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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한글 연대기 (훈민에서 계몽으로, 계몽에서 민주로)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기호학/언어학 > 언어학/언어사
· ISBN : 9791194442516
· 쪽수 : 444쪽
· 출판일 : 2025-10-09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기호학/언어학 > 언어학/언어사
· ISBN : 9791194442516
· 쪽수 : 444쪽
· 출판일 : 2025-10-09
책 소개
한글의 연대기, 즉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보여 주지만,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후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뿐만 아니라, 한글이 쓰이고 변하는 맥락을 짚으면서 한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한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투쟁의 기록, ‘한글 연대기’
이 책은 한글이라는 문자가 한국어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고 그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탱해 왔는가를 그려 낸 장대한 투쟁의 기록이다. 문자는 단순한 표기의 도구가 아니다. 문자는 종종 언어의 중추를 파고들어 언어를 변혁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사유와 삶마저 바꾸어 놓는다. 한글은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뚜렷이 일깨워 준다. 저자가 형상화한 강인한 물음과, 누가 어떻게 고민하며 분투했는가를 짚어 낸 사실의 정교한 자리매김이 이 연대기를 이루고 있다. 그 근간에 흐르는 저자의 사상은 한국어를 살아가는 민중의 시각에 놓여 있으며, 한글이 ‘우리의 언어’를 떠받친다는 신념이 책 전편을 꿰뚫고 있다. _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추천사’ 중에서
한글은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자요 한국어는 대부분의 동포에게 대체 불가능한 모어인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언어인데, 저자가 주목하듯이 그 둘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나름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한글 창제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한글의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 최경봉 교수의 이 책이다. 어문의 역사이자 한국어의 역사이며 일종의 사회사를 겸하고 있다. _ 백낙청 ‘추천사’ 중에서
우리에게 ‘한글’과 ‘한국어’는 같은 의미다!
한글과 한국어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하나는 글, 하나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영어는 모두 라틴문자(로마자) 혹은 라틴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만이 ‘한글’이라는 문자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문자의 이름인 한글을 바로 한국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중세 조선만 해도 우리말의 짝이 된 우리글은 ‘한자’였다. 한자로 쓰고 우리말을 했다. 세종대왕이 1443년에 훈민정음을 만들었지만, 이 문자는 어디까지나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한 ‘훈민’(訓民)의 글자였다.
저자 최경봉 교수는 그의 다른 책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 의식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착종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우리말 공동체가 ‘한글’에 새겨 온 의미를 근대적 어문 개혁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며,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이 책의 서술 대상을 정했다.
이 책은 한글의 연대기, 즉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보여 주지만,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후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뿐만 아니라, 한글이 쓰이고 변하는 맥락을 짚으면서 한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한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에서의 한글 연대기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로서 한글의 모습’이라는 표면구조와 ‘역사적 맥락 속 한글의 의미’라는 내면구조를 함께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펼친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과 그를 잇는 조선의 왕들이 한글을 널리 보급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는 ‘조선 왕조가 성리학적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한글로 백성을 교화했다’는 역사적 맥락의 연대기와 겹친다. 이 연대기의 내면구조에서 한글은 결국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었던 한글은 근대화의 맥락에서 근대 개혁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훈민’의 언어 한글, 작용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있다
1443년 12월 30일자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 한 대목이 실렸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긴요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였다.”
세종이 친히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글의 기원과 사용 원리와 특성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문자’(한자)에 관한 것과 ‘이어’(항간에 떠도는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간단한 28자를 전환하여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글자, 한글의 특성에 대한 서술은 곧 한글의 힘에 대한 첫 평가였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글 창제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세종은 교육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교육에 한글이 큰 힘을 발휘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글은 세종이 기대했던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힘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세종은 성리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쉽고 간편한 한글이 삼강오륜의 이치를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 기대했겠지만, 한글은 삼강오륜의 이치에 반하는 지식과 사상(동학, 천주교 등)조차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한 글자였다.
한글은 백성을 가르칠 글자이면서 백성이 자신의 뜻을 펴는 글자이기도 했다. 한글을 배운 백성은 자신의 뜻을 펴는 데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한글을 창제한 후 6년이 지난 시점에, 한글은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 정승 하연(河演)을 비난하는 한글 벽보가 나붙은 것이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에다 쓰기를, ‘하 정승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49. 10. 5.)
공론화를 위해 한글 벽보를 붙인 것을 보면, 그 벽보를 쓴 사람은 한글 벽보가 가진 파급력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상당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시기가 한글 창제 후 6년 만이었다는 건 한글의 보급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글 벽보뿐만 아니라 한글 투서도 횡행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정조 임금은 민심이 동요하는 국면마다 한글로 유지를 내려 백성을 안심시켰다.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은 예언의 서적에 있지 않고 다만 교화가 시행되지 않고 풍속이 안정되지 않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이 도에서 발생할까 하는 것이다.……그들도 충성하고 싶은 양심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완고히 잘못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비밀히 유시한 글 한 통과 문인방(文仁邦)을 법에 따라 결안한 것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 써서 방면한 죄수들에게 주도록 하라.(『정조실록』, 1782. 12. 10.)
한글은 상하 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문자로 사용자가 가장 많았기에, 조선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되었다. 한문을 교육하는 데도, 과학 기술의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하는 데도 한글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자였다. 중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널리 보급된 한글은, 근대화의 압력이 거세지는 시기, 근대 사회를 여는 강력한 도구로 새롭게 등장했다. 백성에게 삼강오륜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문자로 깊이 뿌리 내린 한글이 삼강오륜으로 상징되는 중세적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공론장의 주류 문자가 되었던 것이다.
‘계몽’의 언어 한글, 상처입은 민족의 자존심을 치유하다
한글의 힘에 대한 기대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일까? 한글은 그 기대의 방향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세종은 자신이 창제한 문자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세종을 포함하여 당시 사람들은 진서(眞書) 혹은 문자(文字)로 불렸던 한문과 한자에 대비하여,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렀다. ‘언문’이란 한문과 한자가 주류인 세상에서 한글의 쓰임은 비주류 영역에 국한됨을 말해 주는 이름이다.
근대에 오면서 언문은 ‘국문’(國文)이 되었다. 비록 아주 짧은 시기였지만, 민족과 국가의 의미가 새로워지면서 우리의 말과 문자도 새롭게 인식되었고, ‘속되다’를 함의할 수밖에 없었던 ‘언문’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곧 일본에 병합되었고, 국문과 국어는 일문과 일본어를 뜻하는 이름이 되었다. 우리말과 글이 주류 영역을 벗어나면서 조선인들은 ‘국문’을 대신할 이름을 찾았고, 이에 ‘한글’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한글’은 대한제국의 글 또는 문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한문’(韓文)을 풀어쓴 것이었다. ‘국문’에 대비된 비주류 문자의 이름이었지만,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한글’은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는 이름이기도 했고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문자’라는 의미는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상처 입은 민족적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해 ‘한글’에는 ‘큰’, ‘위대한’ 또는 ‘유일한’이라는 의미가 덧붙었다.
1894년, 고종이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칙령을 내린 뒤부터 한글 글쓰기는 무한 확장되었다.
한글 글쓰기는 한글 신문의 연대기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독립신문』에서 시작하여 『대한매일신보』에서 분명해진 한글 신문의 가능성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거쳐 『한겨레신문』에서 꽃을 피운다. 신문 독자의 요구를 의식하며 신문의 글쓰기를 조정해 온 한글 신문의 연대기는 그렇게 한글 글쓰기 확장의 연대기와 겹친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승화하려 했던 이들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표기법을 통일하지 못하고 우리말 사전 하나 편찬하지 못한 현실’에서 찾았다. 그러니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키울수록 통일된 표기법과 우리말 사전이 없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자부심과 통일된 표기법과 모어 사전이 없는 자괴감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은 결국 민족어 운동에 나서는 동기이자 이유가 되었다.
어문규범 제정의 연대기는 규범을 둘러싼 연구와 논쟁의 연대기이다. 한글 창제의 원리를 밝히고 한글 쓰기의 관습을 정리하는 연구는 어문규범을 제안하고 이를 관철시킬 논리를 세우는 일이었다. 일관성 있는 또는 쉬운 어문규범을 정립한다는 목표 아래 양보 없는 논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던 시절에도,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시절에도, 해방 후에도, 심지어 현재까지도 이처럼 치열한 논쟁이 계속된 이유는 뭘까? 이 논쟁을 추동한 동력은 뭘까?
사람마다 그 대답은 다를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논쟁의 이유와 논쟁을 추동한 동력을 한글을 대하는 우리의 특별한 마음에서 찾는다. 그 특별한 마음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 줄 증거인 한글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 민족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어문민족주의적 신념이다. 우리 민족의 발전이 절박했던 만큼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제대로 발현할 수 있게 어문규범을 세우는 일은 절박한 문제였다. 어문규범을 둘러싼 논쟁의 내면에는 이처럼 절박한 어문민족주의적 신념이 충돌하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어문규범 제정의 연대기는 한글과 우리말과 우리 민족의 운명적 관계를 내면화하는 연대기이기도 했다.
한글의 운명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믿음
한글을 소유한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은 한글이 문자의 모든 가능성을 보일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했다. 한글이 세계 언어의 모든 음성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한글은 문자와 관련한 모든 문명의 이기에 가장 적합한 문자라고 믿었다. 9장에서 서술한 한글 기계화의 연대기는 문명의 이기가 출현할 때마다 한글의 과학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던 우리말 공동체의 분투기이다. 1914년 이원익의 한글 타자기를 시작으로 공병우의 한글 타자기, 송계범의 전자뇌를 이용한 ‘보류식 인쇄 전신기’ 개발까지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온 역사 그리고 천지인 자판으로 대표되는 휴대전화 자판 개발 역사는 한글 기계화의 역동적인 분투 과정이다.
한글의 과학성을 입증하기 위한 분투는 우리말을 표현하는 특수문자를 개발하는 열정으로도 이어진다. 10장에서는 한글 전신부호, 한글 점자, 한글 지문자를 소개하는데, 한글을 소유한 우리말 공동체의 자부심이 특수문자의 개발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한글의 운명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은 한글 연대기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암흑의 시절에도 그 운명론은 항상 낙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낙관론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에 대한 믿음, 한글을 통한 소통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 한글의 쓰임이 확대될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11장에서 서술한 한글날 제정의 연대기는 곧 한글을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자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대기이다.
국어학자 최현배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해야 하는 이유로, “훈민정음은 정히 우리 배달겨레의 문화 독립선언이요 한글은 문화 독립의 기초”이며, “한글의 탄생은 다만 한 종류의 글자의 생겨남이 아니라 실로 그것은 겨레 의식 통일의 상징이요 겨레 문화의 영원한 발달의 원동력”이라 했다. 한글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연결 지으면서, 한글에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확정된 해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1945년이다. 1926년에 11월 4일을 한글 반포 기념일로 지정한 후, 한글날은 음력과 양력의 환산법을 바꾸면서 10월 29일과 28일로 날짜를 조정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한글날이 바뀐 것은 1940년에 한글의 제자 원리와 창제 동기 등을 정리한 『훈민정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자의 말미에 적힌 저술 완결 시점이 1446년 9월 상한인데, 이를 통해 한글 반포일의 근거가 된 『세종실록』(1446.9.29.)의 기록, 즉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가 해례본 『훈민정음』의 완성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음력 9월 29일이던 한글 반포일을 9월 상한이란 기록을 기준으로 다시 조정해, 10월 9일로 한글날을 확정했다.
‘민주’의 언어 한글, 세계로 뻗어 나가는 K의 힘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문자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근 불거진 인도네시아의 반정부 시위에서 인도네시아의 젊은 세대는 SNS 게시물이 차단되자 인도네시아어 문장을 한글로 옮겨 쓰며 검열망을 피하는 새로운 방식의 저항에 나섰다. 이들은 왜 수많은 문자 중에서 한글을 선택했을까? 표음문자인 한글은 소리와 글자가 일치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어를 표기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해 이전부터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한류로 인해 인도네시아 젊은이 중에 한글을 배우는 인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팅갈 민따 마압 트루스 뜬게린 락얏 아빠 수사냐”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냥 사과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라는 뜻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글을 SNS에 쓰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 말을 또 용케 알아듣고 한글로 댓글을 단다. 놀라운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건 근대 이후 우리 학자들의 발군의 노력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 한글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열망은 세계와 연대해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1900년 5월 「The Korean Language」라는 글이 『로녹대학 학보』(Roanoke Collegian)에 실렸다. 이 글을 쓴 이는 19세의 한국인 유학생 김규식. 김규식은 한국을 궁금해하는 동료 학생들에게 한국어에 대해 설명하며 동방의 낯선 나라 한국을 알렸다.
이극로는 독일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알리며, 조선이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그래서 독립 국가를 유지할 자격이 있는 민족임을 강조했다. 이극로는 독일 현지에서 한글 활자로 한글 서적을 인쇄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독일 국립 인쇄소의 지원을 받아 냈으며, 중국에 망명 중인 김두봉에게 활자 한 벌을 받아 그것을 본떠 만든 활자로 베를린 대학 동방학부 연감에 「허생전」 몇 장을 인쇄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브뤼노의 구술 아카이브 작업에 참여하여 한글 창제의 내력과 조선어의 자모음을 설명하는 육성 녹음을 남겼다. 그가 한 녹음은 1928년 5월 프랑스 소르본 대학 인류학 팀과 녹음한 자료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2종이 남아 있다.
1928년 이극로 선생의 육성 녹음
한글과 한국어를 알리는 일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교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한국이 경제 개발을 본격화한 시점부터다. 이는 한국어 교육을 체계화하는 역사와 맞물려 있는데, 전문적인 한국어 교육 기관의 설립은 그 시작이었고, 한국어를 배우는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능력시험을 실시한 것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한국어의 세계화라는 목표는 한국어 문화 권역의 확대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21세기 들어 종이 사전이 몰락하고 웹 사전의 시대가 열리면서, 분량을 제한할 필요가 없는 웹의 특성상 종이 사전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하게 용례를 제시하고, 단어의 사용 환경을 충실하게 풀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016년 웹 사전으로 개통한 『우리말샘』은 100만 개의 올림말(표제어)로 출발했고 신어를 지속적으로 등록하면서 그 올림말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웹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말이 올림말의 대상이 되고, 사용자가 편찬자로서 참여해 올림말을 제안하고 풀이하는 게 가능해지면서, 사전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그 풀이는 지금보다 더 다양해질 것이다.
이렇게 변화한 현실에서 국어사전의 미래는 밝은가? 종이사전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은 국어사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 국가 사전인 『표준국어대사전』의 간행 후 민간 사전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 역시 국어사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 “사전 편찬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배제할지, 그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결정한다. 그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하다”는 비평은 다양성이 사라진 사전 생태계의 파괴를 우려한 것이다.
표준과 규범이 중요했던 시대에 국가의 개입을 통한 국어사전의 출판은 분명 효율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돈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사전 편찬의 경우 국가의 개입은 사전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직접 편찬에 개입함으로써 국어사전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게 현실이라면, 지금은 표준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국가의 진퇴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인 것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함께.
이 책은 한글이라는 문자가 한국어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고 그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탱해 왔는가를 그려 낸 장대한 투쟁의 기록이다. 문자는 단순한 표기의 도구가 아니다. 문자는 종종 언어의 중추를 파고들어 언어를 변혁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사유와 삶마저 바꾸어 놓는다. 한글은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뚜렷이 일깨워 준다. 저자가 형상화한 강인한 물음과, 누가 어떻게 고민하며 분투했는가를 짚어 낸 사실의 정교한 자리매김이 이 연대기를 이루고 있다. 그 근간에 흐르는 저자의 사상은 한국어를 살아가는 민중의 시각에 놓여 있으며, 한글이 ‘우리의 언어’를 떠받친다는 신념이 책 전편을 꿰뚫고 있다. _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추천사’ 중에서
한글은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자요 한국어는 대부분의 동포에게 대체 불가능한 모어인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언어인데, 저자가 주목하듯이 그 둘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나름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한글 창제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한글의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것이 최경봉 교수의 이 책이다. 어문의 역사이자 한국어의 역사이며 일종의 사회사를 겸하고 있다. _ 백낙청 ‘추천사’ 중에서
우리에게 ‘한글’과 ‘한국어’는 같은 의미다!
한글과 한국어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하나는 글, 하나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영어는 모두 라틴문자(로마자) 혹은 라틴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만이 ‘한글’이라는 문자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문자의 이름인 한글을 바로 한국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중세 조선만 해도 우리말의 짝이 된 우리글은 ‘한자’였다. 한자로 쓰고 우리말을 했다. 세종대왕이 1443년에 훈민정음을 만들었지만, 이 문자는 어디까지나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한 ‘훈민’(訓民)의 글자였다.
저자 최경봉 교수는 그의 다른 책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 의식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착종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우리말 공동체가 ‘한글’에 새겨 온 의미를 근대적 어문 개혁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며,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이 책의 서술 대상을 정했다.
이 책은 한글의 연대기, 즉 한글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보여 주지만,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후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뿐만 아니라, 한글이 쓰이고 변하는 맥락을 짚으면서 한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한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에서의 한글 연대기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로서 한글의 모습’이라는 표면구조와 ‘역사적 맥락 속 한글의 의미’라는 내면구조를 함께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펼친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과 그를 잇는 조선의 왕들이 한글을 널리 보급했다’는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는 ‘조선 왕조가 성리학적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한글로 백성을 교화했다’는 역사적 맥락의 연대기와 겹친다. 이 연대기의 내면구조에서 한글은 결국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었던 한글은 근대화의 맥락에서 근대 개혁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훈민’의 언어 한글, 작용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있다
1443년 12월 30일자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 한 대목이 실렸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긴요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였다.”
세종이 친히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글의 기원과 사용 원리와 특성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문자’(한자)에 관한 것과 ‘이어’(항간에 떠도는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간단한 28자를 전환하여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글자, 한글의 특성에 대한 서술은 곧 한글의 힘에 대한 첫 평가였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하면서 한글 창제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세종은 교육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교육에 한글이 큰 힘을 발휘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글은 세종이 기대했던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힘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세종은 성리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쉽고 간편한 한글이 삼강오륜의 이치를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 기대했겠지만, 한글은 삼강오륜의 이치에 반하는 지식과 사상(동학, 천주교 등)조차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한 글자였다.
한글은 백성을 가르칠 글자이면서 백성이 자신의 뜻을 펴는 글자이기도 했다. 한글을 배운 백성은 자신의 뜻을 펴는 데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한글을 창제한 후 6년이 지난 시점에, 한글은 공론의 장에 등장했다. 정승 하연(河演)을 비난하는 한글 벽보가 나붙은 것이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에다 쓰기를, ‘하 정승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49. 10. 5.)
공론화를 위해 한글 벽보를 붙인 것을 보면, 그 벽보를 쓴 사람은 한글 벽보가 가진 파급력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상당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시기가 한글 창제 후 6년 만이었다는 건 한글의 보급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글 벽보뿐만 아니라 한글 투서도 횡행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정조 임금은 민심이 동요하는 국면마다 한글로 유지를 내려 백성을 안심시켰다.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은 예언의 서적에 있지 않고 다만 교화가 시행되지 않고 풍속이 안정되지 않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이 도에서 발생할까 하는 것이다.……그들도 충성하고 싶은 양심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완고히 잘못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비밀히 유시한 글 한 통과 문인방(文仁邦)을 법에 따라 결안한 것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 써서 방면한 죄수들에게 주도록 하라.(『정조실록』, 1782. 12. 10.)
한글은 상하 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문자로 사용자가 가장 많았기에, 조선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되었다. 한문을 교육하는 데도, 과학 기술의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하는 데도 한글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자였다. 중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널리 보급된 한글은, 근대화의 압력이 거세지는 시기, 근대 사회를 여는 강력한 도구로 새롭게 등장했다. 백성에게 삼강오륜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문자로 깊이 뿌리 내린 한글이 삼강오륜으로 상징되는 중세적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공론장의 주류 문자가 되었던 것이다.
‘계몽’의 언어 한글, 상처입은 민족의 자존심을 치유하다
한글의 힘에 대한 기대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일까? 한글은 그 기대의 방향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세종은 자신이 창제한 문자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세종을 포함하여 당시 사람들은 진서(眞書) 혹은 문자(文字)로 불렸던 한문과 한자에 대비하여,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렀다. ‘언문’이란 한문과 한자가 주류인 세상에서 한글의 쓰임은 비주류 영역에 국한됨을 말해 주는 이름이다.
근대에 오면서 언문은 ‘국문’(國文)이 되었다. 비록 아주 짧은 시기였지만, 민족과 국가의 의미가 새로워지면서 우리의 말과 문자도 새롭게 인식되었고, ‘속되다’를 함의할 수밖에 없었던 ‘언문’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곧 일본에 병합되었고, 국문과 국어는 일문과 일본어를 뜻하는 이름이 되었다. 우리말과 글이 주류 영역을 벗어나면서 조선인들은 ‘국문’을 대신할 이름을 찾았고, 이에 ‘한글’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한글’은 대한제국의 글 또는 문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한문’(韓文)을 풀어쓴 것이었다. ‘국문’에 대비된 비주류 문자의 이름이었지만,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한글’은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는 이름이기도 했고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문자’라는 의미는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상처 입은 민족적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해 ‘한글’에는 ‘큰’, ‘위대한’ 또는 ‘유일한’이라는 의미가 덧붙었다.
1894년, 고종이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칙령을 내린 뒤부터 한글 글쓰기는 무한 확장되었다.
한글 글쓰기는 한글 신문의 연대기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독립신문』에서 시작하여 『대한매일신보』에서 분명해진 한글 신문의 가능성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거쳐 『한겨레신문』에서 꽃을 피운다. 신문 독자의 요구를 의식하며 신문의 글쓰기를 조정해 온 한글 신문의 연대기는 그렇게 한글 글쓰기 확장의 연대기와 겹친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승화하려 했던 이들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표기법을 통일하지 못하고 우리말 사전 하나 편찬하지 못한 현실’에서 찾았다. 그러니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키울수록 통일된 표기법과 우리말 사전이 없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문명화된 문자를 가진 자부심과 통일된 표기법과 모어 사전이 없는 자괴감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은 결국 민족어 운동에 나서는 동기이자 이유가 되었다.
어문규범 제정의 연대기는 규범을 둘러싼 연구와 논쟁의 연대기이다. 한글 창제의 원리를 밝히고 한글 쓰기의 관습을 정리하는 연구는 어문규범을 제안하고 이를 관철시킬 논리를 세우는 일이었다. 일관성 있는 또는 쉬운 어문규범을 정립한다는 목표 아래 양보 없는 논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던 시절에도,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시절에도, 해방 후에도, 심지어 현재까지도 이처럼 치열한 논쟁이 계속된 이유는 뭘까? 이 논쟁을 추동한 동력은 뭘까?
사람마다 그 대답은 다를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논쟁의 이유와 논쟁을 추동한 동력을 한글을 대하는 우리의 특별한 마음에서 찾는다. 그 특별한 마음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 줄 증거인 한글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 민족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어문민족주의적 신념이다. 우리 민족의 발전이 절박했던 만큼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제대로 발현할 수 있게 어문규범을 세우는 일은 절박한 문제였다. 어문규범을 둘러싼 논쟁의 내면에는 이처럼 절박한 어문민족주의적 신념이 충돌하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어문규범 제정의 연대기는 한글과 우리말과 우리 민족의 운명적 관계를 내면화하는 연대기이기도 했다.
한글의 운명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믿음
한글을 소유한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은 한글이 문자의 모든 가능성을 보일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했다. 한글이 세계 언어의 모든 음성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한글은 문자와 관련한 모든 문명의 이기에 가장 적합한 문자라고 믿었다. 9장에서 서술한 한글 기계화의 연대기는 문명의 이기가 출현할 때마다 한글의 과학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던 우리말 공동체의 분투기이다. 1914년 이원익의 한글 타자기를 시작으로 공병우의 한글 타자기, 송계범의 전자뇌를 이용한 ‘보류식 인쇄 전신기’ 개발까지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온 역사 그리고 천지인 자판으로 대표되는 휴대전화 자판 개발 역사는 한글 기계화의 역동적인 분투 과정이다.
한글의 과학성을 입증하기 위한 분투는 우리말을 표현하는 특수문자를 개발하는 열정으로도 이어진다. 10장에서는 한글 전신부호, 한글 점자, 한글 지문자를 소개하는데, 한글을 소유한 우리말 공동체의 자부심이 특수문자의 개발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한글의 운명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은 한글 연대기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암흑의 시절에도 그 운명론은 항상 낙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낙관론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에 대한 믿음, 한글을 통한 소통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 한글의 쓰임이 확대될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11장에서 서술한 한글날 제정의 연대기는 곧 한글을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자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대기이다.
국어학자 최현배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해야 하는 이유로, “훈민정음은 정히 우리 배달겨레의 문화 독립선언이요 한글은 문화 독립의 기초”이며, “한글의 탄생은 다만 한 종류의 글자의 생겨남이 아니라 실로 그것은 겨레 의식 통일의 상징이요 겨레 문화의 영원한 발달의 원동력”이라 했다. 한글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연결 지으면서, 한글에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확정된 해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1945년이다. 1926년에 11월 4일을 한글 반포 기념일로 지정한 후, 한글날은 음력과 양력의 환산법을 바꾸면서 10월 29일과 28일로 날짜를 조정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한글날이 바뀐 것은 1940년에 한글의 제자 원리와 창제 동기 등을 정리한 『훈민정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자의 말미에 적힌 저술 완결 시점이 1446년 9월 상한인데, 이를 통해 한글 반포일의 근거가 된 『세종실록』(1446.9.29.)의 기록, 즉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가 해례본 『훈민정음』의 완성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음력 9월 29일이던 한글 반포일을 9월 상한이란 기록을 기준으로 다시 조정해, 10월 9일로 한글날을 확정했다.
‘민주’의 언어 한글, 세계로 뻗어 나가는 K의 힘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문자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근 불거진 인도네시아의 반정부 시위에서 인도네시아의 젊은 세대는 SNS 게시물이 차단되자 인도네시아어 문장을 한글로 옮겨 쓰며 검열망을 피하는 새로운 방식의 저항에 나섰다. 이들은 왜 수많은 문자 중에서 한글을 선택했을까? 표음문자인 한글은 소리와 글자가 일치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어를 표기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해 이전부터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한류로 인해 인도네시아 젊은이 중에 한글을 배우는 인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팅갈 민따 마압 트루스 뜬게린 락얏 아빠 수사냐”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냥 사과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라는 뜻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글을 SNS에 쓰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 말을 또 용케 알아듣고 한글로 댓글을 단다. 놀라운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건 근대 이후 우리 학자들의 발군의 노력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 한글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열망은 세계와 연대해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1900년 5월 「The Korean Language」라는 글이 『로녹대학 학보』(Roanoke Collegian)에 실렸다. 이 글을 쓴 이는 19세의 한국인 유학생 김규식. 김규식은 한국을 궁금해하는 동료 학생들에게 한국어에 대해 설명하며 동방의 낯선 나라 한국을 알렸다.
이극로는 독일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알리며, 조선이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그래서 독립 국가를 유지할 자격이 있는 민족임을 강조했다. 이극로는 독일 현지에서 한글 활자로 한글 서적을 인쇄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독일 국립 인쇄소의 지원을 받아 냈으며, 중국에 망명 중인 김두봉에게 활자 한 벌을 받아 그것을 본떠 만든 활자로 베를린 대학 동방학부 연감에 「허생전」 몇 장을 인쇄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브뤼노의 구술 아카이브 작업에 참여하여 한글 창제의 내력과 조선어의 자모음을 설명하는 육성 녹음을 남겼다. 그가 한 녹음은 1928년 5월 프랑스 소르본 대학 인류학 팀과 녹음한 자료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2종이 남아 있다.
1928년 이극로 선생의 육성 녹음
한글과 한국어를 알리는 일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교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한국이 경제 개발을 본격화한 시점부터다. 이는 한국어 교육을 체계화하는 역사와 맞물려 있는데, 전문적인 한국어 교육 기관의 설립은 그 시작이었고, 한국어를 배우는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능력시험을 실시한 것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한국어의 세계화라는 목표는 한국어 문화 권역의 확대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21세기 들어 종이 사전이 몰락하고 웹 사전의 시대가 열리면서, 분량을 제한할 필요가 없는 웹의 특성상 종이 사전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하게 용례를 제시하고, 단어의 사용 환경을 충실하게 풀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016년 웹 사전으로 개통한 『우리말샘』은 100만 개의 올림말(표제어)로 출발했고 신어를 지속적으로 등록하면서 그 올림말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웹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말이 올림말의 대상이 되고, 사용자가 편찬자로서 참여해 올림말을 제안하고 풀이하는 게 가능해지면서, 사전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그 풀이는 지금보다 더 다양해질 것이다.
이렇게 변화한 현실에서 국어사전의 미래는 밝은가? 종이사전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은 국어사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 국가 사전인 『표준국어대사전』의 간행 후 민간 사전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 역시 국어사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 “사전 편찬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배제할지, 그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결정한다. 그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하다”는 비평은 다양성이 사라진 사전 생태계의 파괴를 우려한 것이다.
표준과 규범이 중요했던 시대에 국가의 개입을 통한 국어사전의 출판은 분명 효율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돈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사전 편찬의 경우 국가의 개입은 사전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직접 편찬에 개입함으로써 국어사전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게 현실이라면, 지금은 표준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국가의 진퇴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인 것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함께.
목차
[1장]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였을까?―한글 창제와 보급의 연대기
[2장] 어떤 글이 한문을 대체할 수 있을까?―한문 해체의 연대기
[3장] 한글 신문으로 공론의 장을 넓히자―한글 신문의 연대기
[4장] 세계를 어떻게 한글로 기록할 수 있을까?―외래어 표기의 연대기
[5장] 한글 쓰기 원칙을 세우자―『한글 마춤법 통일안』까지 맞춤법의 연대기
[6장] 쉬운 맞춤법이 진리―한글 맞춤법에 대한 이의 제기의 연대기
[7장] 우리말 사전을 만들자―국어사전 편찬의 연대기
[8장] 세계에 한글을 알리자―한국어 세계화의 연대기
[9장] 글씨 쓰는 기계와 한글의 만남―한글 기계화의 연대기
[10장] 특수문자로서 한글의 재탄생―한글 응용의 연대기
[11장] 한글을 기념하다―한글날 제정의 연대기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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