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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미학

문학공간의 미학

김선기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8-08-10
  |  
17,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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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미학

책 정보

· 제목 : 문학공간의 미학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어문학계열 > 문학일반
· ISBN : 9788968495212
· 쪽수 : 288쪽

책 소개

지난 10여 년 간 각종 학술지와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중앙도서관, 한국문학관협회 주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 논문을 한 데 묶은 것이다. 남도 현대시문학의 태동과 변모양상, 그리고 1930년대 시문학파로 활약했던 김영랑과 박용철, 김현구 시의 문학공간을 탐색했다.

목차

책머리에 / 4

제1부 문학과 공간, 그리고 문화콘텐츠
남도 시문학의 문학사적 위상과 가치 / 11
영랑 김윤식과 1930년대 시문학파 / 33
김영랑의 시문학 공간 고찰 / 53
영랑의 삶과 작품에 나타난 앙가주망성 / 80
김현구 시의 공간성과 그 의미 / 103
용아 박용철 문학의 리소스와 문화콘텐츠 / 123

제2부 시대의 현실과 문학
김남주 시의 미학적 본질과 가치 / 135

제3부 문학관 운영과 문학자료 활용
국내 문학관의 콘텐츠 개발 방안 / 205
문학아카이브의 자료적 개념과 효용성 / 220
한국의 문학테마파크와 발전 전략 / 243

참고문헌 / 269
주 / 275

저자소개

김선기 (지은이)    정보 더보기
ㆍ1961년 전남 목포 출생 ㆍ목포 영흥고등학교 졸업 ㆍ전남대학교 국문학과 문학박사 ㆍ현재, 시문학파기념관 관장 주요 저서 ㆍ『시문학 공간과 문화콘텐츠』(전남대출판부, 2013) ㆍ『남도 현대 시문학의 산책』(전남대출판부, 2007) ㆍ『전라도 성터 이야기』(보림출판사, 2006) ㆍ『전라도 정자 기행』(보림출판사, 2003) 주요 논문 ㆍ「국내 문학관 콘텐츠 개발 방안 연구」(한국문학관협회, 2016) ㆍ「근대 문학 자료 보존과 문학관 운영」(서울대, 2014) ㆍ「문학 아카이브의 구축과 활용 방안」(국립중앙도서관, 2014) ㆍ「시문학 공간의 문화콘텐츠 연구」(전남대, 2012) ㆍ「김영랑 시문학 공간 연구」(전남대, 2011) ㆍ「김남주 시 연구」(전남대, 2006) 외 1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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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
남도 시문학의 문학사적 위상과 가치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지역 문학에 관련한 연구물을 살펴보면 동인지의 출간을 중심으로 연대기적인 변천과정만을 기술하였거나, 작품적 가치와 문학사적 가치를 별개로 다루는 접근방법은 미흡하였던 게 사실이다. 또한 용어의 개념도 현대문학의 제 특질을 바탕으로 한 가치개념 없이 시대개념의 연대기적인 성격으로 1910년대, 20년대, 30년대만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정리되었을 뿐이다.
특히 해방공간과 1950년대에 호남지역에서 발간된 『예술문화(藝術文化)』를 비롯한 『호남문화(湖南文化)』, 『청춘수첩』, 『젊은이』, 『신문학(新文學)』, 『갈매기』, 『시정신(詩精神)』 등에 관한 문학사적 가치에 대해서 언급한 글들은 좀체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문학사는 문학 작품사이고 민족의 정신사이기 때문에 지역에서 간행된 동인지들의 문학사적 가치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연구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방대한 문학사의 기술은 한 사람의 연구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 문학사에서 누락된 전남지역 문학사를 정리하고 평가하는 일은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메우는 데 귀중한 단초가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남도 현대 시문학의 변모 양상을 살피고, 한국 시문학사에서 남도 시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문학사적 위상과 그 가치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논문의 목적 실현을 위하여 개화기 이후 싹을 틔웠던 남도 현대 문학의 태동과 영광 조운으로부터 시작한 1920년대 지역 문학, 강진 출신 김영랑ㆍ김현구와 광산 출신 박용철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1930년대 『시문학』의 문학사적 성과 등을 통시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아울러 1940년대 해방공간과 1950년대로 이어져 온 남도 시문학의 변모 양상 등을 살펴서 남도 현대 시문학에 대한 문학사적 위상을 정립코자 한다.
예부터 남도를 ‘예향’으로 일컫고 있다. 이 지역이 ‘예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연풍토적 요인이나 문화적 요인도 있겠으나, 조선조까지 화려하게 꽃피웠던 문학예술의 전통이 오늘에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데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남도의 자생적인 문학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통시적으로 연계되어 맥을 잇고 있다.
우리의 시문학은 1920년대까지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등 몇몇 시인을 제외하고는 서구문학의 충격에 비틀거리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 전남 출신 김영랑(강진), 박용철(광산), 김현구(강진) 등의 시문학파가 등장함으로써 서구 문학의 충격과 자생적인 시문학의 내재적 전통이 융합되는 경향이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1930년대부터 남도의 시인들로 말미암아 한국 시문학은 다양성과 주체성으로 화려하게 만개되었던 것이다. 김영랑과 박용철, 김현구가 1920년대 감상적 낭만 시 경향과 프로문학을 반대하고 순수시 운동을 통해 보여준 시의 예술적 표상은 우리 시의 현대성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남도 시문학의 어제와 오늘을 탐색하고, 그 안에서 남도 현대 시문학이 갖는 문학사적 위상과 가치를 찾고자 하는 이 글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남도 현대 시문학의 변모 양상

■ 남도 현대 문학의 태동
우리 근대문학의 싹틔움은 개화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개화는 일제의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항구도시(목포, 군산, 부산, 인천 등)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서구의 선교사들에 의해 이북 지방(특히 평안도)이 일찍부터 개화되었다. 그러나 전남은 개화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때까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에 서구 문화의 충격도 그만큼 늦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근대 문학의 형성기에는 전남 출신 문인이 참여한 경우가 한 사람도 없게 된 것이다. 오히려 전통 판소리 문학이나 한시가 그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광산 출신 명창 임방울과 1932년 <목포시사(木浦詩社)>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전국 규모의 한시 백일장을 봄과 가을에 실시했던 무정 정만조, 이 무렵 여수 동정(洞亭)에 <종산시사>를 두고 전국 백일장을 개최하여 입선 작품들을 모아 『충민시단』 (1934.5.5.)을 펴낸 정문식 등의 활동이 이를 반증한다.
흔히 호남은 예로부터 문학예술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때의 노래 「방등산가」, 「무등산가」, 「선운산가」, 「지리산가」, 「정읍사」 등이 모두 이 지역의 노래이며, 조선시대 때의 윤선도는 「오우가」ㆍ「산중신곡」ㆍ「어부사시사」 등 시조문학의 텃밭을 일궜다. 그리고 전북 태인의 정극인은 가사문학의 틀을 세웠으며, 정철이 담양에 머물면서 쓴 「성산별곡」ㆍ「사미인곡」 등은 가사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또한 장흥의 백광홍은 「관서별곡」, 고창의 신재효는 판소리 정리로 각각의 조선시대의 국문학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특히 한말 당대 학자이자 시인이며 우국지사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광양 출신 매천 황현의 <절명 시> 4편은 오늘날 사회의식이 강한 참여시를 대변하는 효시가 됐다. 이러한 문학적 배경과 분위기 속에서 호남 문학은 전통적 연계성을 갖는다. 하지만 호남권 문학이 고전과 현대의 통시적 흐름 속에서 전통의 연계성을 논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의 현대적 연계성은 비록 일관성 있는 정신의 흐름의 가치를 가졌다손 치더라도 고전문학의 특질들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의 현대 문학까지 영향되었는가의 물음에 대해 법칙성과 함께 전통의 연계성을 실증으로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사의 맥을 조감해보면, 단가와 장가를 비롯하여 모든 장르의 문학적 뿌리가 호남권 문학을 통해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듯, 전통과 근원이 없는 지역문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이야 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가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는 자세라는 점에서 당위성을 갖는다. 따라서 전남의 현대문학사도 고전문학과의 연장선상에서 조명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도 현대시문학은 1922년 영광중학원 작문교사로 부임한 조운(曺雲, 1898~1956)으로부터 발아하기 시작한다. 조운은 문학서클 『자유예원(自由藝園)』을 조직하여 매주 두 차례 행사를 갖고, 이 때 장원한 작품을 뽑아 개벽사(開闢社)가 발행하는 여성잡지 『부인(婦人)』에 실릴 수 있도록 하였다. 1922년 교원으로 부임한 목포 출신 박화성이 이 잡지에서 세 번이나 장원하자 조운은 그의 작가적 소질을 발견하고 소설 쓰기를 권고하였다. 조운은 박화성이 쓴 「추석전야(秋夕前夜)」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내 『조선문단』 1월호에 추천ㆍ발표케 했다. 이로써 박화성은 전남 최초로 중앙문단에 진출한 소설가가 되었다.
이에 앞서 조운은 1921년 『조선문단(朝鮮文壇)』 2호에 「초승달이 재를 넘을 때」라는 시조 작품을 발표하면서 중앙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시조 작품은 『조운 시조집(曺雲 時調集)』에 73편과 『조선문단』 (1925.12.)에 발표한 「법성포 12경(法聖浦 12景)」 등이 전한다.
조운이 중심이 된 『자유예원』은 ‘전남문단의 새싹으로 발아된 기틀’을 만들었다. 그래서 박화성도 “내 문학의 온상이 영광(靈光)”에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자유예원』이 전남 현대 시문학의 태자리가 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시기에 목포에서는 1926년 요절했던 수산(水山) 김우진(金祐鎭, 1897~1926)에 의하여 시와 희곡이 선보여졌다. 김우진은 연극동우회를 조직하는 등 신극 발전에 힘쓰다 요절했지만, 시 40여 편과 희곡 5편을 남겼다. 그의 노력은 1930년 『호남평론(湖南評論)』으로 연결되었다.

■ 남도문학과 1930년대 시문학파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시문학파의 탄생은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순수 서정시의 우의를 다시 세운 역사적인 사건이다. 1930년 3월 5일 『시문학(詩文學)』 창간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문학적 지명도가 없었던 강진의 영랑 김윤식과 광산의 용아 박용철이었다. 실제적인 자금조달 역할은 용아가 했지만, 용아에게 글쓰기를 권하며 모든 문학적 방향을 구상한 사람은 영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내가 시문학을 하게 된 것은 영랑 때문이여”라고 말한 용아의 고백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동향인 영랑과 용아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같은 학교(청산학원)에 다니면서 서로 친해졌다. 영랑은 문학에 뜻을 둔 영문학도였고, 용아는 수학의 천재로 불리던 이학도였다. 그러한 용아를 영랑이 문학에 뜻을 두도록 집요하게 부추김으로써 용아는 결국 문학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듯 용아는 중도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만큼 시적 안목이나 창작 등 모든 면에서 영랑의 자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용아는 또한 처음엔 순수 문학보다 프로문학에 경도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1927년 9월 영랑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올 무렵 유점사에서 고성 삼일포에 이르는 동안 정치주의의 가부를 가지고 얼굴을 붉히며 싸운 적이 있고, 그 당시를 풍미하던 사조에 벗(박용철)도 사로잡혔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때 풍미하던 ‘사조’란 당시 유행하던 정치주의적 프로문학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시골에 틀어박혔던 용아가 영랑의 표현을 빌면 ‘훌륭한 시인’으로 변신한다. 영랑의 이 ‘훌륭한’이라는 표현은 용아가 순수시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깊어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아의 변화는 당연히 영랑의 자극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1928년 1월말부터 새롭게 시작한 문학공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새롭게 시작한 공부란 영랑의 자문을 받으며 시 창작에 몰두하는 것과 어학실력을 향상시켜 외국 시를 감상하고 변역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용아는 영랑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지난 번 時調의 評과 修正도 자네 意見을 따르네. 再現說과 情緖를 폭 삭후라는 것도 알어드렀네. 나는 이즘 와서야 그것들을 차츰 깨달아가네. 좀 늦지만 어쩔 수 없지. 느끼는 것이 없이 생각해 理解할랴니까. 그 前에는 詩(뿐만 아니라 아무 글이나) 짖는 奇巧(골씨)만 있으면 거저 지을 셈 잡었단 말이야. 그것을 이새 와서야 속이 덩어리가 있어야 나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내 깜냥에 큰 發見이나 한 듯 可笑

이는 영랑이 당시 민족문학파인 절충파의 소박한 문학관을 견지하고 있던 용아에게 낭만주의적 순수시에 대해 자문을 했던 것을 용아가 새로운 공부를 통해 이를 뒤늦게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주저 없이 영랑에게 털어놓은 편지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면, ‘생각’과 ‘기교’는 절충파의 내용과 형식 논쟁을 의미하는 것이며, ‘정서를 폭 삭후라는 것’과 ‘속에 덩어리가 있어야 나오는 것’은 낭만주의적 순수시론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용아는 지금까지 견지했던 자신의 문학관을 반성하고 나서야 영랑과의 의견 조율이 가능해지고, 영랑은 그때서야 비로소 용아에게 동인회 구성 및 동인지 발간계획을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문학파의 모든 문학적 방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영랑의 머릿속에서 정해져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영랑이 『시문학』을 통해서 시단에 처음 등장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문학』은 영랑과 박용철과의 교유에서 태동한 것임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에서 알 수 있다.

梁柱東君의 文藝公論을 平壤서 發刊한다고 말하면 이에 妨害가 될 듯 싶네 그러나 通俗 爲主일게고 敎授 品位를 發揮할 모양인가 보니 길이 다르이 何如間 芝溶 樹州 中 得其一이면 始作하지 劉玄德이 伏龍 鳳추에 得其一이면 天下可定이라더니 나는 芝溶이가 더 좋으이. 文藝公論과 特別한 關係나 맺지 않었는지 몰르지 서울거름은 해보아야알지.… (중략) …지명 丹弓(丹을 赤과 같이 볼 사람도 있는가) 丹鳥ㆍ玄燈(너무 신비적)ㆍ시령 우리말 단어가 좋은 게 있으면 제일 좋겠는데….

위의 인용문은 박용철이 1929년 3월 26일 강진에 있는 김영랑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여기에서 용아는 『시문학』지의 창간 멤버를 자신과 영랑을 포함한 지용까지 세 사람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양주동의 『文藝公論』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은 절충파와 시문학파의 문학적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용ㆍ수주 중 득 기일’에서 수주의 순수시관 즉 이데올로기문학에 대한 반성의 의지와 지용의 시와 같은 새로운 시에 대한 욕구가 박용철의 심저에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잡지의 이름을 ‘丹弓ㆍ丹鳥ㆍ玄燈’을 생각한 것은 한국의 전통적 순수시관 즉 도교적 자연관이 그의 심저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말해주며, 이것은 전통 지향성과 모더니티 지향성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한 새로운 문학의 성취 욕구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丹을 赤과 같이 볼 사람도 있는가’에서는 용아의 카프파에 대한 염려를 읽어낼 수 있으며, ‘우리말 단어가 좋은 게 있었으면…’에서는 그의 국어에 대한 자각이 나타난다.
이 시기에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활동했던 시문학파로는 강진 출신의 김현구(1903~1950)가 있다. 김영랑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한 김현구는 김영랑과 박용철이 주관하는 『시문학』 2호에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럿습니다」, 「물 위에 뜬 갈매기」, 「거룩한 봄과 슬픈 봄」, 「적멸(寂滅)」 등 4편을 발표하고, 그 뒤 『文藝月刊』과 『文學』지를 통해 1934년 4월까지 8편의 시를 더 발표하였다. 그 후 낙향하여 계속 시를 썼으며, 그것을 묶어 『無常』이라는 제목의 시집 발간을 준비했으나 6ㆍ25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좌절되었다.
1970년에 유가족 등에 의해 『玄鳩詩集)』(유고 70편, 발표작 12편 등 82편 수록)이 비매품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이 시집을 계기로 김용직, 김학동 등에 의해 연구논문이 발표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구는 대표적인 간판 시는 없으나, 또한 졸작도 없이 모두 일정한 수준의 작품을 남겼다. 시문학파에서 특히 영랑 시의 높은 음악성이 평가되나 현구의 시어(詩語)는 그보다 폭이 넓고 유연하며 감각이 섬세하다”고 평가하였다.
시문학파가 중앙문단에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 전남에서는 일찍부터 개화가 진행되고 있는 목포에서 『호남평론(湖南評論)』을 중심으로 시문학의 기반을 닦았다.
『호남평론』은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이 사장이고, 배치문(裵致文)이 주간이었으며, 여기에 참가한 동인은 이덕, 정철, 나천수, 박동화, 김일로, 이영해, 심인섭, 그리고 「목포의 눈물」을 작사한 문일석 등이었다. 『호남평론』의 편집실은 목포 문단의 구심체였고, 박화성의 단편 「궁굿날」도 1938년 여기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호남평론』 동인들은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방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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