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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문학
· ISBN : 9788947803854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3-06-19
책 소개
목차
감사의 말씀
추천사
김태영(백양로교회 담임목사, 증경총회장, 한국교회봉사단 대표단장)
최태영(목사, 영남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시작하는 말
1. 노화
1) 인생의 꽃
2) 조화의 찬미
3) 주님께 감사
2. 영광
1) 노인의 무게
2) 원로목사의 무게
3) 무게, 곧 영광
4) 존경을 피하는 존경
3. 겸손
1) 자기를 줄이고 지워 가기
2) 받기보다 베풀기
3) 예수 닮기, 주고 섬기는 것
4) 하나님이 보낸 후임을 존중하기
5) 자신보다 교회를 생각하기
4. 신앙
1) 성경이 정본이다
2) 자신이 선포하고 가르친 신앙 회상
3)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4) 삶으로 표현되는 신앙
5) 시급히 준비할 과제
5. 예배
1) 예배, 엎드리기
2) 주님과 만나는 사건
3) 주님과 눈 맞추기
4) 주님의 영광을 섬기기
5) 인생의 영원한 과제
6. 정결
1) 건강관리
2) 영적 정결
3) 육적 정결
4) 점점 더 갖출 품위
7. 관계
1) 하나님과의 관계
2) 사람과의 관계
3) 거리 조정하기
4) 이어 가기
8. 사랑
1) 인생과 사랑의 과제
2) 욕심 버리기
3) 사랑하는 가치
4) 성경의 중심 교훈
5) 사랑의 아름다움
9. 교회
1) 그리스도의 몸
2) 마음 둘 곳
3) 공동체의 신비
4) 하나님이 뜻하신 어머니
10. 긍정
1) 성경이 가르친 긍정, 하나님의 자녀
2) 스스로 지킬 자아
3) 마귀의 유혹과 손절하고
4) 공동체 안에서의 꽃 같은 사람
11. 소망
1) 이 몸의 소망 무언가
2) 하나님의 어전
3) 저 높은 곳, 하나님의 나라
4) 소망으로 얻는 구원
5) 떠나가기 쉽게 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 이어령은 늙음을 서러워하는 감정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뜻을 두고 다 이루지 못한 늙음, 둘째는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늙는 늙음, 셋째는 죽음에의 공포가 그것이다.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래서 억지로 노화, 혹은 늙음에 대해 거부해 보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늙음을 서러워하며 그 서러움을 노래하는 것이 인간 일반의 정서이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정복해야 할 원수로 보지만(고전 15:26), 노화, 즉 나이가 들어 가는 과정 그 자체를 극복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노화는 문제가 아니다. 노화를 경계하는 현대의 통속적 견해나 문화는 오히려 당황스럽고 건강하지 않은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화를 재촉하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탈무드는 그것을 네 가지로 보았다. 공포, 분노, 아이들, 악처가 그것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의 삶이다. 삶의 내용이다. 삶이 우리를 노화로 데려다준다. 하나님이 인간을 노화로 데려간다. 그래서 늙는 것은 막을 길이 없고, 늙는 것은 감사로 받아야 한다. 목사 역시 한 인간이기에 노화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로서의 목사는 함께 즐거움으로 그 길을 가야 함이 자신의 품위가 될 것이다. (…)
(…) 따라서 노년으로서의 원로목사는 꽃이고, 아니면 꽃이 되어야 한다. 꽃은 자신을 위해 있기보다 보는 이를 위해 있다. 꽃은 자신의 행복을 사출하여 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미와 향기를 가진 꽃은 세상에 행복과 평화를 선사한다. 그런 꽃이 되는 것은 지도자가 가진 사명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쇠, 즉 늙고 쇠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로목사가 꽃으로 피고, 열매로 결정되는 것은 신앙의 극치 아닐까.
우리는 늙어 간다고 흥분할 필요는 없다. 꽃잎이 떨어진다고 장미 포기가 울부짖지는 않는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꽃이 피지 않거나 꽃이 못 되는 것이 문제이다. 꽃은 피어 있을 때도 좋지만 떨어질 때도 좋다. 떨어져야 꽃의 의미가 오는 것 아닐까? 그 식물의 종은 꽃이 떨어진 이후에 확정되는 것이니까. (…)
(…) 마틴 부버는 하나님을 제3자로 보는 것을 비판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장애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의 3인칭이 아닌 2인칭이다. 하나님은 나의 ‘그’가 아닌 나의 ‘당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눈 맞춤은 하나님을 더 이상 ‘그’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사랑이 머물고 머물러야 할 나의 그, 그의 나여야 함을 간과하지 말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 변죽에 둔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눈 맞추기가 안된다. 하나님과 눈 맞춤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원로목사는 육신의 눈은 비록 흐려져 세상과 사물과 사람이 멀어져 가지만 영의 눈은 밝아져 하나님께 대해 눈을 떼지 못하는 참된 예배를 누려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하나님께 눈을 맞추면 하나님의 미래가 보인다. 예배에서 하나님께 눈 맞춤이 성립되면 그의 나라가 보인다. 더 명료하게는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영광의 빛으로 다가온다. 죄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눈 맞추고 그만 믿고 서 있으면 하나님은 그의 옷자락으로 우리를 덮어 주실 것이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이사야가 경험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나타난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쉐키나’가 아닌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 ‘카보드’이다. 하나님과 눈 맞추고 나갔더니 그곳은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