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를 잃은 시인들 (홍신선 비평에세이집)
홍신선 | 파란
29,700원 | 20250920 | 9791194799108
고졸(古拙)과 앎의 시학
[하프를 잃은 시인들]은 홍신선 시인의 비평에세이집으로, 「도시적 감성과 시의 새로움-김경린의 초기시를 중심으로」 「문학사와 창조적 비평의 예술혼-조연현론」 「기억의 소환과 생명의 리듬-전봉건의 시와 삶」 「내 시의 이즘 민낯들」 「시와 선, 하나 혹은 둘?-나의 시, 나의 부처님」 「앎의 시학과 선의 관법(觀法)」 등 55편의 평론과 에세이 등이 실려 있다.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1965년 [시문학] 추천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서벽당집] [겨울섬] [삶, 거듭 살아도](선집)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 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홍신선 시 전집] [마음經](연작시집) [삶의 옹이] [사람이 사람에게](선집) [직박구리의 봄노래] [가을 근방 가재골], 산문집 [실과 바늘의 악장](공저) [품 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잡지 않는다] [사랑이란 이름의 느티나무] [말의 결 삶의 결] [장광설과 후박나무 가족], 비평에세이집 [하프를 잃은 시인들], 저서 [현실과 언어] [우리 문학의 논쟁사] [상상력과 현실] [한국 근대문학 이론의 연구] [한국시의 논리] [한국시와 불교적 상상력]을 썼다. 서울예술대학, 안동대학교, 수원대학교,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노작문학상, 문덕수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하프를 잃은 시인들]엔 비평도 실려 있고, 시집 해설도 실려 있고, 단평도 실려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인이 자신의 시를 담담히 읽은 단문도 실려 있고, 시 창작법을 간략히 제시한 글도 실려 있고, 이런저런 다정한 회고담들도 실려 있으며, 수상 소감도 두 편 실려 있다. 그러니 [하프를 잃은 시인들]은 증증한 비평집도 아니고 순일한 에세이집도 아니다. 그렇다고 비평에세이집이라고 적는 일이 온전히 마땅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세속의 갈래들은 단지 갈래들이 아닌가. 이 책은 그러한 갈래들을 넘나들며 아니 더 온당하게 말하자면 여하한 유형과 분량과는 상관없이 시랍(詩臘, 홍신선 시인이 불가에서 쓰는 ‘법랍(法臘)’에 기대어 빚은 용어) 60년을 맞이한 시인의 일생이 어떤 순정한 정신 하나로 집결되는 장면을 거룩하게 보여 준다. 어느 글이나 어느 지면이나 어느 행간이나 시의 길에서 어긋남이 없고 벼리지 않은 문장이 없다. 그러니 [하프를 잃은 시인들]은 통째로 시학이다. [하프를 잃은 시인들] 곳곳에 적힌 바대로 그 시론을 꿰뚫는 두 가지는 ‘고졸(古拙)과 앎’이다. 홍신선 시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고졸이란 말은 작품에 기교가 없는 듯 서툴러 보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아한 맛이 거기 있을 마련이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솜씨는 거칠지만 그 나름의 격(格)을 온존시켰다는 의미다. 짐짓 거칠지만 그 가운데 세련미를 갖춘다.” 그리고 ‘앎’이란 “삶이나 세계의 실상을 짚어 낸다는” 맥락이다. “여기서 앎이란 정보나 단순 지식도, 체계적 담론도 아니다. 시 속에 직수입된 생경한 철학이나 종교적 담론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시인 개인에게 육화되어 제시된 시적 담론이라야 한다. 그 같은 육화된 담론이 내가 뜻하는 앎이다. 최근 시는 나를 그런 앎의 공간으로 몰아넣고 있다. 암튼 도저한 인식이 작품 심층에 뿌리박고 있는 시-나는 그걸 곰곰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고졸과 앎’의 시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도야하는 일이다. 책에 적힌 바를 또한 그대로 옮기자면 “무릇 예술가는 자기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 가야 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것, 자신의 일체가 담긴 예술을 만들어 가야 한다. 예술가에게 있어 삶이란 그 같은 자신을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요컨대 시란 영원히 지양되는 과정으로서의 자기를 구현하는 이행이다. 홍신선 시인이 자호(自號)로 삼은 ‘운보(耘甫)’는 따라서 다만 ‘터앝을 김매는 사람(농부)’에 그치지 않는다. 이 겸양 어법 속엔 등단한 지 한 갑자를 이룬 시인이 부단히 스스로를 갱신하고자 한 여무진 결기가 서려 있고 더불어 문자를 넘어 이 세계 전체를 경전으로 삼은 자의 그윽하고 서늘한 눈매가 맺혀 있다. 가히 장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