다면. 그것처럼 어처구니없는 넌센스가 있을까. 그는 혼자 가여울 정도로 안간힘을 썼다. 그답지 않은 과민함이 하수구가 역류하듯이 차오르면서 부정적인 사고의 둑을 넘어 가능성의 홍수로 범람했다. 한쪽으로 넘쳐 흘러가려는 물을 온몸으로 막으려고 허둥대는 자신의 꼬락서니를 떠올렸다. 그때 판사 출신 변호사가 반쯤 복부를 파고든 검을 깊이 마지막까지 찔러 넣었다. “디테일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매뉴얼 내용은 외부 자극의 강도가 점점 세지는 추이에 따라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뭐 이런 걸로 기억해. 야, 짜식들이 어떻게 그런 걸 연구시켜 고문에다 쓰냐. 나쁜 놈들.” (「쳐 죽여도 시원찮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