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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2010120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22-06-29
목차
책을 내면서 ·· 4
제1부 · 고갱이
길목에서 ·· 15
보통 사람 ·· 19
참나무 육 형제 ·· 23
당달봉사 ·· 28
망추선령 ·· 33
잠버릇 ·· 38
지워지지 않는 삽화揷話 ·· 43
책 왕복 읽기 ·· 48
교체 ·· 53
고갱이 ·· 57
제2부 · 말
국친 ·· 65
봄비는 내리는데 ·· 70
살다가 만나는 사람들 ·· 75
말 ·· 80
인향 ·· 85
영정 사진 ·· 89
주눅 ·· 93
알천 ·· 98
무풍한송길 ·· 103
물꼬 ·· 108
제3부 · 낙동강이 여위어 간다
냄새 ·· 115
나보다 키 큰 책들 ·· 120
야슥야슥 ·· 125
떠나간 친구는 어디서 머물까 ·· 131
낙동강이 여위어 간다 ·· 135
어머니로 태어나다 ·· 140
이웃 일촌 ·· 145
유산 ·· 150
터 ·· 154
평등공원 ·· 160
제4부 · 며칠 없어지기
며칠 없어지기 ·· 167
훼방, 해방 ·· 172
풍경 ·· 176
틈새 ·· 181
왔다리 갔다리 ·· 186
만보객漫步客 ·· 191
내 마음의 다리 ·· 196
포비아 ·· 201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 206
녹색 용암 ·· 211
제5부 · 조용한 분노
허름한 곳의 편안함 ·· 217
그대로 남아있는 시간 ·· 222
빈방 ·· 227
그네를 밀어줄 사람이… ·· 232
가을이 떨어지다 ·· 237
기억의 복원 ·· 241
기억의 복원 2 ·· 246
피사체는 말한다 ·· 252
덮어 입는 옷 ·· 257
조용한 분노 ·· 262
에필로그 ·· 268
저자소개
책속에서
조용한 분노
“자! 나이들 까여” 듣기 난처했지만 “그것도 개인의 작은 비밀인데 그냥 넘어갑시다.”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않고 빨리 까라고 닦달을 한다. 열흘간 함께할 일행들과 미팅해보니 우산 없이 먹구름 밑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인사 당기는 어려운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의 행사를 거침없이 해댄다. 그야말로 개똥 자루에 개똥이다.
60대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다. 남편은 얼굴이 좀 검은 편에 멕시코의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 비슷한 모자를 썼다. 여자는 나이에 지나친 레깅스를 입었다. 딴에는 수학여행 가는 초등생처럼 튀고 싶어서 맘먹고 차린다고 애를 썼는데 내가 보기에는 민망스러워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뇌리의 다른 영역에서는 그 정도야 괜찮지 않으냐는 다독임의 제안을 했지만, 기분은 전환되지 않았다.
명절 TV 뉴스에 탑승 대기자들이 공항 벤치에 가방을 베고 누워 비행기 기다리는 장면을 보며 '나는 언제 저렇게 지루한 고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부러워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번 여행이 일곱 번째다. 나라로 치면 16개국이다. 이번엔 미국 동부와 캐나다다. 기간은 9박 11일에 탑승 시간 편도 14시간 20분이나 된다. 지금까지 다녀온 중에 최장 거리다. 사실 패키지여행은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여행이라는 용어를 쓰기에는 뭔가 좀 모자라는 기분이 들지만 남 하는 대로 그렇게 부른다. 단체관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여행이란 출발한다는 자체가 흥분되지만 반대로 기내의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루함을 해결키 위해 고골리 작품집과 애서광이야기 2권을 준비했다. 영화 한두 편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행 신청을 해 놓고 나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함께 움직일 일행들에 관해서다. 성별, 인성, 지적 수준, 취향, 지역 등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여럿이 오는 계군들이다. 속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나와 비슷한 연령대가 많았으면 하는 기대감이다. 아무래도 살아온 시대가 비슷하면 동질감이 있어 바쁜 일정 속에서 공감대 한 가지만으로도 피로를 줄일 수 있다는 경험에서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세 가지를 꼽는다고 한다. 날씨, 일행, 그리고 가이드라고 했다. 지금까지 그 방면에 별문제 없었기에 낯선 땅에 대한 궁금증을 나대로 그려보면서 A380 기종에 몸을 실었다. 이 기종은 '하늘의 호텔'이라는 2층짜리 비행기다. 1층 310명, 2층 94석의 대형 비행기다.
제발, 이 이상의 불행한 진도는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여자는 조용한 작은 기대를 가차 없이 짓뭉개기 시작했다. 지방 특유의 질퍽한 사투리로 식당, 로비, 휴게소, 차 안, 심지어는 화장실에서까지 큰 소리로 떠들며 숨김없이 참모습을 보여 주었다. 마치 여행 초창기의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코리언'으로 되돌아간 상황이었다. 창피해 다른 나라 사람들 보기에 민망했다. 떠들고 희희낙락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 인양 착각을 하고 날뛰니 말릴 재간이 없었다. 말은 하지 못하고 속앓이할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에 먹구름이 끼어 사라지지 않는 두 단어는 '진상'과 '중뿔나다'였다. 그야말로 키치의 수준을 넘고 있었다.
여행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 가끔 통화도 하고 술도 같이하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그것은 유예된 꿈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50대 초반의 계군 아주머니 5명이 언니! 언니! 하면서 썰썰 긁어 주니까 오만방자의 뾰족탑에서 춤을 춘다. 그믐밤에 홍두깨 내밀 듯 불쑥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가당치도 않은 박장대소다. 기가 약한 나로서는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밥 먹을 때도 혹시 같은 식탁에 앉게 될까 봐 눈치를 보며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건 피해서는 안 돼' '행동을 취하느냐, 마느냐' 햄릿의 갈등 속에 신경은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워졌다. 매연 같은 존재에 허풍쟁이 개처럼 짖어대는 꼴은 여행의 피로를 계속 높이고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을 통과할 때 편도 7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이번 여행은 평균 매일 4시간 정도를 버스로 이동하는 셈이다. 56인승 버스라 좌석은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커플은 뷰의 포인트 좌석인 가이드 뒷좌석을 고집하고 5인조 계군은 앞줄에 두 자리를 혼자서 차지하겠다고 말썽을 피운다. 지금까지 여행 중 최악을 연출하고 있었다. 인천에서 뉴욕 JFK(존 에프 케네디)공항까지 장장 6,870마일(11,000㎞)을 날아온 억울함에 잠들 수가 없었다. 말로서 제압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하도 기분이 우울해서 저녁에 조 여사와 퀘벡의 5성급 럭셔리 호텔 '페어몬트 샤토 프롱트낙'(영화 '도깨비' 촬영지이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칠과 루즈벨트 회담 장소)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손녀 기덩이와 새아기와 우리들의 길마까지 짊어진 아들을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우리가 명계冥界에 가고 난 후 인연이 닿으면 여기 이 자리에서 흐르는 검은 강물을 보며 '어쩌면 우리 이야기를 지나는 바람처럼 할지도 모른다.'라는 나의 방백傍白과 조 여사의 독백은 멀고 먼 타국의 어둠을 싣고 흐르는 세인트루이스 강에 둘의 눈물을 섞었다.
희한한 일이라는 것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일까. 너무 안온하다. 풍경의 뒤편에 숨어 있는 작은 점까지 보이는 기분이다. 하루를 가뿐하게 보냈다. 상처가 계속 쿡쿡 쑤시다가 한번 식 멈추는 것처럼.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숨 쉴 구멍은 틔워 주는가 보다. 비록 하루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캐나다의 단풍을 향해 환희의 고함치고 싶다. 사색과 이국 풍경이 매칭되어 정녕 여행의 진수를 맛본 하루였다. 하루를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기고 나니 밉보인 그 부인이 쾌활한 성격 때문이 아닐까 하는 긍정적 의미로 바뀐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시대에 살다 보니 그러한지는 몰라도 가책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자유로운 표정을 짓는 그 부부가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부부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라는 가정을 해보면 내가 되레 배려심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지는 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교양에서 이탈된 어떤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여행은 극과 극만을 기억할 뿐이다.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과 가장 괴로웠던 일만이 남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그날의 상처받은 흔적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부인은 아마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며칠 가족이긴 해도 진짜 가족에 가까운 배려와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며칠만 더 조용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지만 이는 머나먼 타국에서 그 부인이 더 아프길 바라는 쌤통 심리학 '샤덴 프로이데'. 아무리 밉지만 이건 아니다 생각을 했다. 어쨌든 밉상 부인의 몸살감기는 나의 신이었다.
에필로그
퇴고推敲를 끝내고 나니 이상하게 글에 대한 허기가 진다. 완성이라는 말로서 홀가분함을 느끼려고 하는데 뭔가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도 모를 일이다. 세상 모든 일이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번 책을 내면서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으니 값진 소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완성했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며 남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작 퇴고에 들어가니 머리가 띵했다. “아! 이 표현은 아니야. 이건 더 아닌데, 가장 합당한 단어는 없을까?” “이때는 사투리가 딱 맞는데, 이건 너무 어려운 문맥이 됐어,” 등 수 많은 미완의 한숨을 뱉게 되었다. 꼼꼼히 따져본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너무 지나치게 돌고 돌다 보면 등산에서 소위 링반데룽을 당하는 것처럼 그 자리를 뱅뱅 돌게 된다. 결국은 처음 떠오른 그 생각에 귀결되기도 한다.
많은 수필, 에세이, 산문, 소설 등을 읽었지만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대동소이한 형식이었다. 그런데 내용은 젖혀두고 스타일이 다르면 눈길을 한 번 더 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자신의 스타일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글의 얼굴은 어떨까. 전혀 알 수 없다.
늘그막에 머릿속에 뭔가를 정리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연필심이 닳으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는 좋다. 설사 별 이득이 없는 행위일지라도 나 자신이 그 속에 녹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기쁨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렇다고 초조감에 빠져 허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독거리지만, 가슴 한구석엔 바쁜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때마다 스스로 다짐을 한다. 설사 얻는 것이 전혀 없더라도 아무 상관 없다. 소로의 말처럼 “무언가 몰입하며 시간을 잊을 때만 시간은 나의 것이다.”를 되씹으며 홀딱 빠짐의 시간을 즐긴다.
돌아다니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내일은 어디 어디를 가고 모래는 또 어떤 교통수단을 택할지를 계획을 짰지만, 지금은 그냥 간편한 옷차림으로 그냥 나가는 것이다. 하루의 방랑자가 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버스를 타고, 다음에는 도시철도를 타는 것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사실이다. 버스를 타면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 온갖 크기와 색깔이 다른 간판들을 멍하게 보는 게 좋고, 지하철 안에서는 밖이 안 보이니 사람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보통 재미가 아니다. 요즘은 마스크 때문에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아쉽다지만, 저 사람은 마스크를 벗으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볼 수 있는 것은 눈과 눈썹과 그리고 이마다. 코와 입과 그리고 턱은 마스크 속의 의문사다. 이 퍼즐을 짜 맞춰보는 상상도 재미있는 일이다. 퍼즐의 결과물은 어떨까.
만약 귓바퀴가 없다면 마스크는 어디에다 걸까. 얼토당토않은 이런 잡다한 생각에 빠지는 것도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불쏘시개를 건질 수 있는 것이다. 글감이라는 게 가끔 웃기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거미줄에 걸려 데굴데굴 말린 잠자리를 보며 저것이 잠자리가 아니고 비행기가 결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읽어보면 시원찮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새가 알을 깨는 부리의 끝인 난치卵齒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내 눈과 마음이 머무를 수 있었던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