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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인문학 사상가"(으)로 8개의 도서가 검색 되었습니다.
신비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논담論談 신적 위안의 책/교훈담화/끊어짐에 관하여

신비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논담論談 신적 위안의 책/교훈담화/끊어짐에 관하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엠티에스디지털
17,000원  | 20241128  | 9791199017702
1. 본 우리말 번역은 Josef Quint가 편찬한 에크하르트 전집 제5권을 대본으로 삼았다(Meister Eckharts Traktate. Deutsche Werke Bd. 5). Niklaus Largier의 2권짜리 동일한 버전(1993년)과 Walshe의 영어 번역본도 참조했다. 현대 독일어 번역에서 각기 달리 번역된 개념들은 중세 독일어 원문대로 옮겼다. 2. 본문 내 저자가 인용한 소스들에 대한 역자 주는 최소화했다. 3. 저자가 인용한 성경 본문은 저자 이후의 독일어 성경이나 우리 말 성경 번역과 상당히 다른 경우가 많고 저자가 나름 이해하고 인용한 것은 본문 그대로 옮겼다. 4. 저자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독일어의 의미를 중의법적으로 사용한 경우에 중세 독일어 사전을 참고하여 맥락에 맞춰서 옮긴 경우가 여럿 있다. 그리고 그의 주요 사상을 표현하는 개념들은 현대 철학의 다의적인 개념으로 옮기지 않고, 저자의 사상의 근원인 성경적인 의미대로 우리말로 옮겼다. 5. 사용자 편의를 위하여 Epub 버전과 PDF 버전으로도 제작하였다. 6. 본문 이해를 위해 <신적 위안의 책>에 소제목을 달았다.
일본사상을 만나다 ①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7인의 생애와 사상)

일본사상을 만나다 ①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7인의 생애와 사상)

임태홍  | 도서출판 한순자
15,000원  | 20240501  | 9791193291061
절판된 『일본 사상을 만나다』(성대출판부)를 『일본 사상을 만나다 ①』, 『일본 사상을 만나다 ②』 2권으로 나누어, 일부 개정한 뒤 다시 출판합니다. 기존의 흑백 사진을 칼라 사진으로 바꾸고 각주를 각 페이지에 배치하였으며 색인을 추가하였습니다. 『일본 사상을 만나다 ①』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7인을 소개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 밀교의 창시자 구카이(空海) 2.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3. 춤추는 염불승 잇펜(一遍) 4. 일련종을 창시한 니치렌(日蓮) 5. 신도 사상계의 호걸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俱) 6. 퇴계학의 충실한 소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7. 철저한 주자 신봉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구카이, 사이초, 잇펜, 니치렌은 불교사상가이며, 가네토모는 신도사상가, 라잔과 안사이는 유교사상가입니다. 이들의 불교, 신도, 유교는 우리나라의 불교, 무교, 유교와는 매우 다릅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카이와 사이초는 헤이안 시대의 사상가이며, 잇펜과 니치렌은 가마쿠라, 가네토모는 무로마치 시대, 라잔과 안사이는 에도시대의 사상가입니다. 일본이 헤이안 시대에서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사상적인 편력을 거쳐 왔는지 이 책에 소개하는 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적 사기 (포스트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지적 사기 (포스트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 한국경제신문사
25,000원  | 20140110  | 9788947529419
『지적 사기』는 프랑스와 미국의 학계에서 이뤄지던 지적 남용을 수많은 인용을 통해 여과 없이 보여준 책으로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의 공동저작 한 책이다. 라캉, 보드리야르, 크리스테바, 들뢰즈 등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해 과학적으로 폭로하며 소칼이 그때그때 발견한 극단적인 남용의 사례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던 과학’의 오해에 대해 비판의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승만 김일성,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

이승만 김일성,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

탁양현  | 퍼플
11,700원  | 20190907  | 9788924064407
책소개 현대 南北韓의 정치철학 사상가로서 대표적 인물은, 말할 나위 없이 南韓의 李承晩과 北韓의 金日成이다. 그런데 남한의 右派는 이승만에게 집착하고, 左派는 김일성에게 집착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온전한 정치철학적 관점을 갖기 어렵다. 하물며 남한에서 김일성을 추종한다거나, 북한에서 이승만을 추종한다면, 더욱 혼돈 속으로 빠져들 따름이다. 나아가 이승만이나 김일성을, 남북한 대표 정치사상가로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남북한의 現代政治史를 傍證한다. 실상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란 인간존재 자체는, 별달리 모범으로 삼을만한 행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이외에, 현대 정치사상가로서 내세워질 만한 인물은 정말 없는가. 애석하게도 없다. 金九, 朴憲永, 朴正熙, 金正日 등의 경우도 매한가지다. 그렇게 남북한에 마땅한 偉人이 不在한대도, 남한의 대한민국이 현재와 같은 발전을 일구었다는 것은, 참으로 異彩로운 사실이다. 물론 북한은 이미 몰락한 상태에 있다. 이승만의 정치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同時的으로 김일성의 정치철학을 알아야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매한가지다. 이에 대해 편파적이며 편향적인 지식만을 지니게 되면, 그의 관점은 어김없이 일그러져버린다. 현실세계에서는 흔히 ‘내로남불’ 식의 思惟方式이 일상적이다. 내가 하면 아름다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추잡스런 불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사유방식에 얽매이면, 결코 ‘개돼지 群衆’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가 기득권 세력은, 온갖 프로파간다로써 외려 그러한 상황을 부추긴다. 그래야만 자기들의 방식대로, 서민대중을 선동질하고 조작질하여 利權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파의 입장에서라면, 이승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어려운 노릇인데, 별 관심도 없는 김일성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좌파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결국 ‘개돼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길지도 않은 인생이며,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그런 소중한 삶을 살아내면서, 기껏 ‘개돼지’ 노릇이나 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니 다소 버겁더라도, 어떻게든 숲 속을 벗어나 숲 전체를 보고, 우물 속을 벗어나 우물 밖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구도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첨예한 선택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진영을 상징하고, 김일성은,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사회주의 진영을 상징한다. 지금 한국인들은, 이 두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상황에 逢着해 있다. 이 선택에 따라, 향후 대한민국의 向背는 갈릴 것이다. 그러니 두 진영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국가의 미래가 달린 선택이 그릇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重且大한 선택을 하기 위해, 먼저 그 正體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대 政治史에서, ‘박근혜’는 이미 지난 歷史다. ‘문재인’ 역시 금세 지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는 여전히 ‘박근혜’의 亡靈에 浮沈하며, ‘문재인’의 妄想에 不安하다. 본래 역사는, 항상 이미 지나버린 것들에 집착한다. 그런 것이 역사의 本性이다. 하지만 現實은 未來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역사의 前轍을 되밟게 된다. 그렇게 지난 역사에 얽매이는 탓에,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죽음의 순간까지 ‘개돼지 군중’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국내정치의 온갖 紛亂으로 인해, 한시도 편안치 못하다. 그렇다면 국제정치의 상황은 안정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국제정치에 비한다면, 국내정치야말로 평온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서민대중들은 국내정치의 권력싸움에만 온통 눈이 팔려 있다. 그런 탓에, 그러한 국내정치적 상황을 유발하는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한다. 이래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나’의 삶은 一回的이며 限時的이어서, 이번 生에서 마감되지만, ‘나’의 後世들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그들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역사는 이어진다. 그러니 삶의 한순간도 결코 허투루 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의 토대가 되는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현장 역시 그러하다. ‘李承晩(1875~1965)’은, 李氏朝鮮과 大韓帝國 및 大韓民國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박정희 김정일,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

박정희 김정일, 현대 남북한 정치철학 사상가들

탁양현  | 퍼플
9,800원  | 20190918  | 9788924064582
제1편 박정희1.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다(1940)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인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은, 곧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정치야말로, 가장 거대하며, 동시적으로 가장 세밀한, ‘인간 드라마’이다. 때문에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살피는 현실세계의 모습은, 실로 다채로우며 재미있다. 국내정치는 물론이며, 국제정치에 관련된 뉴스를 접하다 보면, 그것만큼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치적 사태를 이해하여 분석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전반적인 인문학적 지식을 지녀야 한다. 정치철학적 관점은 물론이며, 정치학, 경제학, 법학, 윤리학, 역사학, 심리학 등, 온갖 지식이 망라되어야만 정확한 이해와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과정에 버거움을 갖는 대부분의 서민대중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치적 선동질과 공작질에 의해 ‘개돼지 군중’ 노릇을 하기 십상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도 큰 문제이지만, 정치적 ‘개돼지’가 되어버리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러니 정치적 ‘개돼지’가 되지 않으려면, 죽음의 순간까지 앎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온갖 장르의 지식을 쉬이 접할 수 있다. 그러니 조금만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금세 어느 정도의 정치적 판단을 가질 수 있다. 특히 政治史의 경우는, 서민대중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으려면, 지난 정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를 회고할 때, 이승만이든 김일성이든, 박정희든 김정일이든, 그야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저 대한민국의 국민이므로, 다소의 의무감에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 좀 더 호의적임은 人之常情이다. 분명 그들에 의해,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작정 崇仰한다는 것은, 당최 비위에 거슬린다. 그러한 측면에서, 남한의 상황에 비한다면, 북한의 사이비 메시아 세습 왕조의 상황은, 실로 最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民族主義的 羨望에 사로잡혀, 從北主義的 作態를 보이는 ‘개돼지 群衆’을 대할 때면, 가슴 답답함을 감출 수 없다. 一言以蔽之하여, 북한은 남한에 대해, 동일한 韓民族이라는 同族意識을 전혀 갖지 않는다. 北韓人에게 南韓人들은, 그저 美帝國主義의 앞잡이로서, 돈벌이를 위해, 철천지원수인 일본과 동맹관계에 준하는 짓을 자행하는 傀儡集團일 뿐이다.그러한 인식은, 남한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 없다. 많은 南韓人들이, 겉으로는 남북한의 민족의식에 찬동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이익 추구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실상, 대부분의 남한인들은 북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 굳이 북한이 아니더라도,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킬만한 것들이, 남한에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늘 그 속내는 서로 다르다. 그러한 상황은, 광복 이후, 남북한이 분열을 맞으면서, 현재까지 지속되는 현상이다. 과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서, 남북한이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략-
미국 근대 자유민주 사상가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근대 자유민주 사상가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탁양현  | 퍼플
8,100원  | 20181006  | 9788924057430
미국과 중국과 일본 그리고 보수와 진보 어차피 인생이란, 제 몫의 분량을 責務할 따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허망한 욕심일뿐, 제 몫 이상도 이하도 不得已다. 그러니 여느 노랫말처럼, ‘잘난 놈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놈은 못난대로 사는’ 인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지 보다 잘 살고 싶은 것은 人之常情이다. 이는, 運命論이나 宿命論 따위를 거론코자 함이 아니다. 天地自然의 원리가 본래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富와 名譽와 權力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지구별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애당초 모든 인간존재들이 평등하게 누릴만한 여건이 不備하다. 그러한 바는, 인구가 稀少할 때나, 산업화 이후 急增한 때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존재가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차피 稀貴해 질 수밖에 없으며, 희귀하므로 그 가치는 점점 치솟게 되고, 희귀함을 향유할 수 있음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음이다. 다만, 제 역량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과거의 신분제 사회에 비한다면, 현대사회는 적어도 법률적으로도 공평한 기회쯤은 보장되어 있다. 물론 ‘기회균등’이라는 개념도, ‘세계평화’나 ‘만민평등’이라는 개념만큼 추상적이며 이상적인 개념일 따름이다. 당최 실현될 수 없는 인식적 개념에 불과한 탓이다. 현실세계에서 만인에게 결코 기회는 균등할 수 없으며, 세계는 평화로울 수 없으며, 만민은 평등할 수 없음은, 역사로써 검증되며, 굳이 역사가 아니더라도,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원리인 탓에, 살다보면 저절로 체득케 된다. 이러한 不均等, 不平和, 不平等의 세계일지라도, 부득이하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토대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토대가 흔들리게 되면, 애당초 생존이 불투명하므로, 이런저런 것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존의 토대는 國家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국가를 지니지 못한 탓에, 수천 년 동안 참으로 가혹한 역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를 침탈당한, 예컨대 ‘티베트’의 경우, 참으로 가혹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살아내고 있다. 우리 민족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국가를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국가를 빼앗긴 국민에게는, 이제 개인도 가정도 가족도 가문도 고향도, 죄다 박탈되어버린다. 그러다보니 窮餘之策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서, 他國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의 떠돎이란, 그야말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지칭하던 것처럼, ‘亡國奴’의 신세일 따름이다. ‘망국노’란 ‘國家를 잃어버린 노예’라는 의미다. 이는, 日帝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서, 중국 땅에 빌붙어 사는 조선인들을, 중국인들이 卑下하며 부르던 명칭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만주는 물론이며, 중국대륙의 대부분은, 본래 우리 韓民族(東夷族 聯合)의 영토였다. 현대 중국인의 실질적인 민족적 祖上이라는 漢族의 漢나라의 영토는, 東北工程이나 上古史 문제와 얽혀 異說이 紛紛하지만, 대체로 ‘베이징’ 이남의 지역인 것으로 比定될 따름이다. 여하튼 중국인들은, 중국대륙이 마치 漢族의 땅인 양 착각하며 억지부리지만, 漢族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것은 漢나라, 宋나라, 明나라 쯤이며, 그 영역도 현재의 중국 영토에 비해 지극히 협소했다. 그리고 그 외의 왕조들은 죄다 異民族의 국가체제였다. -하략-
중국 근대 개벽혁명 사상가들, 홍수전 손문 모택동

중국 근대 개벽혁명 사상가들, 홍수전 손문 모택동

탁양현  | 퍼플
10,400원  | 20180926  | 9788924057270
‘빠삐용의 開闢’과 ‘체 게바라의 革命’ 開闢은 곧 革命이다. 개벽이든 혁명이든, 흔히 인위적인 激變인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데 天地自然 안에서 어떠한 변화든, 그것은 자연스런 변화일 따름이다. 그러한 바는, 個人이든 集團이든 매한가지다. 다만, 개벽은 원만한 自然의 측면이 강하고, 혁명은 급격한 人爲의 측면이 강하다는 차이는 있다. 또한 개벽은 종교적 개념이고, 혁명은 정치적 개념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것은 다소 便宜的인 분별일 따름이다. 그러한 detail이 不要한 바는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개벽적 혁명이란, 천지자연 자체의 자연스런 변화라는 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세계에는 온갖 다양한 형식의 ‘開闢的 革命’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개벽적 혁명 중에서, 굳이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가장 巨大한 존재형식인 國家的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고, 가장 微小한 존재형식인 個人 차원의 개벽적 혁명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존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우리 민족의 ‘生存의 利得’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는 집단공동체는 중국과 일본이다. 물론 북방의 여러 민족도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미국이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여건보다도 강력한 地政學的 여건을 좇는다면, 응당 중국과 일본을 우선하여 거론치 않을 수 없다. 中國 近代 역사에서, 그러한 開闢的 革命을 실현한 인물은 홍슈취안, 쑨원, 마오쩌둥 등이다. 이 외에도 개혁적인 변화를 추구한 인물들은 많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실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근대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 중국대륙은, 항상 혁명적 개벽의 변화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지속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반도는, 高麗王朝로부터 朝鮮王朝에 이르는 1,000여년 동안, 마치 ‘고인 물’처럼 별다른 변화가 없이 정체된, 王朝 獨裁의 역사였다. 그래서 오히려 21세기의 한반도는, 개벽적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만큼 개벽적 혁명의 에너지가 오랜 세월동안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미 ‘6?25, 4?19, 5?16, 5?18’ 등의 개벽적 혁명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체험했다고 해서, 이제 개벽적 혁명의 動力이 정지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체험 탓에, 더욱 새로운 개벽적 혁명이 도래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그러한 개벽적 혁명은 어떤 것일까. 21세기 大韓民國이야말로, 開闢的 革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것이, 철저히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人民民主主義와 共産主義’ 주변의 개벽적 혁명들이, 죄다 역사의 뒤안으로 소멸해버리는 것을, 이미 여실히 目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것들을 죄다 삭제해버고서 나아질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면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되는 듯하다. 어쨌거나 개벽적 혁명은, 철저한 現實主義의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예컨대 낭만적 혁명가 ‘Che Guevara’와 같은 理想主義的 想像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지만, 결국 한갓 ‘그림자 연극’에 불과했음이, 역사로써 검증되는 탓이다. 예컨대, 근대 중국에서, ‘홍수전’의 太平天國이라는 개벽적 혁명의 경우를 살피면, 지금으로부터 150~160여 년 전에, 基督敎的 신화를 통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열정이, 無知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먹혀 들어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怪異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략-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퍼플
7,500원  | 20180917  | 9788924057171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 그리고 메이지유신 일본의 ‘사무라이[侍]’는, 무언가를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대체로 그 ‘모심’의 대상이 主君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실상 사무라이가 모시는 대상은 칼이다. 칼이 곧 주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人類史에서, 古代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칼의 시대에, 칼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칼은 상징적인 권력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칼로써 베어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무라이는, 그러한 칼 자체를 神처럼 모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 銃의 시대가 되면서, 칼은 권력을 상실했고, 사무라이도 精神性도 다른 모습으로 변모케 된다. 따라서 尙武精神의 상징이었던 칼은, 物質精神의 상징인 총으로 대체된다. 칼이 主君을 의미했다면, 이제 총은 資本을 의미한다. 물론 근대 이전 中世에, 이미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開港으로써 총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컨대, 일본의 근대를 이끈 ‘메이지유신’ 시기의 ‘세이난 전쟁’은, 철저히 총과 대포를 이용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시기까지, 일본사회는 분명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기존의 사무라이들은 ‘생존의 이득’을 목적하며 정치적 자본가로서의 변모를 꾀했고, 대부분 근대적 자본가로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일본사회에서, ‘칼과 사무라이’의 시대가 ‘총과 자본가’의 시대로 변화하는 樣相이다. 메이지유신을 주제로, 대표적인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면서, 필자로서는 여전히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植民史觀이라는 幽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非但,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東北工程이나 半島史觀의 문제도 그러하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선언할 때 작동한 ‘史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부터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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