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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와 문화 감성

한국 근현대와 문화 감성

류시현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05-19
  |  
1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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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와 문화 감성

책 정보

· 제목 : 한국 근현대와 문화 감성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인문학 일반
· ISBN : 9788968491061
· 쪽수 : 328쪽

책 소개

한국의 역사, 지리, 문화, 어학, 종교 등에 관한 연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국가(민족) 단위로 정리하고자 한 권상로, 이능화, 안확, 문일평, 최남선, 안재홍 등을 통해 오늘날 한국 문화 연구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다층적 모습을 확인하고자 했다.

목차

1부 조선학과 정체성
1910년대 조선불교사 연구와 조선학의 토대 형성 _10
1910~20년대 안확의 개조론과 조선 문화 연구 _42
1920~30년대 문일평의 민족사와 문화사 서술 _75
해방 후 안재홍의 일제강점기에 관한 기억과 감성 _105

2부 지리와 여행
한말 일제 초 한반도에 관한 지리적 인식 _136
여행기를 통해 본 호남의 감성 _164
근대 조선 지식인의 세계여행과 동서양에 관한 경계 의식 _195

3부 슬픔과 분노
광주학생운동과 전국적 공감의 감성 _226
태평양전쟁 시기 학병의 감성동원과 분노의 기억 _256
1940~60년대 시대의 불안과 조지훈의 대응 _289

참고문헌 _317

저자소개

류시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교수 2018년 현 광주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주요 저서] 『최남선 연구』, 역사비평사, 2009 『최남선 평전 우리 근대와 민족주의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 한겨레, 2011 『한국의 근대 문화장(場)의 동역학』(공저), 소명출판, 2013 『한국 근현대와 문화 감성』, 전남대학교 출판사, 2014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 3·1운동 기사집』,(역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2015 『동경삼재 : 동경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의 삶과 선택』, 산처럼,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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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부 조선학과 정체성

1910년대 조선불교사 연구와 조선학의 토대 형성

1. 조선학의 외연과 내포
한국학은 한국이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민족 단위의 학술, 문화, 예술 행위 전반을 다루는 학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ㆍ1운동 이후 조선인의 연구를 통한 정신ㆍ사상ㆍ학술의 독립을 천명하면서 ‘조선학’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930년대 민족적인 자아와 주체성의 재정립을 목표로 한 ‘조선학 수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민족 공동체 내부의 필요성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학의 외연과 내포를 설정하는 작업은 전통 가운데 계승과 폐지해야 할 것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중국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일본의 학문적 자장 안에서 거리두기를 시도하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조선학의 성립과정을 살펴볼 때 동양 안에서 특별히 조선을 서술 주체로 삼았던 1910년대 조선불교사 연구에 주목해야 한다.
1910년대 조선불교사 연구와 관련해서 권상로(權相老)의 『조선불교약사(이하 약사)』와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이하 통사)』가 민족문화의 일환으로 조선불교를 근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된다. 이렇듯 조선이란 단위의 불교사를 정리한다는 문제의식은 한국학 연구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조선불교사 연구를 불교학적 관점을 넘어서, 조선학 연구의 차원에서 검토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1910년대 권상로와 이능화의 조선불교 연구와 당대 조선역사와 문화 연구에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최남선(崔南善)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이능화와 권상로의 조선불교 연구가 불교학의 영역에서, 이능화와 최남선의 ‘문화사학’ 연구는 사학사의 영역에서 검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구획을 탈피하면 1910년대 최남선은 조선불교 연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그동안 최남선의 조선불교에 관한 인식은 1930년 『불교총보』에 게재된 「조선불교」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이글에서는 1918년 『매일신보』에 게재한 「『조선불교통사』에 대하여」란 글을 통해 그의 1910년대 조선불교에 관한 인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글에서는 1910년대 조선불교가 조선학 연구의 일환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서 첫째, 권상로, 이능화, 최남선의 학문적 교류를 살펴보겠다. 특히 최남선의 『약사』와 『통사』에 관한 책 광고문을 중심으로 상호간의 조선불교와 불교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주목하고자 한다. 둘째, 조선불교사가 근대적인 학문방법론으로 서술되었다고 했을 때 민족 단위의 민족사와 연동되면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불교가 어떻게 재조명되는지를 검토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학의 일환으로 조선불교사를 검토할 경우 일본과의 학문적 경쟁을 넘어서 조선불교가 동양적, 세계적 차원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국학의 과제 설정과 연동시켜 검토하고자 한다.

2. 조선불교사 연구자의 학문적 교류
신구(新舊) 학문이 충돌한 한말 시기,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 수련과정과 실천 활동은 세대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면 1880년생인 신채호가 전통적인 한학(漢學)을 수련한 후 계몽운동에 참가했다면 1892년생인 이광수는 일본 유학을 통한 신교육을 습득하고 신문화운동의 첫 세대가 되었다. 이능화는 1869년에, 권상로는 1879년에,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났는데, 이들의 학문 수련 과정은 서로 달랐다.
이능화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1880~90년대 여러 외국어 학교를 통해 신학문을 수련했고, 권상로는 출가 후 불교학을 지속적으로 연구했으며, 최남선은 10대 후반에 일본 유학을 통해 신지식을 습득했다. 다양한 지적 수련과정과 사회 활동을 한 이들 3인의 학문적 교류 관계는 1910년대 조선불교 연구란 공통분모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권상로와 이능화는 불교 관련 단체 활동과 잡지 기고 등 조선불교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1910년대 후반 각각 『약사』와 『통사』를 집필 간행했다. 반면 최남선은 1910년대 조선불교에 관한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통사』의 교열을 담당했으며 그가 주관한 신문관에서 『약사』와 『통사』가 출판되었다.
1918년 당시 발행 도서 목차를 보면, 신문관에서는 학술(14종), 수양(8종), 문예(30종), 잡종(10종) 등 단행본 총 62권을 발행했다. 그 가운데 불교 관련 서적은 학술서로 『통사』, 『약사』와 함께 김월창의 『선학입문(禪學入門)』 등이, 수양서로 한용운의 『불교대전』, 장도빈의 『위인 원효』 등이 출판되었다. 신문관에서 다수의 불교 서적이 출판될 수 있었던 이유는 최남선이 10대 중반부터 조선불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조선불교에 관해 최남선이 주목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일본 유학시기 신학문 수련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최남선은 1905년 경 일본에서 이루어진 불교의 활발한 문화적, 사회적 활동과 일본인 불교자의 철학적 연구를 보면서 불교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조선 역사와 문화 연구에서 조선불교가 가진 위상에 주목했다.
1910년대의 글에서 최남선은 “조선사를 연구하는 한 명의 학도요 불교와 불교사에 대하여는 진실로 지식이 적은 문외한이지만, 불교로써 문화의 원두(源頭)를 삼고 생활의 기조(基調)를 이룬 1천 5백년 이래의 조선사는 정치, 법제, 교학, 문예 어느 방면으로든지 불교와 불교도의 관계와 교섭을 제외하고는 조사하고 해석하며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그는 조선불교 연구를 조선 역사와 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시공간을 대상으로 불교사가 정리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권상로는 『약사』를 서술한 계기를 “인도, 중국, 일본 등 불교가 있는 곳에서는 모두 불교사가 있으나 오직 우리 조선에만 홀로 없다. 내가 이를 분개한 생각을 가지고 여러 해 동안 대장(大匠)을 대신해서 이를 가다듬었고, 보고 들은 것을 모집하고, 분망한 사이에 이를 편철(編綴)했다”라고 밝혔다.
최남선이 일본 불교 연구에서 학문적 자극을 받은 것처럼, 권상로가 다른 나라에 있는 불교사가 우리에게 없음을 ‘분개’한 것은 타자와의 경쟁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능화도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진 불교사가 조선에 없다는 현실에 관해 ‘한심함’이란 감정을 피력했다. 이렇듯 일제에 대한 대응 감성이 조선불교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불교가 수입 이후에 교운(敎運)의 흥체성쇠(興替盛衰)와 종파의 내력 연력을 문의해 본 즉 명백히 대답하는 자 거의 없더라. ㆍㆍㆍ 지금 조선불교가 1,500년 이래로 계통적 역사가 전혀 없음은 ㆍㆍㆍ 한심하지 않은가 ㆍㆍㆍ 『조선불교통사』를 저술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하여 불교에 뜻이 있는 자에게 조선불교에 대하여 참고자료를 공급하기에 급급함으로써 동기를 삼노라.

1910년대 신문관에서 이능화와 권상로의 저서가 출판되었으며, 이와 함께 조선이 주어인 불교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3인은 서로 학문적 교류를 했다. 이러한 교류관계는 서로의 저서와 기고문에서 상호 인용을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용은 자신의 학설을 보완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권상로의 『약사』는 체제상 인용 부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능화와 최남선은 서로의 글에서 상대방을 인용했다.
이능화는 일본 사신이 고려대장경을 구하러 왔다는 제목을 단 『통사』 하편의 「일본사래구고려장(日本使來舊高麗藏)」에서 최남선이 1916년 11월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투고한 「고려판대장경」이란 부제의 글을 한문으로 번역해서 수록했다. 시간적으로 약간 뒤인 1922년 최남선은 「조선역사통속강화」에서 이능화의 『통사』의 ‘성모대익설화(聖母大溺說話)’를 인용했다. 인용은 자신의 학설을 보완한다는 측면과 함께 상대방의 학설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한편 학문적 상호 교류는 주관하는 언론매체에 상대방의 학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권상로와 이능화의 조선불교 연구에 관한 성과를 최남선은 자신이 주관한 잡지 『청춘』에 게재했다. 1917년 6월 『청춘』 8호에 권상로의 「조선불교의 변천」이, 같은 해 11월 『청춘』 11호에 이능화의 「조선불교의 종파 원류(源流)」가 소개되었다. 전자는 삼국시대부터 당대까지 조선불교의 역사적 흐름을 서술했으며, 후자는 조선불교 12개 종파에 관한 역사적 계보와 의의를 설명한 글이다.
잡지란 매체의 특성상 각각 6쪽과 12쪽에 불과한 분량이었지만, 최남선은 권상로와 이능화의 저술활동 가운데 조선불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글을 선택했다고 판단된다. 상호간의 조선불교에 관한 인식은 『약사』와 『통사』를 집필한 동기, 목적 그리고 독자층을 누구로 설정하고 있는가 여부와 이에 관한 최남선의 책 광고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 문화상품인 책은 광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출판인 최남선도 이에 주목했다. 그는 “도쿄(東京)에 머물면서 여러 신문을 한가롭게 열람함이 매일 정해진 일과였다. 더욱 도쿄의 신문은 매우 좋아하는 서적 광고문을 많이 게재하고 있어, 소일거리인 동시에 즐거운 일”이 된다고 밝혔다.
책 광고를 읽는 것이 취미생활이라고 밝힌 최남선이 주관한 신문관의 서적 광고는 각종 총서나 소설의 기획 출판을 조장하고 유도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최남선은 책 광고문에 관해 “문장의 묘(妙)는 감동의 능률 여하로 판단하고 문장의 미(味)는 함축의 분량과 연동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책 광고의 상업적 효과에 관한 인식은 『약사』와 『통사』의 광고문에도 반영되었다.
권상로의 『약사』가 1917년 8월에, 이능화의 『통사』는 1918년 3월에 출간되었다. 출간 직전부터 최남선은 두 책에 관한 광고를 언론매체에 게재했다. 1917년 6월 발간된 『조선불교총보』 제4호에는 “깊은 밤에 든 조선불교사계(朝鮮佛敎史界)에 2대 명성(明星)의 출현”이란 제목아래 두 책의 출간을 예고하는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문은 형식과 내용으로 보아 최남선이 기획하고 서술했다고 판단된다. 책에 관한 광고문은 출판물의 특징, 용도, 예상독자층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통해 최남선이 『약사』와 『통사』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약사』에 관해서는 책의 특징이 “간략하고 상명(詳明)하고 규모 있고 체재(體裁)있는 편집”에 있으며, 책의 용도는 “지방 학림(學林)의 교과(敎科)에 충당하든지, 강호 문사의 박람(博覽)에 제공하든지, 역사 참고의 자료에 사용하든지, 불교 변천의 연구에 도움을 받든지, 내외 신사(信士)의 수양에 제공하든지”라고 해서 교재와 참고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아울러 예상 독자를 “조선불교의 쇠퇴를 한탄하던 사람, 조선불교사의 적막을 고민하던 사람, 조선불교의 내용을 탐지하고자 하던 사람, 조선불교사의 교과를 학습하고자 하던 사람”으로 설정했다. 반면 권상로는 『약사』에서 “각 사원, 지방 학림에서 교과서로 충용하기 위하여 약사로 편성”했다고 밝혀 이 책이 불교계에서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최남선은 『통사』의 특징에 관해 “사찰의 사적(事蹟)과 선사(禪師)의 행적과 역대 왕조의 숭봉하우(崇奉下遇)와 반도 문화의 간접 밀계(密係)를 모두 모아 수집한 장문(長文), 대문(大文)이요 완편(完編) 거편(巨編)”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예상 독자를 종교가, 문학가, 역사가, 불교의 재가(在家) 신자인 ‘단신가(檀信家)’로 설정했다. 이능화도 『통사』의 독자에 관해 “단지 조선인에게만 취미를 줄 뿐 아니라 일본인이나 외국인을 물론하고 역사가, 문학가로 조선에 대하여 연구하는 인사는 한번 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조선불교와 불교사에 관한 접근이 양자는 서로 달랐다. 이능화는 “책명은 비록 역사의 체(體)를 빌렸으나, 실은 포교의 용도를 겸하여 붙인 것”이라고 해서, 불교 학자의 입장에서 『통사』를 저술했다. 반면 최남선은 한말 시기 단군에 관한 연구를 위한 필요성에서 불교지식을 알아야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관점은 1920년대 ‘?’도(道)라고 불린 조선학 연구의 일환인 ‘고신도(古神道)’ 연구와 연결되었다.
출판이전의 책 광고와 실제 출판된 책을 비교해보면, 그 구성과 내용에서 동일하거나 차이가 나는 것이 존재한다. 『조선불교총보』의 광고와 『통사』의 내용은 상편이 불교시처(佛化時處), 중편이 삼보원류(三寶原流), 하편이 이백품제(二百品題)로 구성되어 서로 동일했다. 그러나 『약사』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출판된 『약사』의 경우 3편으로 각 편은 삼국불교, 고려불교, 조선불교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광고문을 구성한 최남선은 삼국시대를 ‘조선불교 수입시대’, 고려시대를 ‘조선불교 전성시대’, 조선시대를 ‘조선불교 쇠퇴시대’로 각각 표현했다. ‘수입, 전성, 쇠퇴’의 시기구분도 논의의 대상이지만, 조선불교가 ‘수입’되었다고 할 때 중국의 영향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조선불교가 ‘쇠퇴’했다고 할 때 조선시대의 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여부가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한편 3인의 학문적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은 서로의 연구 성과에 관한 평가이다. 이능화는 『통사』에서 권상로에 관해 “잡지를 편집하면서 우매한 이들을 계발하는데 쉬지 않고 힘썼으며 혁신적 논지를 게재하고 펼쳤다. 규범을 새롭게 개혁함에 있어서도 성실하고 근실하였다.”라고 보았다. 또한 최남선에 대해서는 “역사학에 뜻을 품고 을묘년(1905년―인용자) 봄 무렵 도쿄로 건너가 도서관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된 지 몇 년 동안, 오로지 조선과 일본의 옛날 문물을 교통한 흔적을 찾아 구하는 데 뜻을 두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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