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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현대미술
· ISBN : 9791193598115
· 쪽수 : 279쪽
· 출판일 : 2026-04-20
책 소개
전시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작가 노트(Artist’s Statement)’는 관객을 대상으로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배경이나 작업 동기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요청에 의한 작품 해설이나 공식 입장의 성격이 강한 미술가의 ‘진술’인 셈이다. 그러나 작가의 일기장을 저본으로 삼아 ‘작업 노트(Artist's Journal)’라는 제목으로 묶은 이 책의 글은 기본적으로 파편적이고 자유로운 ‘진행형’ 기록이다.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실험하기 위한 메모에서 시작해 작업 중 떠오른 상념이나 감정, 그리고 붓을 든 날 몸의 감각을 꾹꾹 눌러 쓴 기록들까지.
서용선은 ‘기록하는 미술가’로 잘 알려져 있다. 어느 공립미술관은 그의 ‘아카이브’에 초점을 맞춘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작품에 사인 대신 나열된 숫자는 작품을 그린 날들을 기입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서용선의 서재에 있는 수많은 일기장과 노트와 이에 기반하여 작성한 기고문, 그리고 인터뷰 기록까지 비교 검토하며 관련 작품을 찾아 매칭했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연관과 길항을 살펴보며 사유가 이미지화되고, 역으로 이미지가 사유를 촉발하는 생생한 현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그림
서용선에게 ‘도시’는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삶 체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공동묘지가 있던 미아리 외곽의 유년 시절의 시각 경험을 이야기한다. 폐허에서 재건되는 도시 서울이 구조화되는 과정과 함께 성장했던 그에게 ‘도시 생태’가 하나의 그림 주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차가운 무기물 같은, 때로는 살아 꿈틀거리는 유기체와 같은 현대 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을 일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강렬한 색채와 거친 선으로 드러난다.
네 도시 이야기
50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도시 그림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 책은 네 개의 공간을 구획했다. 작가가 거주했거나 자주 방문하는 도시 서울, 베를린, 베이징, 뉴욕이다. 서울은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다. 전쟁으로 파괴된 공간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며 성장했고, 성북구 자택에서 관악구의 직장까지 서울을 관통해 다니면서 본 시각 체험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중요한 테마로 이어지고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담은 1970년대 후반의 드로잉부터 빌딩 숲으로 변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변화를 담았다.
베를린에서는 가라앉은 녹색과 갈색, 무채색이 주조인 도시의 색에 먼저 주목한다. 그가 종종 사용하는 원색과 새로운 환경으로 주어진 도시의 색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우러지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다. 또한 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경험한 도시인 베를린에서 작가는 어떤 기시감이 든다.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어릴 적부터 느껴왔던 서늘한 감시자의 눈빛을 베를린 장벽기념관의 영상과 사진 속 감시병에게서 떠올린다.
2000년대 중후반 몇 차례 베이징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했던 작가는 과거 서울에서 목도한 도시화 과정과의 유사성과 차이에 주목한다. 198-90년대 서울의 대중교통 안에서 스케치했던 넥타이부대의 직장인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그린 인물들은 노동자, 블루칼라 계급이지만 틀에 박힌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연민을 느낀다.
뉴욕은 최근 작가가 도시의 풍경과 일상을 가장 많이 화면에 담고 있는 도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현대 도시의 기능적인 측면 및 자본주의의 발달과 연결되어 돌아가는 하나의 구조체로서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 말에 지어진 구조가 그대로 보이는 뉴욕 지하철에서는 쇠를 찢는 듯한 소리와 밀폐된 공간에서 갇혀 이동하는 도시인의 소외와 애환에 공명하기도 한다.
세 사람 이야기
책의 후반부에는 이 기획을 제안한 갤러리스트이자 컬렉터와의 대담을 수록했다. 서용선은 그간 다양한 대담집, 대화록에서 인터뷰이로서 참여한 바 있다.(심은록, 『사람에 대한 환원적 호기심 - 서용선과의 대화』/이영희, 『화가 서용선과의 대화』) 이는 미술가의 사유와 실제 작업 사이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다.
오랜 시간 작가와 예술적 교감을 이어온 이영희(전 Lee C 갤러리 대표)와 안성진(마산청과시장 대표, 사진가)은 서용선과 나눈 대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그의 글과 말을 책으로 묶어내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미술 수업이나 예술을 접했던 추억, 작가의 모델을 섰던 일, 컬렉션의 동기 등을 이야기하며 다채로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서용선에게 사람과 도시를 그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차츰 그의 예술관에 접근한다. 책의 말미에는 작가가 도시에서 주목했던 간판, 카페, 대중교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그림을 모아 게재했다. 도시 속 텍스트가 보여 주는 풍경, 제한적이되 자유로운 휴식, 정지된 시간의 흐름을 감상할 수 있다.
목차
1 : 도시의 사람들 : 서울
2 : 광장, 감시, 자유 : 베를린
3 : 되돌아온 기억 : 베이징
4 : 인간과의 접촉 : 뉴욕
5 : 대화 : 서용선×이영희×안성진
텍스트가 보여 주는 풍경 : 간판
제한적이되 자유로운 휴식 : 카페
정지된 시간의 흐름 : 대중교통
책속에서
도시의 인물을 그리는 것이 한 시대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이 시대의 적절한 미술 양식일 수 있느냐 하는 데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을 제작하면서, 또 도시의 무표정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건물과 거리와 기계의 소음 속에 끼어 있는 약하지만 끈질긴 생명체로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 지하철역으로 몰려 들어가는 인파, 내가 그들을 의식하듯 그들도 모두 서로를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맑고 투명한 눈앞의 세계를 어떻게 하면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맑고 투명한 세계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게 되고 세계의 구조를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포기하면서 문득 나를 둘러싼 이 사회가 꿈틀거리면서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나를 둘러싼 주위와 자연의 실체들을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 세계의 작은 부분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몰아적 환상 공간에서 벗어나, 나라는 우주 속의 부분적 실체로서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의자와 건물, 사람들 하나하나가 나와 동등한, 내 사고의 무한 공간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무게 있게 다가오게 되었다. 나는 안정된 걸음걸이로 도시의 거리를 천천히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여유 있는 눈길로 나를 둘러싼 도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걸어 다니고 차를 기다리고, 일을 하고, 많은 건물 사이로 사람과 차 들이 이동하고, 그리고 땅속에서 전철이 굉음을 내며 달리고, 사람들이 지하보도를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뉴욕 맨해튼의 미놀타 카메라 선전이 꽉 찬 고층 건물들의 심장처럼 헐떡이고 도쿄, 서울의 밤하늘에 광고판 네온 모델들이 계속해서 번쩍인다. 수없는 허상의 모델들, 그들이 밤만 되면 우리의 시각을 포위한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가로막는다. 어떻게든 이 포위망을 뚫자. 우리의 머릿속에 샘물처럼 흐르는 뇌세포 물질은 그것들과 섞이지 못하기 때문에.
〈상상적 광고〉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92년 1월과 2월 파리와 뉴욕을 동시에 여행하면서 느낀, 현대 도시에서의 광고의 강력한 시각적 침투에 대한 생각을 스케치하여 그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