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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61043328
· 쪽수 : 144쪽
· 출판일 : 2023-03-20
책 소개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벗은 이슬의 행적은 나무에 맺힌 새의 연혁도 모르고
환몽 10
평행 11
모조 시간 14
빈틈없이 텅 빈 어떤 투명의 단면 16
시작하는 잠시 18
통과하는 온갖 19
저기 유리 너머에, 우리 22
누누 25
우리가 모르는 빗소리의 일부와 28
구름 무렵 30
404 Not Found 33
반복되는 손 34
얕은 밤의 물고기 36
잠시의 모형 37
증발하는 정말 38
해부대 위에서 잠시 누구인가 하면서 40
반토막 45
무반주 46
제2부 그래도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꿈꿀까 싶어
분홍 무렵 48
빗소리의 정원 49
벚꽃이 지는 속도 52
새가 창업한 바다는 섬을 탕진하였다 54
모조 맥박 56
가히 캠프적인 종류 58
입 없는 밤의 소수의견 60
오래된 잠시 62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65
제3부 우리 같이 구름할래요?
종결어미 68
구름 연대기 70
구름하실 거예요? 76
구름 셈법 78
비形 미래 80
루틴 83
어떤 밤의 방문 84
반향실 86
어느 겨를 88
과도기적 거울 91
구름痛 92
미세 투명 94
제4부 당신은 정량으로 슬퍼질 수 있나요
비탈 96
영구적 잠시 97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98
某某 100
某요일 102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104
난반사 108
거울 나비 110
유리 우리 111
시작되지 않기 위해 끝나지 않는 112
존재하려는 만약 117
무향실 118
잇 120
행인 0의 행방 122
▨ 이병관의 시세계 | 이성혁 124
저자소개
책속에서
평행
구름에 매달려 죽은 새를 상상했다
출구 없는 통로를 상상했다
흔들리는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횡단하는
초록 벌레를 상상하다가
정량으로 슬퍼하라는
식어버린 시인 선생님을 나는 슬퍼했다
열 살 무렵
온 누리 하얄 때
혼자 파랗게 떨다가 별이 되어버린―
피어난 자리가 아물지도 않은
한 아이를 사랑했다
사과처럼 빨갛게 쏟아져버린 아이
내겐 많은 압정이 필요해
날아오르는 새들을 공중에 꽂아두려면
일기를 쓰다가 쓸 말이 없어서
비좁은 밤 자꾸만 드물어지는 홀로―
앨범에 넣지 않고
상자에 모아놓은 사진을 꺼내 보았다
요행히 아직 죽은 적이 없는 사람들
다행히 이미 살아버린 사람들
내겐 가위가 필요해
시간이 통과하는 그늘을 자르려면
층계도 없이 층층이
아무도 아무 데도 없고 고요만이 이는,
통로에서 태어난 아이가
벽을 두드린다
투명한 속살을 가진 적막
슬픔은 어딘가 뉘어 놓은 자신의 몸을 찾았다
놀라 깨자 아직은 캄캄한 밤
꿈속의 아이가 아직도 벽을 두드린다
아무도 없는 소리
아무리 묻어도 파묻히지 않는 구름
식어가는 분간을 떠는
흔들리는 고요
나는 막 쓸려나가는
자신의 잎새를 마주하는 나무처럼
가장 가늘게 흔들리고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두고 내린 것도 없고, 혹여나 잃어버릴 만한 마음도 가진 적 없었는데, 괜히 호주머니를 뒤적이게 되는 것은.
부쩍 마르고 있는 마음 탓일지도 모르겠다.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표현할 어떠한 언어도 없이 마음 한구석 허전한 요즘, 자꾸 마음이 진다. 마치 수원지를 잃어버린 강물처럼, 셀 수 없이 반짝이는 은빛 수면같이.
떠나버린 버스를 한참 쳐다보았다. 다행히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마치 두고 내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돌아서서 손짓하는, 그런 모양처럼 느껴지는.
마음이 지고 있다니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생각하면 도무지 붙잡히지 않는 마음이 내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이란 것이 처음과 끝을 알기 어려운, 끝과 끝을 맞잡고 펴서 잴 수 없는 느닷없이 다가오는 새벽처럼,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체념하면서도 시시각각 밀려드는 의구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이 막 지나 거리는 부산하고,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외로워 보이는 가로등처럼, 딱 혼자만큼 어두워지는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하고, 그들의 지친 등이 괜스레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는 빈방처럼 쓸쓸하게 느껴지고, 그러니 몰래 다가가서 가서 괜히 노크하고 싶어져서는.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나는 지금 왜 이런 생각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는지 되짚어보고 있다. 버스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을 때 무언가 오래 생각했거나 아니면 떠올랐던 마음이 기억나지 않아 자책하는 그런 마음도 아닌데, 별스럽지도 않은 이 문장이 왜 자꾸 맴도는 걸까. 이제 추억해야 할 기억이 더 많은 나이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쌓아 놓은 추억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기억나지 않거나 떠오른 추억들을 오래 붙잡아 다독일 만큼 다정한 마음들이 메말라버린 것일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슬퍼지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컴퓨터 속에 오래 묵혀놓은 조각난 파일들처럼 조각나버린, 금세 사라져버리는 어떤 포말 같은, 흘러가는 구름의 어느 한구석같이 꽤나 좁고 길게 맺혀 있는 것들로 아득한 그런 장면들, 아직 살아갈 날은 많은데 무언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생각들로 가득한 나이, 그리고 창밖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 어린 내가 있던 그때,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비좁고 가늘어지는.
적막. 돌연 적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넘치고 시간이 멈춘 것도 아닌데 숲속 어느 구석, 낡은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쓸쓸해 보이는 누군가의 등과, 위태롭게 바람을 견디는 혹은 야위어 떨어지는 잎새들― 쓸쓸해져서 다시 시작되는, 그런 마지막과 같이,
한번은 넘어져야 배울 수 있는 자전거와 같이, 다시 일어나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마지막과 같이― 다시 처음을 향하는, 목적지보다 먼 출발지로 향하듯, 그런 생의 어떤− 그러니 아득해졌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래, 어쩌면 나는 막 시작하려는 마지막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으로 향하는, 어느 계절의 내가, 가장 빛났던 어느 순간을 향하는, 예민하고 금세 사라져버릴 것 같고 다시는 상처 주지 않고 다정함도 잃지 않는, 오래도록 추억할, 아직 남은 우리들의 시간을 향해서 그리고 결코 공유되지 않을, 지독하게 빛나는 우리 각자의 홀로에 대해서.
나는 지금 한참을 걷다가 다 식어버린 지하철 역사에서 막 떠나간 막차를 염원하는, 신발 속에서 다 삐져나오지 못한 그림자처럼 여기 서 있다.
버스에 노을을 두고 내렸다.
이 문장을 몇 시간째 생각하고 있다.
벚꽃이 지는 속도
야심한 밤에 소년의
울고 있는 표정을,
앓고 누운 남자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소년은 끝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대신에 소년의 표정을 벗고
나를 따라 언덕에 오르자고 말하고 싶었다
꽃도 나무도 아무런 희망도 없는 푸른 언덕에
그리고 말하고 싶다
그곳은 실은
쥘 것도
줄 것도 만질 것도
맛볼 것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지만
충분히 흔들릴 수는 있다고
흔들려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거라고
소년은 당신과 다르게
평생 당신을 찾지 않을 것이고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이미 천사를 잃어버렸고
아무것도 없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