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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개정판)

홍덕기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8-12-20
  |  
16,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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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책 정보

· 제목 :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개정판)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인문학 일반
· ISBN : 9788968495922
· 쪽수 : 284쪽

책 소개

저자는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은, 거시적으로 보아 그 근원을 중국의 정전제(井田制)에 두고 있으며 철학적으로는 그 근원을 중국의 유교사상에 두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목차

개정판 머리말 / 5
머리말 / 7

제1장 서론 / 13
제1절 문제의 제기 / 14
제2절 연구의 방법과 구성 / 20
제2장 선행연구의 검토 / 25
제3장 중국의 토지개혁사상 / 37
제1절 중국의 유교사상과 토지개혁사상 / 38
제2절 중국의 토지개혁사상 / 51
제4장 우리나라의 토지개혁사상 / 87
제1절 실학파 이전의 토지개혁사상 / 88
제2절 다산 이전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 / 100
제5장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 141
제1절 다산의 토지개혁사상과 유교사상 / 142
제2절 다산의 토지개혁사상의 추이 / 159
제3절 다산의 여전론 / 168
제6장 요약 및 결론 / 251

참고문헌 / 262
찾아보기 / 277

저자소개

홍덕기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5년부터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듀크대학교 경제학부 방문교수(2001-2003)를 역임했다. 오랫동안 학생참여형교육에 관심을 갖고 교내외에서 교수들을 대상으로 교수법 특강을 해왔으며, 전남대학교 교육(최)우수교수로 선정(2006, 2010, 2015, 2017)된 바 있다. 저서와 논문으로는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2001년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한국경제의 이해』(공저), 『대학 교양교육에 대한 분과학문의 성찰』(공저), 「정유 박제가의 경제사상」, 「리카도의 가치론에 관한 연구」, 「공리주의적 후생개념과 후생경제학」,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신고전학파 경제학」 등 다수가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제1장 서론

제1절 문제의 제기

토지는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 온 대표적인 천혜의 자원으로서 인간 생존 자체에 불가결한 절대적 존재이다. 또한 토지는 고래로 가장 중요한 보편적 생산수단이며 노동과 더불어 인간의 근원적 생산수단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과 토지와의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업생산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전근대사회에서 토지는 기본적 생산수단으로서 근대사회의 상품과 대비되는 부(富)의 포괄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토지는 단순히 객관적인 천여의 노동장소일 뿐만 아니라 노동수단의 일대 창고요, 무기고요, 거주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근대뿐 아니라 근대에도 토지는 생산의 주요 기본요소일 뿐만 아니라 자칫 배분이 잘못되면 사회 불평등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집착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발전과정을 소유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공유(共有) 속에서 사유(私有)가 싹터 점점 공유(共有)를 침식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구성 중 가장 먼저 나타난 원시공동체에서는 생산력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집단성, 공동소유, 공동분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따라서 토지는 공동체적 토지소유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원시공동체 안에서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여전히 토지의 공동점취가 토대를 이루면서,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서 사적점취가 단서적으로 발생하고 노동용구의 사적점취라는 이원성이 싹터 자라면서 마침내 원시공동체는 붕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시공동체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새로운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유(共有)와 사유(私有)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토지의 사적 점취도의 진전 등에 따라 아시아적 형태, 고전 고대적 형태, 게르만적 형태라는 단계적 발전을 거치며 마침내 공동체가 분해되고 사유의 전면적 확대가 이루어진 자본주의가 도래한다.
역사적으로 봉건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공권적 질서에 의거하는 영주적 또는 국가적 토지소유권이 약화되어 가는 반면에, 토지경작권의 사유화가 강화되면서 근대적인 사적소유의 확립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시기는 근대적 요소의 발전에 따르는 봉건사회의 몰락기와 더불어서 이며, 대체로 서구의 시민혁명을 거쳐 산업혁명기에 이르러서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토지사유권의 법제도가 확립되고 그로 인해 지나칠 정도로 사유권의 강조 내지는 일반화로 인하여 그 역기능적인 측면, 즉 현대사회에서 보는 바와 같은 많은 토지 문제를 발생시키기에 이른다.
한국에서도 토지문제는 전 역사과정을 보더라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적 토지소유제를 왕조지배체제 유지, 존속의 기반으로 한 고려와 조선시대는 국가적 토지소유제와 사전화(私田化)의 갈등의 반복이었고, 개항이후는 소작제와 경자유전의 농민적 토지소유제의 혼란이 거듭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흔히 조선후기 사회를 삼정(三政)의 문란과 계급 차에 따른 빈부의 극심한 갈등으로 변혁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사회로 설명한다. 다산은 조선사람 중 2할 밖에 안 되는 소수가 전 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했다는 것이 갈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그 소수를 약간 넘는 수가 전 국토를 차지하고 있다. 2백 년 전 다산이 간파한 사회적 모순, 즉 빈부의 격차 및 토지소유자의 심한 편재현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시공의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제(閭田制)를 오늘날의 경제ㆍ사회적 시각에서 재해석한다면 이를 통해 한국의 토지문제를 통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다산 정약용의 여전론을 살펴보려는 현대적 의의가 있다.
물론 이 연구에서는 한국의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직접적 방안으로 여전제를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파악하고 현실을 개조하기 위한 실천적 관심에서 비롯한 연구작업은 차후로 미루고 이 책에서는 학문적 관심, 즉 객관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여전론에 표징되는 다산의 토지개혁사상에 표적을 맞추고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역대의 토지제도는 주대(周代)의 정전제(井田制)의 부활을 그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다. 정전제란 고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대에 시행되었다고 전해지는 토지제도로서 후세 유가(儒家)의 이상이었다. 이 제도는 언제고 부패한 사회의 혁신과 병행하여 전제의 개혁론이 대두될 때마다 위정자들 간에 논의된 바 있었으나 그 시행의 난점 때문에 논의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정전제의 실재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으나 실재 여부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유가고전에 나타나 있는 국가적 토지소유(公田制)의 이념이다. 즉 국가적 토지소유의 원칙에 의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 분배한다고 하는 사상이 그 후 중국의 지배계층에게 계승되어 호족의 토지집중을 방지하고 농민을 국가권력의 장악 하에 확보하려는, 현실의 정책적 요구를 정당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토지소유의 이념이 중국의 역사과정에서 실제로 현실적인 토지제도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것이 이른바 북위(北魏)~수당(隋唐)의 균전제(均田制)이다. 균전제 역시 중국 역대의 토지제도에서처럼 주대의 정전제의 부활을 의도한 것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균전제도는 우리나라와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는데, 한국 역사상의 토지제도는 이 중국제도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후기에 들어 가장 줄기차게 토지개혁을 주장한 실학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토지겸병의 반대와 정전제에서 영향을 받은 토지개혁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토지겸병을 지양하는 토지개혁의 모델을 일차적으로 정전제에서 찾으려 하였고, 정전제의 본질을 살리는 방향에서 개혁의 지표를 설정했다. 이렇게 볼 때 정전제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간주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의 실학파들의 토지개혁사상이 그 근원을 중국의 토지개혁사상 특히 중국의 정전제(井田制)에 두고 있으며, 철학적으로는 그 근원을 유교사상(儒敎思想)에 두고 있다는 인식하에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실학연구는 성리학자들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를 옹호하는 중세사회의 생산관계로 규정하고, 실학 사상가들의 균전론(均田論), 한전론(限田論)은 지주전호제를 부정한다고 파악하고 따라서 실학사상은 농민의 이해를 대변한 사상이요, 또한 근대지향적인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필자는 균전ㆍ한전사상 등은 역사적으로 대토지소유자에 의한 토지겸병이 심하게 진행됨으로써 농민들이 영락하게 됨에 따라,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되던 시기에 봉건사회의 모순을 수습해 보려는 통치자들과 그 대변가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는 점을 중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균전론ㆍ한전론이 심각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은 16세기를 전후한 시기-특히 임진왜란 후였다. 또한 이 개혁론이 비단 실학사상가들뿐만 아니라 집권계급 내부에서도 논의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균전론이나 한전론이 실학파사상가에 국한되지 않고 봉건정부에서도 논의된 봉건적 토지정비론의 성격이 강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균전론ㆍ한전론은 농민을 위한 측면보다는 봉건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봉건통치의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다산을 포함한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사상은 봉건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다만 부분적 개량으로써 봉건국가의 장구한 이익을 옹호하는 견지에 서려 했음을 구명하는 것을 이 연구의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제2절 연구의 방법과 구성

1. 연구의 방법
다산은 흔히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집대성이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조선후기 실학의 여러 유파들, 즉 경세치용이니 이용후생이니 실사구시니 하는 여러 유파의 사상을 통합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수성지학(修省之學)에 치중한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 수성지학(修省之學)=수기지학 (修己之學)을 근본으로 삼아 경국제세(經國濟世=치인(治人)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유학(儒學)의 근본이념을 재천명한 데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조선조 후기에 당시 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다산이 제시한 경제적인 모든 개혁사상은 그의 육경사서(六經四書)의 경학을 발판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산 사상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경학적(經學的) 측면의 접근으로, 이는 전통적인 유학사상에 기초하여 다산의 실학이 지니는 성격과 그 위치를 해명하는 것이다. 다음은 경세적(經世的) 측면의 접근방법으로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사적 조건과 계급적 성격을 아울러 살펴야 할 것이다.
다산의 토지개혁사상에 대한 직접, 간접의 연구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그러나 다산 토지개혁사상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지나치게 경세적 측면의 접근에만 치우쳐 있고 경학적 측면은 경시되어 왔다. 또한 연구의 세분화 및 연구영역의 확대가 지나침으로 해서 그의 토지개혁사상을 전체사와 연관시켜 거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온 것도 사실이다.
다산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면서 하나의 인격을 전인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다산은 유배된 18년 동안에 이루어진 자기의 저술에 관해 자서전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육경사서(六經四書)로는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는 천하국가를 위하게 한 것이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게 되었다. ” 다산은 당시에 주자학자, 혹은 성리학자들이 관념론적인 공리공론에 빠져서 인생의 진솔한 문제를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경세학에 치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부 학자들이 너무 수기지학(修己之學)에 치중했기 때문에 그는 경세학에 치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산 자신은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저술하고 여전론과 같은 독특한 토지개혁론을 창안ㆍ제창한 것이다.
필자는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거시적으로 보아 그 근원을 중국의 정전제(井田制)에 두고 있으며 철학적으로는 그 근원을 중국의 유교사상(儒敎思想)에 두고 있다고 인식한다. 즉,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사상은 궁극적으로는 정전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유가고전에 나타나 있는 국가적 토지소유의 이념인 것으로 본다.
이을호는 다산으로 대표되는 실학사상이 송대 정주학(程朱學)을 극복하고 원시유교(洙泗學)를 지향했다고 주장한다. 즉, 다산 유학의 철학적 근거는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이 아닌 선진(先秦)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수사학적 맹자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을호의 유학론은 시공의 조건 하에서도 불변하는 본질로서의 수사학적 원시유학을 강조하는 철학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산의 토지개혁사상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유교사상 특히 고대의 원시유교사상을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원시유교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했으며, 특히 인정(仁政)ㆍ덕치(德治)사상은 봉건사회의 통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송대에 나타나는 주자학은 원시유교에 비해서 어떤 점이 변질되었는가. 주자학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산이 어떻게 원시유교에 회귀했는가 등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다산의 토지개혁사상 연구에 종래 흔히 사용되어 오던 경세위주의 측면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시각을 지양하고, 그의 경학을 기초로 한 사상적 구조의 파악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적 측면에 관한 고찰도 동시에 수행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기존 제문헌의 분석과 기타 2차 자료의 분석을 병행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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