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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여행 > 프랑스여행 > 프랑스여행 에세이
· ISBN : 9788995609101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1-02-28
책 소개
책속에서
공짜 술을 즐겁게 얻어먹은 이후 우리는 따바라고 불리는 파리의 선술집 렝스탄트 프헤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얼굴을 내밀었다. 당당하게 먼저 인사를 하고 만날 때마다 반가이 말을 건네자, 처음엔 우리를 관광객으로 알았던 주인아저씨와 단골손님들도 인사를 건네거나 하루 일과를 물어봐 주었다. 어쩌다 귀갓길에 스케치북을 들고 들르기라도 하면, 그들은 우리를 ‘예술가(Les artistes)’라 부르며 맥주를 사주기도 했다. 우리는 따바에서 미술 학도로 꽤 유명했다. 단골손님들은 우리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을 보기만 하면 예술가들이 온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가끔 우리의 스케치북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우리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날아온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적어도 따바에서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예술가였다.
3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봄빛이 찬란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불법 체류라는 말 자체가 워낙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우리가 마치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 불법 체류자란 딱지를 얻기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일깨워준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을 이곳에서 펼치겠다는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기 나라에서 억압받았던 수많은 사람이 프랑스로 망명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뭐 대단한 양심수나 민주 투사는 아니지만 자유에의 꿈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 이름난 망명자와 우리의 상황이 기본 맥락은 같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몰라줄 뿐이지 우리도 박애와 자유를 꿈꾸는 청년 예술가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망명을 신청한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조용히 지내다 갈 것이 분명했기에, 우리는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라도 파리에 머물기로 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이 상황을 즐기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숙제였다.
그러나 Lee의 몸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약은 말을 듣지 않았고, 다른 약을 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주말이라 모든 약국은 감옥의 철창처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우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으나, 불법 체류자 신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젖은 수건을 Lee의 이마에 얹어주며 열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이때 처음으로 법으로, 아니 그 무엇으로도 보호받을 수 없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만약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를 보호해줄 어떤 법이나 제도도 파리엔 없었다. 그때 Lee가 힘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영화 한 편 보면 좋아질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