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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잡지 > 교양/문예/인문 > 문예지
· ISBN : 9788994856346
· 쪽수 : 139쪽
· 출판일 : 2013-07-18
목차
-보이는 불법
-안 보이는 불법
-비판하는 불법
저자소개
책속에서

최세은, 제목 없음, 서울 지하철 4호선, 2004
충무로에 가는 길이거나 돌아오는 길이었다. 왜 4호선을 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4호선에서 찍은 것은 확실하다. 이 남자가 피곤했던 것인지 울고 싶었던 것인지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당시 내가 느끼기에 긍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다. 남자가 눈을 가리는 순간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 이미지가 담긴 광고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 시선이 움직인 경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그 순간 카메라를 들어서 초점과 노출을 대충 맞추고 셔터를 눌렀다. 남자가 눈을 가린 손을 다시 내려놓기 전에 이 장면을 찍었다는 것이 내게 만족감을 주었다. 남자는 자신이 사진 찍힌 줄 몰랐다. 아직도 모른다.
- 최세은, <몰래 찍은 사진, 몰래 찍은 사람> 중
『잊히겠죠 곧 잊겠죠』는 용산 개발사업에 관한 그림책이다.
종종 지나가던 한강로 주변의 가게들이 어느 날 순식간에 없어진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그곳엔 으리으리
하고 번쩍이는 것들로 채워질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문득 ‘나중 세대는 번듯해진 그 공간이 처음부터 그런 곳
인 줄로만 알겠지? 여기에 있던 추억과 아픔은 모르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용산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책을 만들게
되었다. ‘개발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면 어떤 식의 개발이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본다.
"기르던 화초의 화분 갈이를 하더라도, 미리 화분을 준비해 놓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있던 흙도 같이 덮어 주는데……."
-박린, <잊히겠죠, 곧 잊겠죠> 중에서
찌질해?
너를 만난 덕분에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저열한 위안일까
하지만 그만큼 내 감정이 휘몰아칠 수 있게 해준 건 너뿐이었으니까
위안보다 비겁하게 감사함이라고 둘러댈게.
곱게 포장해서 둘러대는 것이 나의 직업이라 기억뿐인 모습으로 그려둔 데에 너무 역겨워하진 마.
그 기억만큼은 진심이었던 증거니까.
응. 맞아.
지랄하는 거야 지금
이 시대의 슬로건
Please! Somebody, love me!
이 시대의 구조요청
Somebody loves me, please.
- 김홍준, <누구나 쓰는, 누구도 보지 않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중에서
2009년 1월, 내 기억 속에 ‘용산 참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매일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정도로 알게 되었겠지만,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던 거구나 정도로 넘어갔겠지. 그런 내게도 ‘강호순’이라는 연쇄살인범의 이름은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청와대가 용산 참사 여론을 누르기 위해 연쇄살인 사건을 이용하라고 이메일을 발송한건, 치졸한 짓이지만 제법 적절한 방법 같기도 하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다른 곳에서 ‘용산’이란 단어를 가끔 접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러다가 김연수의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이 소설은 ‘용산 참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룬 내용은 아니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용산 참사’라고 밝히고 있듯이, 소설 속에 숨진 철거민의 아들이 쓴 편지가 나오기도 한다)를 읽다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다.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번 나와 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그때는이미 서른을 넘긴 이후였는데도 어린애처럼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긴 이런 편지를 읽으면서 내 마음이 평온할 수만은 없었겠지.
- 김화영, 문(問) 혹은 문(門)에 관한 문(文) -영화 ‘두 개의 문’ 중에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것이 거짓말로만 작동하게끔 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20세기 초에 비트겐슈타인 또한 이러한 문제에 마주쳤다. 그가 당시에 구상한 방법은 편향되지 않은, 참말로만 구성된 언어를 만들어 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후기로 넘어오면서 원래의 기획을 포기했다는 것은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면 언어의 통시성과 환원성에서 결코 벗어날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타인과 100퍼센트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말이 상황을 서술하거나 규정짓는 데 부족함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는 것이다.
- 이정민, <거짓말의 윤리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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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하나의 도박으로 이해해 보자. 저 위의 만화 주인공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보자.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룰과 판세에 놓였다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지금 대를 잇는 도박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처음부터 판돈을 당신의 백배 천배에서 시작하고 있으면 당신이 이길 확률을, 아니 오링(all-in의 일본식 발음, 돈을 모두 잃음)되지 않을 확률이 얼만지 계산을 해야 한다. 무서운 것은 적당한 품성론적 인식으로 돈이 권력이고 힘이라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경우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영역은 좁아지고 있으며 돈으로만 살 수 있는 영역은 넓어지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품성을 논하는 것은 상냥한 자살 권유 이상 이하도 아니다. 탈세나 조세정책 변경에 대한 관대함을 보라. 기본적으로 우리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 누가 손해 보는 만큼 이득을 본다. 저 새끼가 돈을 덜 내면 내가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도박은 일종의 승부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현실을 봤을 때 이 점을 잊는, 혹은 무시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자본주의는 친선게임이 아니다. 바로 눈앞에 마주한 상대가 존재한다. 지금껏 소개한 만화들의 공통점은 도박에서 이기기 위해 운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또 따위의 요행처럼 말이다. 룰의 틈을 찾아내거나 바꾸거나 그 이상의 무엇을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이 실천을 이루어내기 위해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정의 이름이 아닌 계약의 이름으로 말이다.
- 홍석인, <만화도박필승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