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 카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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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은 브로드웨이에서는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와 함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낸 연출가였고, 할리우드에서는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캐롤 베이커, 나탈리 우드 등 무명의 배우를 ‘스타’로 발굴하고 <신사협정>, <워터프론트>, <에덴의 동쪽> 등 영화사에 남을 수많은 작품을 감독한 거장이었다. 특히 반유대주의를 소재로 만든 <신사협정>과 부두 노동자들과 자본가 계급의 대립을 다룬 <워터프론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1909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그리스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엘리아 카잔은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에 정착하였고, 예일대학교에서 연극을 공부한 후 브로드웨이를 발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연극배우로 출발했으나 연출로 방향을 돌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을 무대에 올려 토니상을 받았다.
브로드웨이의 활약을 거쳐<브룩클린의 나무 성장>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20세기 폭스사의 데릴 자눅 사장의 ‘명작 브랜드 정책’에 힘입어 승승장구한다. 이후 <혁명아 자파타>, <에덴의 동쪽>, <초원의 빛> 등을 발표해 아카데미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신사협정>, <거리의 공황> 등 그의 초기작은 필름 누아르 스타일과 사회파 리얼리즘의 태도를 결합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7년에는 리 스트라스버그 등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해 우수한 배우들을 양성하기도 했는데, 그가 거느린 사단에는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워렌 비티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속해 있었다.
엘리아 카잔의 삶에는 명성만큼이나 크나큰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1950년대에 불어닥친 매카시 광풍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는 1952년 하원 반미(反美)활동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30년대에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음을 고백하는 동시에 함께 활동한 8명의 동료들의 이름을 밝힌다. 그로 인해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1954년 <워터프론트>로 재기에 성공했을 때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은 평생공로상을 수여받았지만,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마틴 스콜세지나 로버트 드 니로와 달리 그와 지난 시절을 함께 했던 에드 해리스, 아서 밀러 등은 그를 냉담한 눈길로 지켜볼 뿐이었다.
엘리아 카잔은 할리우드에 연극의 전통을 끌어들였고 스크린에 미국인의 거칠고 방황하는 삶을 옮겨온 장본인이자, 할리우드를 지배할 ‘메소드 연기’의 산실인 액터스 스쿨의 수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 출신으로 자신을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여겼던 그에 대한 논란은 2003년 그가 사망한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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