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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60926691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21-12-01
책 소개
목차
편역자 서문
일러두기
약어표
베즈의 칼뱅 전기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Articles de 1537)
제네바 신앙교육서(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1537)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Confession de la foi [de Farel], 1537)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1541)
제네바 교리문답서(Catechismus, 1545)
제네바 콜레주 규정(L’ordre du College de Geneve, 1559)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de 1561)
책속에서
[편역자 서문 중에서]
1990년대 초부터 진행해 온 편역자의 칼뱅 한국어화 작업은 다음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하나는 한국 장로교회의 영적 뿌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고전 인물의 한국어 텍스트가 총서로 묶여 도서관 및 관련된 개인/단체 서재에 꽂혀 있어 활용되어야 할 당위성이다. 활용이라 함은 일례로 논쟁이 되는 사건(세르베투스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을 텍스트로 확인해 보는 일이며, 나아가 2차 자료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지적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칼뱅, 나아가 동아시아의 칼뱅의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길 바라는 소망이다. 번역의 정확성도 여전히 미흡한데다, 아직 아무 결과물도 내놓지 못한 채 거창한 주제를 언급하는 것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지만, 이것이 편역자가 지금껏 시도해 온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의 궁극 목적이다.
첫째 목적은 텍스트의 분량과 정확성으로 평가될 수 있다. 분량으로 말하면 전집이 아니기에 추가되어야 할 문서들이 더 있을 수 있지만 주요 소품들은 모두 갖춰졌다. 16세기 용어의 정확성은 지속적으로 확인될 필요가 있다. 소품의 내용 확인에 목적을 두었던 편역자에게는 중세와 근대를 아우르는 유럽의 정치와 법을 아우르는 제도사까지 연구할 여력이 없었다.
둘째 목적의 성취 여부는 방법론에 달려 있다. 칼뱅의 <서간집> 1권과 <기독교 강요>(1541) 프랑스어 초판이 청년 칼뱅을 통해 개혁신학의 태동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칼뱅의 생애를 관통하는 본 소품집은 제네바의 개혁교회와 신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얼마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당연히 이 과정의 결과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제네바 개혁신학은 유럽과 신대륙으로 이동하는 동안 모판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또한 각 현장의 수용 과정에서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양 세계에서 역사적 개혁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며, 비 서양 세계의 다른 토양에서 개혁교회와 신학을 수용하고 확장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로서는 토론만을 양산시킬 뿐인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길은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일이다. 그래도 질문은 계속된다. 제네바 개혁자가 전기 칼뱅과 후기 칼뱅으로 나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소품집에서 칼뱅의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답을 얻으려면 직접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베즈의 칼뱅 전기 중에서]
그는 54년 10개월 17일을 살았고 절반을 거룩한 복음 사역으로 보냈다. 그는 보통 키에 약간 창백하고 거무스름한 안색과 죽을 때까지 맑았던 눈을 가졌고 총명을 타고났다는 말을 들었다. 옷차림은 세련되지도 남루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절제라는 말이 어울렸다. 식사도 절식했으며 허접이나 향락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우 적게 먹었는데, 많은 햇수 동안 약한 위장 때문에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고 기억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그가 한 번 본 사람은 많은 해가 지난 후에도 즉각 알아보았으며, 구술 도중 종종 몇 시간 동안 혼란이 생길 경우, 알려 주지 않아도 이내 받아쓰던 곳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또한 자신의 소임 때문에 알아 두어야 할 중대한 것은, 아무리 무한히 많은 업무로 압박을 받아도 결코 잊지 않았다. 판단력은 상담 내용이 무엇이든 맑고 정확해 거의 예언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의 충고를 따른 사람이 방황한 기억이 없다. 그는 말솜씨를 경멸했고 말을 적게 했으나 결코 부적합한 작가는 아니었다. 이날까지 어떤 신학자도 (시샘하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맑게, 더 무게 있게, 더 통찰력 있게 글을 쓰지 못했다.
그가 우리 시대나 교부 시대의 누구보다 더 많은 문헌을 작성했음에도 말이다. 그는 이것을 젊은 날의 주야독경과 받아쓰기의 훈련으로 굳어진 예리한 판단력으로 이뤄냈는데, 그리하여 그에게는 언제나 적합하고 신중하게 표현한 뭔가가 없지 않았으며, 말하는 것과 글 쓰는 것이 많이 다르지 않았다. 교리로 말하면 그는 그가 처음에 전했던 것을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고 한결같았는데, 우리 문헌 속에서 이랬던 신학자는 드물었다. 그의 품행에 대해 말하자면, 비록 천성이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지만, 공동생활에 있어서 그보다 더 유쾌한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