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시대
전상국 | 강
20,700원 | 20240812 | 9788982183485
전상국 중단편소설 전집 8권
『사이코 시대』는 이 타락한 세계의 갖가지 병에 대한 소설적 보고서이다. 그 병의 양상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그려 보여주고 과거를 파헤쳐 병의 원인을 찾아 드러내는 개성의 문학 세계가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정확한 언어에 실려 여기 떠올랐다. 전상국이 구축한 소설 병리학의 앞머리에 놓인 작품은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사이코 시대」이다. 저마다 견디기 힘든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며 고통의 바다를 허우적거리며 건너는 병인들로 가득 차 읽기 괴로울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소설이다. 작가는 한 시대를 ‘사이코 시대’라 진단하고,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 보였다. 이 우울한 비관주의가 이념, 도덕적 가치, 이상 사회의 꿈 등 아름다운 것들을 앞세우는 당대 문학 일반과는 다른 개성적 세계를 열었다.
전상국 소설에는 어린 시절에 입은 정신적 외상 때문에 마음이 병든 인물이 자주 나온다. 「사이코 시대」의 땡삐, 「거울의 알리바이」의 르뽀 작가 변재동, 「시인의 겨울」의 주인공인 시인 김현세, 「이것은 기분 문제가 아니다」의 주인공 등. 그들의 정신적 외상은 전쟁·분단의 과거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바, 이 점에서 그들은 전쟁·분단 현실의 상징으로서 문학사에 올라 있는 ‘아베’(「아베의 가족」의 주인공)의 분신들이다. 영혼 깊숙이 낙인된 정신적 외상 때문에 지옥의 시간을 사는 인물에 대해 말하는 서술자의 태도는 안쓰러운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땡삐를 비롯하여 전상국 소설 곳곳에 나오는 아베의 분신들을 서술자는 언제나 연민의 눈길로 바라본다.
전쟁·분단의 과거와 무관한 정신적 외상 때문에 마음이 병든 인물도 있다. 「거울의 알리바이」의 윤혜선, 「개미거미들의 화음」 속 박한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혜선이 무당이 되어 녹두장군을 몸주로 섬기는 것, 많은 남성과 육체관계를 맺는 것, 언제나 죽음 충동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 죽기 전에 덫을 놓아 죽은 뒤에도 자신과 관계 맺은 이들을 구속한다는 것 등은 그 정신적 외상으로만 설명 가능하다.
「거울의 알리바이」, 「개미거미들의 화음」, 「시인의 겨울」에는 각각, 고발문학 작가, 소설가, 시인이 서술자로 등장한다. 문인인 만큼 당연하게도 글쓰기가 주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문학이란 무엇이며 문학 작품을 짓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문제를 향한다.
이런 근본 문제를 향하는 그들의 고민을 이끄는 것은 자신의 지난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다.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작가로 갱신하여 ‘글쓰기의 신명’을 다시 찾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그 반성은 자신의 지난 글쓰기를 근본 부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거울의 알리바이」의 주인공인 고발문학 작가는, 독자들의 취향 및 요구와 타협하는 독자 추수의 글, 대상에 매몰되어 개연적 진실에서 멀리 벗어난 자극적인 고발의 글, 자기 삶의 실현으로서의 글이 아니라 “글 속에 나는 어디에도 없”는 “자기 배반”의 글을 써온 자신에 대한 통렬한 부정을 딛고 “나를 고발하여 처단하는 그 복수극”이라 명명한 새로운 글쓰기로 나아가고자 한다. 「시인의 겨울」 속 시인에게 시 쓰기는 “세상살이의 구체적인 던적스러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찾아낸 하나의 출구”였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찾는 바람직한 세계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들어 있”다는 것, 현실 너머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인간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진짜 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생각의 변화를 따라 ‘아내와 두 아이들’이 그의 시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기도 하였다.
전상국 문학은 사회비판적 성격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 이를 제일 잘 보여주는 작품은 「퇴장」이다. 교장 교감을 비롯한 동료들, 학생들, 학부모들 그러니까 학교를 가운데 놓은 교육계 구성원 대부분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교사가 있다. 자기 나름의 교육관이 분명하여 온갖 어려움에도 물러서지 않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실천하며 나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운명의 덫에 걸려 자살하고 만다. 그 자살은 인간의 이기성, 특정인의 배제를 통해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심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주의와 반민주주의 그리고 경쟁주의, 진실과는 무관한 자극적인 선동의 언어가 난무하는 언론 문화 등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발 비판한다. 그 가여운 죽음은 다른 한편, “죽는 일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어떤 확신”을 딛고, “끝이 아니라 시작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좇아 행해진 의로운 결단의 행위라는 것을 이 소설은 또한 말한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자신이 의미 있다고 믿는 가치가 실현되는 미래를 열고자 하는 이 강한 주체, 의로운 인물의 고귀한 결단은 비장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그 맞은편에 「밀정」의 주인공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전상국의 「밀정」 속 밀정은 우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윤리적 이분법 속에 놓인 밀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관청 급사 노릇하며 사찰계 일본 형사 끄나풀 노릇”을 한 그의 삶의 중심은 프로의식이다. 거짓 정보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결코 정보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철학, 정보 거래는 동등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 거래가 끝나면 관계도 끝내야 한다는 원칙, 정보는 오직 정보와 교환해야지 돈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돈과 여자를 원수로 여겨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원칙 등, 자신이 세운 원칙에 철저한 프로였다. 게다가 ‘일 자체에 탐닉하는 열정’, ‘밑바닥’을 보기까지 ‘편집증적’으로 ‘몰두’하는 성벽 등이 뒤를 받쳤으니 그는 몇 차례 위기에도 불구하고 프로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었다. 전상국은 「밀정」에서 우리 소설사상 처음으로 프로의식에 철저한 밀정이란 인물 성격을 창조하였다. 이로써 한국 소설은 문득 넓어지고 깊어졌다. 소설사의 새로운 의미강 하나가 1987년에 제시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