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안녕하십니까? (다시 십자가로)
최웅섭 | 퍼플
28,700원 | 20250610 | 9788924158014
머리말
눈물로 지켜 온 길,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국교회는 불과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그 어느 나라 교회도 경험하지 못한 독특하고도 눈물겨운 역사를 써 내려왔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 혹은 당시 가난하고 소외받던 성도들의 간절한 마음이 합쳐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뚫고도 부흥을 이루어 낸 이야기들은 교회 역사의 한 장을 아름답게 수놓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부흥의 열매가 점차 세속적 성공 논리와 맞물려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망하기 직전이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이 나올 정도로, 신뢰 위기와 내부 갈등,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시한번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거룩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습니다.
1. 눈물과 기도로 지켜 낸 시작
한국교회의 시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낯선 땅, 낯선 언어, 그리고 군주권과 신분제 사회라는 문화적 장벽 속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의료 선교사들은 때로 황무지나 다름없던 시골 마을에서 간단한 치료와 예방 활동을 펼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고, 선교사들은 스스로 학교를 세워 문맹률을 낮추고 여성과 어린이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은 질병과 영양실조, 환경의 열악함으로 인해 생명을 잃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반면, 이들의 헌신에 감동한 한국의 신앙 선각자들은 “하나님은 만민을 존귀하게 지으셨다.”는 복음을 붙들고, 신분적 굴레나 가난을 넘어서는 기적 같은 한국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이뤄 갔습니다.
당시 예배당은 신분의 구별 없이 누구나 함께 앉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회적으로도 혁신적인 장소였습니다. 특정 성씨나 양반 계층만 우대받던 관행과 달리, 교회 안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복음을 전하며, 지친 이들의 가슴을 위로하고 삶을 재해석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 나라를 빼앗긴 절망감과 전쟁, 기근 등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교회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초기 한국교회’는 울음과 기도, 밥을 나누고 공동체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는 ‘서로 돌봄’으로 유지되었습니다.
2. 폭발적 부흥과 성장의 그림자
일제강점기의 박해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끈질기게 신앙을 지켜 냈습니다. 광복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에도, 교회는 지역사회 구호와 고아 돌봄, 피난민 지원 등을 통해 이웃을 실질적으로 섬겼습니다. 이 같은 ‘희생’과 ‘섬김’은 곧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골 마을의 교인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와 새롭게 교회를 세우거나 기존 교회에 편입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잘살아 보자’는 열망이 커질 무렵, 교회 역시 그 열망에 발맞추어 건축, 프로그램 확대, 전국적, 세계적 선교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70~1980년대에는 수천, 수만 명의 교인이 모이는 대형 교회들이 등장했고, 각종 집회와 부흥회도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신학교와 기독교 교육 기관이 늘어났으며, 기독교가 사회의 중요한 담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대규모 예배당이 지어졌고, 한국교회의 사회적 입지가 한층 강화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큰 교회’와 ‘유명 교회’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세속화, 기업화의 그림자도 서서히 드리워졌습니다. 교인 수를 마치 매출액처럼 여기고, 새 신자를 ‘고객’처럼 관리하며, 교회 프로그램을 마케팅 차원에서 만들어 냄으로써, 성장 자체가 목적이 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