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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언어학
· ISBN : 9788933707890
· 쪽수 : 960쪽
· 출판일 : 2021-05-18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
1. 비문의 문학적 가치
2. 형성기의 석비문·비지문
3. 석비문·비지문의 발전과 문체미학
4. 석비문·비지문의 자료적 가치
(1) 일문 보충과 생애 사실 보완
(2) 인물 행적의 발굴
(3) 역사·문화 해석의 심화
(4) 학맥 혹은 법맥의 확인
(5) 교감 자료의 확장
5. 금석학과 문학 연구 방법론
6. 『금석집첩』의 탁본 자료
<부록> 『금석집첩』 및 『금석속첩』 수록 탁본 2,081점
제2부 석비문·비지문 문체의 역사적 개관
1. 비문과 문체
2. 문언어법 산문의 석비문과 비지문 출현
(1) 고대 비문의 제행·산행 혼합
(2) 고대 비문의 문언어법 한문과 이두식 한문 혼용
(3) 지석의 단형 기서체 산문
(4) 매지권 형식의 잔존
3. 변문 투식 산문의 석비문과 비지문
(1) 「신라문무왕릉지비」
(2) 변문의 수용
(3) 사산비명
(4) 변문의 발달
4. 한국식(이두식) 한문의 비문
(1) 고대 비문의 이두식 한문
(2) 고려시대 비문의 이두식 한문
(3) 조선시대 한국식 한문의 활용
5. 비문의 용운
(1) 낙랑 비문의 용운
(2) 용운법의 수용
(3) 비명에서의 용운 중시
(4) 고려시대 압운 명(銘) 양식의 발달
(5) 조선시대 비명의 용운과 유희
6. 고려와 조선의 비문 구조
(1) 행문의 첨삭
(2) 대론의 제시
(3) 평어·명과 일화의 조응
(4) 전고와 기실의 균형
(5) 대화문의 활용
(6) 복합 구성
7. 유이민 지문과 신발굴 비문의 문체
(1) 유이민 지문의 문체
(2) 신발굴 비문의 문체 감정
<부록> 「광개토왕비」와 사산비명의 구법·평측 분석
제3부 석비문의 문체
1. 고려 이전의 순수비와 기적비
(1) 「영일냉수리신라비」
(2) 「울진봉평리신라비」
(3)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4)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2. 불교 관련 석비
3. 고려·조선의 기념비와 기적비
(1) 고려의 산천 제사비
(2) 고려 말·조선 초의 기적비
(3) 「동래남문비」와 「삼전도비」
(4) 왕실 사적비
(5) 태실비
(6) 「화성기적비」
(7) 민간의 기적비
4. 전승비와 토적비
(1) 고려 말·조선 초의 전승 기념비
(2) 임진왜란 이후 전승비
(3) 토적비
5. 사묘비, 고릉비, 묘정비
(1) 기자묘비
(2) 문묘비
(3) 고릉비(古陵碑)
(4) 묘정비
(5) 공신비
(6) 표충비
(7) 유허비
(8) 시사단 비명
(9) 관왕묘비와 무후묘비
6. 영건수축기념비
(1) 축성비
(2) 교량비
(3) 대장각비
7. 정려비와 의열비
(1) 정려비
(2) 의열비
(3) 복수비
(4) 호성비
8. 선정비와 거사비
(1) 목민관 칭송 선정비
(2) 제언비 겸 혜민비
(3) 해운비와 조산비
(4) 간이형 선정비
(5) 명나라 장수 거사비
(6) 조사 거사비
(7) 향리를 위한 불망비
9. 영험비, 약조비, 시비
(1) 영험비
(2) 약조비
(3) 시비(詩碑)
제4부 비지문의 문체
1. 탑비와 석종비
(1) 신라와 고려 초 화상비
(2) 고려시대 탑비
(3) 고려 말 석종비
(4) 조선시대 탑비
2. 고려시대의 비지문
(1) 권력자의 묘지
(2) 여성 묘주의 묘지
(3) 요절자를 위한 묘지
(4) 자찬 묘지
3. 고려 말 신도비와 묘표
(1) 신도비
(2) 부모 묘표
(3) 사시묘표
4. 조선시대 국왕 및 왕족의 비지문
(1) 조선 초 산릉의 지석
(2) 능지
(3) 사친 추존 비지
(4) 왕족의 비지
(5) 국왕이 작성한 비지
5. 조선시대 사대부의 비지문
(1) 신도비
(2) 묘표
(3) 묘갈
(4) 묘지명
(5) 순절·거의인의 비지
(6) 무인의 비지
(7) 자찬 비지
6. 조선시대 요절자를 위한 비지문
(1) 망아의 묘표와 광지
(2) 요절자의 비지문
7. 조선시대 여성 묘주의 비지문
(1) 사대부 여성의 묘지
(2) 사대부 여성의 묘표와 묘갈
(3) 비빈·후궁의 신도비와 공주의 묘표
(4) 여대사 묘주의 비명
(5) 요절한 여성의 묘표
(6) 기생의 묘표
(7) 만시각자비(挽詩刻字碑)
8. 중인·서얼·군인·평민·내시·노비의 비지문
(1) 중인의 비지, 중인이 찬술한 비지
(2) 서얼의 비지, 서얼 문인이 찬술한 비지
(3) 군인의 묘비
(4) 평민의 묘비
(5) 내시의 비갈
(6) 노비의 묘표
제5부 비문의 문체미학과 정치
1. 비문의 찬술과 입비
(1) 비문 찬술과 입비 과정
(2) 비문 찬술의 자료
2. 비지문의 찬자
(1) 가족 및 친족의 입언자
(2) 친우와 지인
(3) 대작
3. 복수의 비지문
(1) 신도비문의 신찬
(2) 신도비문의 교체
(3) 후기와 추기
4. 비문 문체의 이론
(1) 이황의 비문 행장 공기론
(2) 송시열과 정호의 주빈 배치론
(3) 김창협의 비지 문체론
(4) 이광사의 순정구문무익론(循情求文無益論)
(5) 박지원의 원방장단론(圓方長短論)
5. 비문의 문체와 정치
(1) 현창과 신원
(2) 생략 혹은 은폐
(3) 비문의 어휘 선택과 정치
(4) 묘주의 위상 변화와 일화 첨가
(5) 비지문의 기능
6. 비문의 서자
(1) 고대 비문의 서자
(2) 조선시대의 대표적 서자
(3) 집자비
7. 근현대 공간의 비문
맺는말
참고문헌 /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고려 중엽까지 석비는 순수비, 전승비(위령비 포함), 기적비(중수비·중흥비 포함), 탑기명비, 장경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부도와 함께 세운 탑비 또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탑비는 비지의 일종으로 분류하기로 한다. 석비의 찬술자는 사관과 같은 심경으로 사실을 엄정하게 보고하고자 했다. 조선의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비지(碑誌)는 해섬(該贍: 풍성하게 아우름)을 위주로 하는 사전(史傳)과 달리 간엄(簡嚴: 간략하고 엄정함)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근대의 임서(林?, 1852~1924)는 석비의 문체에 대해, 어휘가 순실하고 고고해야 하며, 음향의 결합이 굳세고 튀어 올라야 하며, 색조가 고아하고 소박해야 한다고 했다. 행문과 관련해서는, 긴 어구를 늘어놓아야 할 경우 짧은 어구로 끊고 허자를 덜 사용해야 응축적이고 묵중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이를테면, 한유(韓愈)의 「평회서비(平淮西碑)」와 「남해묘비(南海廟碑)」는 10여 자를 한 구로 한 예가 없다고 했다. (중략)
비지문은 후한 이후로 성행하기 시작해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북위에서 발달했으며, 위·진·수·당에서 널리 지어졌다. 지문은 본래 묘비의 글보다 간략했으나, 당·송의 문장가들이 전문적으로 제작하면서 묘비의 글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풍부하게 되었다. 즉, 비지문은 묘주의 성명·자호·관향·가계·선덕(先德)·출생·졸수(卒壽)·천분·자질·관력·행적·공적·학덕·품행·찬자·장일(葬日)·장지(葬地)·자손록 등을 기술하고 찬자의 평어, 세간의 평론을 첨부하는 방식이 발달했다. 또 이 내용을 바탕으로 운문으로 된 명(銘)을 붙여 결사(結詞)로 삼았다. 산문으로 기록한 서(序)와 글 전체를 운문으로 개괄한 명(銘)의 두 부분이 있을 때는 서를 ‘병서(幷序)’라고 했다.
―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 중에서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의 『금석집첩』은 탁본을 배접하여 책으로 만든 법첩(法帖)이다. 각 비문마다 잘라 붙인 항수(行數)와 항자수(行字數)가 균일하며, 대지(擡紙)를 배접하고 서배(書背)를 맞춘 것 또한 정교하다. 전액(篆額)은 한 글자마다 탁본하여 이어 붙였다. 문자의 크기가 큰 것은 탁본 끝을 책 중앙에 붙이고, 나머지를 안쪽으로 접어 두었다. 그리고 탁본을 1종에서부터 24종까지 모아 각각 책을 이루고, 조선시대 서적 장정법에 따라 제첨(題簽)을 따로 붙이지 않고 묵서(墨書)로 제명(題名)을 기재했다. 왕실에서는 능비(陵碑)를 세우면서 탁본도 같이 제작했는데, 상신(相臣)이나 부마(駙馬)의 신도비도 건립 때 탁본을 따로 제작한 듯하다. 탁본은 주로 건탁이나 습탁으로 제작했으며, 문자만 칠해 떠낸 선시탁(蟬翅拓)도 간혹 있다. 원탁(原拓)으로는 바탕에 두드린 자국이 남고 색깔이 옅을 경우, 글자를 제외한 바탕을 다시 먹으로 칠하는 오금탁(烏金拓)의 방법을 사용했다. 왕실에서는 오금탁을 한 후 종이와 비단을 덧대어 족자로 꾸며서 보관했는데, 문벌가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탁본을 보관했을 듯하다. 그런데 『금석집첩』의 탁본은 원문을 판독하기 어려울 때, 해당 원문을 작성한 찬자의 문집을 열람하여 전사(塡寫)하거나 추기(追記)해 두기도 했다. 즉, 자(字)·사(詞)·행(行)에 걸쳐 백서(白書)한 예가 적지 않다. 간혹 주서(朱書)가 보이는데, 이것은 원탁에서 묻어난 듯하다. 자구를 보완할 때는 배접지 상단[천두(天頭)]이나 하단[지각(地脚)]에 적어 두기도 하고, 첨지에 묵서하기도 했으며, 탁본의 일부분을 뜯어내고 배접지에 직접 묵서하기도 했다. 『금석집첩』의 속편인 『금석속첩』에는 덧칠이나 보사가 없다. 일부 책자의 등[背]에는 ‘흠흠헌(欽欽軒)’이라고 묵서되어 있는데, 이것은 김재로의 헌호(軒號)로 추정된다.
―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 중에서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석비 및 비지에 새겨진 비문은 비의 기능과 성격에 따라 문체가 상당히 다르다. 408년(광개토왕 18) 제작된 「덕흥리고분묘지」와 414년(장수왕 2) 건립된 「광개토왕비」, 고구려의 「중원고구려비」, 신라의 「단양신라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순수비 등은 문언어법의 한문 문체로 비문이 작성되어 있다. 하지만 「임신서기석」처럼 한국어 어순을 따른 한문 문체를 사용한 예나, 5세기경 「모두루묘지」처럼 이두 표기를 혼용한 한문 문체를 사용한 예도 병존했다. 이후 한국식 한자어나 이두어를 사용하고 한국어 어순의 한문 표기를 혼용한 한국식(이두식) 한문을 사용한 비문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한문 문장은 같은 글자 수의 구끼리 규칙적으로 이어나가거나 교차시켜 나가기도 하고, 전혀 규칙적이지 않게 의도적으로 늘어놓거나 규칙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벌려놓기도 한다. 전자를 제행(齊行)이라 부르고 후자를 산행(散行)이라고 부른다. 제행 가운데는 두 구끼리 짝을 이루는 대우(對偶), 같은 형식의 3개 구 이상을 늘어놓는 유구(類句)도 있다. 4·4구나 4·6구를 늘어놓으면서 대우를 고려하고 평측을 교호시킨 문체가 변문(騈文)이다. 한문 문장의 일정한 위치에 운자(韻字)를 놓는 경우가 있는데, 제행은 물론 산행에도 압운(押韻)을 할 수 있다.
― ‘제2부 석비문·비지문 문체의 역사적 개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