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무협소설 > 한국 무협소설
· ISBN : 9791104905674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15-12-24
책 소개
목차
제1장 백가(白家)의 백문현(白文賢)
제2장 숭산
제3장 추격
제4장 몰락
제5장 죽음보다 슬픈 일
제6장 사법
제7장 단진천
제8장 가족
제9장 이긴다는 것
제10장 귀향(歸鄕), 혹은 타향(他鄕)
저자소개
책속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 내뿜는 사기가 쉴 새 없이 빨려들어 왔고, 그들이 내뿜고 있는 원망과 절망이 사기에 섞여들었다.
사기는 그 몸집이 점점 커져갔다. 이제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기운이 되어 의룡전의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모두가 죽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죽어 그에게 악귀의 육체를 부여해 줄 것이다. 사기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악귀로 재탄생되는 순간을 말이다.
‘갈!’
사기가 일순간 흔들렸다. 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백문현의 혼탁한 정신을 일깨웠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사악한 사기는 끊임없이 그를 나락으로 이끌었다. 혼이 깨져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를 유혹했다.
백문현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면서도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스승님…….’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하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스승이 저렇게 가부좌를 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리 없었다.
현문 대사는 엄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호통치고 있었다. 백문현에게는 현문 대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느낄 수 있었다.
‘악귀가 되어서라도 복수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백문현은 현문 대사를 향해 외쳤다.
‘스승님의 죽음, 희연이의 죽음, 그것을 모두 잊으란 말씀이십니까!’
현문 대사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은 백문현이 무의 자질이 없음을 알고 좌절했을 때, 자신을 하찮다고 여기며 소홀히 다루었을 때의 표정이다. 그 꾸짖음을 문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현문 대사가 그랬다.
‘우리가 천하다고 여기는 미물도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주의 끝없음과 자연의 광활함처럼 인간은 스스로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현아, 자신을 잊고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제받을 수 없는 대죄이다.’
‘스승님…….’
‘죄를 짓는 건 사람과 사람이다. 그것은 타인이 용서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하나 자신에게 죄를 짓는다면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겠느냐. 그렇기에 너는 당당해야 한다. 스스로가 못났음을 용서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무엇이든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어떤 일이든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할 수 있다. 현문 대사는 문현에게 그것을 늘 일러주었다. 그것이 작은 일이든 대업이든 복수든 상관없었다. 자신을 바로 세워야 올바르게 일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거라. 불경을 읽어 행한다는 것은 결코 위대한 일이 아니다. 타인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현문 대사가 일러준 구결이 점차 생각나기 시작했다. 현문 대사는 일반적인 말에 소림의 현묘함을 섞었다. 그렇기에 문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현문 대사가 알고 있는 무학의 깨달음은 자질이 떨어져 육체의 구속을 받는 문현이 결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문현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대승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은 자신을 관조하는 법을 가르친다.’
‘백보신권(百步神拳)은 부동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아야 그 끝을 볼 수 있다. 백 보 밖의 유혹을 능히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은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현문 대사는 소림의 눈을 피해 문현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다.
문현이 어릴 적에 건넨 사소한 말부터 시작하여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그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문 대사는 문현의 추억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은 것이다.
문현은 현문 대사를 스승이라 불렀지만 소림은 그를 인정하지 않아 소림의 절기를 결코 가르칠 수 없었다.
문현을 끔찍이 아끼던 현문 대사는 스스로 업을 짊어지고 소림의 법도를 어겼다.
‘스승님…….’
문현은 그것을 깨닫게 되자 복수심 대신 슬픔이 밀려왔다. 그의 혼 주위에 넘실거리던 사기는 상황이 불리해짐을 깨닫고 점차 뭉쳐 작은 구슬이 되어 문현의 혼에 박혀들었다. 문현의 혼에서 현기가 떠오르자 정화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문현의 혼에 봉인한 것이다.
문현의 정신이 맑아지자 문현은 사법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문 대사의 말과 상충되며 그를 점차 성숙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죽은 것이로구나. 비술은 실패로군.’
악귀가 되지 못했다. 문현이 스스로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사라질 테지만 문현을 버티게 한 것은 남아 있는 복수심이었다.
‘저는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연관된 모든 자들을 처절하게 죽이는 그날까지…….’
현문 대사는 그런 문현을 보며 고개를 두 번 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흔들었다.
문현은 그것을 보자마자 의식이 흐려졌다. 무언가 자신을 잡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스르륵!
문현의 혼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신음을 흘리고 있는 환자들 사이를 지나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미청년에게까지 이르렀다. 약관이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티를 막 벗은 청년이다.
혼이 이미 떠나고 없다. 이제 곧 그 목숨이 다할 것이다. 문현의 혼은 빈자리를 찾아가듯 그렇게 청년의 코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르르!
청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열려 있는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스, 스승님, 희… 연아.”
너무나 건조해서 칼칼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축 늘어지며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1권 본문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