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강정 시집)
강정 | 달아실
9,900원 | 20251010 | 9791172070731
강정이라는 시의 파르마콘, 이것은 독이거나 약일 테다
- 강정 시집 『기적』
강정 시인이 열 번째 신작 시집 『기적』을 펴냈다. 달아실시선 101번으로 나왔다.
1992년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혜성처럼 등단한 강정 시인은 그동안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커다란 하양으로』, 『웃어라, 용』 등 아홉 권의 시집을 냈다. 등단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온건한 서정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시에 그어진 온갖 금기를 깨며, 오롯이 시의 전위 혹은 시의 미래를 살아내고 있다.
시인 박정대는 강정의 시를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우리는 감정의 무한 속에서 깃발처럼 나부끼다 본질적 고독에 의해 화르르 점화되는, 순식간에 타버리는 한 점 불꽃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정이 시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이렇다. 일종의 침묵과 통곡의 아이러니다. 침묵은 통곡을, 통곡은 침묵을 내장하고 있다. 간단한 호명으로도, 허공과 지층을 흐르던 시의 수맥들은 강정 시의 황금 잔 속으로 방향을 바꾼다. 한 방울의 물에 바다를 가둬버리고, 그 바다를 하늘로 띄워올려 허공에 떠 있는 바다에서 자신이 원하는 형상의 용을 불러낸다. 아주 용맹하고 세련된 시인의 마스터피스, 그게 강정의 시이다.”
- 박정대(시인)
이번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김지녀는 이렇게 얘기한다.
“미지味知는 기지旣知 속에 내포되거나 가려져 있지 않은 상태로 기지의 모든 것이 허상이거나 가짜로 재현된 실재임을 통찰하는 어떤 힘의 순간적 발현이다. 깨진 달걀에서 흘러나온 점액체를 닭이라 할 수 없는 이치와 비슷하나, 결국 달걀의 형상에서 달걀도 닭도 아닌 다른 것으로 향하는 힘이다. 내가 지향하는 건 오로지 그뿐이다.”
- 「잠결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문
“잠결에 받은 이 편지는 강정 시인에게 최초의 말이자 최후의 말이다. 아침을 말하면 아침이 사라진다. 탄생하자마자 소멸한다. (중략) 그의 시는 이렇게 온다. 왔다가 사라진다. 비어 있는 긴 복도를 발자국 없이 다니는 존재들과 덧없는 사유들이 강정의 이번 시집에서는 형태를 바꿔가며 흘러 다니고 있다. 그러므로 강정의 시는 어떤 통로다. 어떤 의미도 잡지 못하는 성근 그물이다.”(김지녀 시인)
‘독사’는 왜 하필 아무런 근거도 필연도 없이 내게 ‘독사의 노래’라는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집 뒤 자그마한 산속 어디 ‘독사’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독사’는 호랑이처럼 클 수도, 매미처럼 작을 수도 있다. 산새들은 ‘독사’의 이빨에서 천연의 노래를 학습 받아 사람의 꼴로 하늘의 비탈을 활강하는 유령들의 비밀을 토로하고, ‘독사’는 점점 작은 소리로 잦아들며 내 방엔 보이지 않는 허물만 남긴 채 진짜 ‘독사’가 되기 위해 시간을 줄줄이 꿰고는 동그란 무덤 속에 알을 슬고 있을지 모른다. 문득 ‘독사’의 형태가 명료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걸 말로 묘사하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건 불가능한 일. 천둥이 친다. ‘독사’가 그 소릴 무슨 파형으로 감득할지에 대한 추측 말고 더 이상의 상상은 불가능하다. ‘독사’가 운다. 그저 울 뿐이고, 그저 ‘독사’일 뿐, 아무것도 명명하지 않겠다.
- 「죽음을 살아낸 일곱 가지 기적의 사례 - 독사의 노래」 부분
“강정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의 궁극적 아름다움이란 이렇다. 자유롭게 운동하며 찰나의 이미지와 소리로, 형태나 성질로, 존재하다가 소멸하는 사물 또는 존재 그 자체가 매번 낯설게 우리 앞에 돌출하는 것. 이것은 다른 몸에 대한 상상이자 다른 시간에 대한 사유다. 다른 삶과 다른 죽음에 대한 노래이다.”(김지녀 시인)
시집 『기적』은 수록된 시가 18편밖에 되지 않고, 쪽수도 88쪽밖에 되지 않을 만큼 얇은 시집이다. 어떤 틀에도 갇히기를 거부하는 시인 강정의 기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걱정할 건 없다. 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것을 또한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말은 여전히 용암처럼 들끓고, 편 편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수록된 시가 18편밖에 되지 않고, 얇은 시집인 만큼 시집을 통독하는 데에는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이 시집을 통독한 후일 테다. 당신은 지금 독사에게 물렸기 때문이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등과 겨드랑이가 가려울 테다. 그렇다면 당신은 강정에게 제대로 물린 셈이다.
해독제는 없다. 이 시집을 해독하거나 독해하는 것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