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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국제정치학 : 이론

통합 국제정치학 : 이론(사상), 이슈, 외교사

(외무 영사직.외교관 후보자 시험대비)

김중일 (지은이)
  |  
공시마
2019-04-25
  |  
3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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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국제정치학 : 이론

책 정보

· 제목 : 통합 국제정치학 : 이론(사상), 이슈, 외교사 (외무 영사직.외교관 후보자 시험대비)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사회과학계열 > 정치외교학 > 국제정치학
· ISBN : 9791196657918
· 쪽수 : 552쪽

목차

CHAPTER 01 동양의 외교사 7
01. 동방 8
02. 크림전쟁 12
03. 러시아-오토만 제국 전쟁 20
04. 유교권 질서의 붕괴 24
05. 일본의 개국 33
06. 청?일전쟁 37
07. 러?일전쟁 49
08. 약탈제국주의와 조선 62
09. 교린질서와 조선 68
10. 조선의 새로운 외교정책 74
11. 조선과 미국의 수호조약 79
12. 조선과 서양 열강의 수호조약 82
13. 임오군란 88
14. 갑신정변 92
15.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 98


CHAPTER 02 서양의 외교사 105
01. 빈체제 106
02. 유럽협조체제 112
03. 근대국가 117
04. 새로운 동맹들의 형성 134
05. 세계분할의 완료 139
06. 전쟁의 세계화 147
07. 베르사유 조약 체제 158
08. 안정과 혼란의 공존 178
09. 혼란의 세계외교사 181
10. 유화와 침략의 공존 190
11. 제2차 세계대전 202
12. 냉전사 232


CHAPTER 03 국제정치이론 259
01. 이상주의 (Idealism) 260
02.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특징 266
03. 외교정책결정이론 (Foreign Policy Decision-making Theory) 276
04. 통합이론 (Theories of Integration) 288
05. 상호의존론 (Complex interdependence) 295
06.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308
07. 양면게임(two-level game) 324
08.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 329
09. 현실주의 패러다임 335
10. 전통적 현실주의(Traditional Realism) 339
11. 행태주의적 현실주의 (Behavioralism) 347
12. 신현실주의 (Neorealism) 357
13. 패권 안정론 (Hegemonic Stability Theory) 369
14. 탈냉전기의 신현실주의 (Neorealism) 376
15. 세력전이이론 (Power Transition Theory) 388
16. 신고전적 현실주의 (Neoclassical realism) 393
17. 지정학 이론 (Geo-Politics) 401
18. 구조주의 (structuralism) 409
19. 구성주의 424


CHAPTER 04 국제정치 이슈 433
01. 미국의 외교정책 434
02. 미국의 대아시아정책 440
03. 미국의 방위전략 444
04. 중국의 대외정책 451
05. 일본의 외교전략 471
06. 러시아의 외교정책 482


CHAPTER 05 지역외교 487
01.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및 동아시아 안보 현황 488
02. EU 형성과정 499
03. BRICS 511
04. 동아시아 해양영토 분쟁 516

CHAPTER 06 글로벌 이슈 523
01. 글로벌 거버넌스 524
02. 나토(NATO) 연혁과 현황 528
03. 기후변화 협상 541

저자소개

김중일 (지은이)    정보 더보기
• 학사캠퍼스 EBS 사회학 전임교수 • 대성 대입학원 및 노량진 정진학원 전임교수 • 노량진 회소 임용고시 학원 전임교수 • 노량진 행정고시 학원 전임교슈 • 한국교육진흥재단 사회학, 세계사, 종합교양 전임교수 • 이그잼 7급 공무원 국제법, 국제정치학 전임교수 • 국가정보학연구소 시사인문 선임연구원 • 공시마/종로국가정보학원 국립외교원 전임교수 • 공시마/종로국가정보학원 국제정치학 전임교수 • 공시마/종로국가정보학원 국정원 논술, 정보소양 전임교수 • 공시마/종로국가정보학원 국정원 자소서・면접 전임교수 [주요저서] • 한국교육진흥재단 교재(시사종합교양, 취업논술) • 경호처 종합상식・논술/국정원 종합교양 요약 문제집 • 취업 직무적성검사 핵심요약 문제집/공기업 시사 논술 • 김중일 국제법(북이그잼) • 김중일 통합국제정치학(공시마) • NIS 김중일 국정원 논술 저자(다산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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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01 동방

1 동방문제
1) 문제의 성격
오토만제국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 계속 유럽 본토로 진출하였는데 유럽 열강들이 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동방 문제였다. 16세기부터 오토만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는데 그때까지 오토만제국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오히려 침략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과 쿠츠크 카이나르지 조약은 획기적인 변환의 조약이다. 즉, 흑해의 자유통항권과 해협의 통과 권리도 획득된 조약이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한때 시리아에 관심을 보였으나 나폴레옹 전쟁은 오토만 제국의 운명 자체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오토만은 빈 회의에 대표를 파견했지만 러시아의 희망에 따라 오토만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토의도 없었다.

2) 열강의 태도
유럽 열강 중에서도 러시아가 발칸 문제에 있어서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오랫동안 발칸 문제에 관여했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함께 오토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저지한 세력이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진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가톨릭의 보호국이었다. 또한 영국은 오토만제국의 현상유지 정책의 충실한 이행자 입장이다. 이러한 열강의 각축은 1923년 오토만제국의 붕괴이후 공화국 터키가 탄생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2 그리스 독립
1) 그리스 문제
그리스의 독립은 1821년 3월 몰다비아와 모레아 지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시발점으로 해서 1830년 2월 런던 회의에서 열강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10년이나 걸려서 쟁취되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베로나 회의에서 그리스의 합법적인 지배자는 오토만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의 확인을 러시아로부터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러시아가 열강과 협의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고 추가로 약속했다.

2) 영국.러시아 의정서(1826년)
베로나 회의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태도는 돌변하였는데 그리스 문제를 위한 국제회의의 개최를 다시 제안하였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구상에 열강은 동의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구상은 그리스를 3개의 공국으로 나누고 이들 공국을 발칸의 다른 공국들과 같은 법적 지위를 갖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열강과 그리스는 반대하였고 1821년 이미 그리스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독립운동은 그 내분이 심각해 자체 분열이 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터키는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에게 그리스 독립운동의 진압을 요청하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직접 교섭을 해 의정서가 1826년 체결된다. 그리스는 오토만제국의 종속국이지만 자치지역의 법적 지위를 갖는다는 내용인데 터키는 이러한 중재안을 거부한다.

3) 러시아.터키 전쟁(1828∼1829)
오토만이 중재를 거부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세 나라는 1827년 7월 6일 런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1개월 이내에 오토만이 세 나라의 중재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그리스에 영사를 파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바리노 만 사건이 터진다. 러시아는 1828년 오토만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프랑스 역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그리스 문제는 1830년 2월 3일 런던 의정서의 채택으로 곧 해결되었다. 그 내용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 세 나라가 그리스의 국경선을 정하고 그리스 국왕으로서는 이들 세 나라의 지배 가문에 속하지 않는 기독교 군주를 추대한다는 내용이다.

3 동방의 위기
1) 제1차 위기(1832년∼1833년)
그리스 독립 문제의 연장으로 이른바 동방의 위기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스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오토만제국이 이집트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알리는 그리스 반군 진압의 대가로 모레아의 관할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독립으로 모레아가 그리스 영토가 되자 알리는 시리아의 관할권을 대신 요구하고 나섰고 이 문제로 오토만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 독립 이후 영국과 러시아는 오토만제국의 현상 유지에 묵시적 합의를 갖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결국 이들 나라의 중재로 오토만제국은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2)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1833년)과 뮌헨 그래츠 합의
분쟁이 해결되자 러시아 함대는 철수했으나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오토만제국과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일종의 동맹 조약이었으나 러시아의 이익을 반영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뮌헨 그래츠 합의를 체결하였다. 러시아의 이러한 약진에 영국은 불만을 품었지만, 이베리아 반도 문제로 인해 강경한 대처를 하지는 못하였다. 영국의 파머스틴 외상은 러시아의 진출에 관망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러시아도 그들의 유리한 입장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온건한 정책을 취하였다.

3) 제2차 위기(1839년∼1840년)
오토만 제국 황제 마흐무드 2세는 1832년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였다. 결국 오토만은 자국 군대의 군사력을 과신하게 되었고 1839년 이집트 관할의 시리아를 공격하여 제2차 동방위기가 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는 오토만의 기대와는 정반대였고 6월 네시브 전투에서 이집트의 이브라함이 대승을 거뒀다.

4) 열강의 태도와 영국.프랑스의 대립
열강은 이런 사태에 대해 처음에는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1839년 7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로이센 5개국은 동방문제에 관해 자신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으며 자신들의 동의 없인 어떠한 결정도 하지 말 것을 오토만제국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곧 영국과 프랑스는 불화가 심해졌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이집트에, 영국은 오토만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 점령 이후 지중해로의 이익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알제-나일-시리아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패권을 묵인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제외한 런던조약이 체결되었고 알리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조약이 파리에 알려지자 프랑스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티에르는 영국이 예전의 나폴레옹에 반대했던 연합전선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알리는 프랑스의 지원을 믿고 4국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후 힘의 과시를 보인 영국의 압박으로 알리는 시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동방위기는 영국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의 우월한 지위는 일단 물러나고 유럽 전체가 오토만 제국을 감독하게 되었고 그 영토보전도 유럽 전체의 관심사가 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02 크림전쟁
1 전쟁 원인론
1) 성지관할 문제
크림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직접적 발단은 성지관할 문제였다. 로마 가톨릭의 보호국인 프랑스가 성지관할의 특권을 얻게 된 것은 18세기 중엽 오토만 제국과 체결한 일련의 영사재판 조약들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러시아도 그리스 정교에 관해 이와 유사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부터 양측은 여러 가지 종교의식을 둘러싸고 분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한 종교의식 차원의 사소한 문제는 아니고 당시 오토만 제국의 정치제도와 연결된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2) 프랑스의 성지관할 요구
프랑스가 그리스 정교에 사실상 부여된 성지관할권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추출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려는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터키 정부는 이 문제가 러시아의 근본적인 이익과 관계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에 프랑스의 지원을 배경으로 수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은 술탄의 결정은 러시아로서는 묵과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의 기득권 회복과 이에 관한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위해 1853년 2월 멘시코프를 특사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프랑스는 해군을 출동시켰고 러시아는 다뉴브 공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점령을 선언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오토만 정부는 드디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해 크림전쟁이 발발되었다. 그러나 크림전쟁을 단순한 종교전쟁으로 보는 견해는 극히 드물다.

2 전쟁으로 가는 외교
1) 러시아의 최후통첩(1853년)
러시아는 곧 오토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통첩에서 러시아는 8일 이내에 멘시코프의 5월 20일자 요구를 수락치 않으면 러시아군은 국경을 넘을 것이라고 오토만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실제로 국경을 넘어 다뉴브 공국들을 점령한 것은 7월 초의 일이다. 영국의 여론도 악화되었고 내각 역시 주전론으로 채우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해군을 지중해에 파견해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2) 열강의 태도
나폴레옹 3세의 동방진출로 인해 문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과 공동보조의 정책을 취했다. 오스트리아는 가장 평화를 희망한 국가이다. 오토만 제국의 현상 유지를 통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오스트리아는 동방문제로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있었다. 동.서 어느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 오스트리아의 동남 국경지대인 발칸 반도가 주 전장이 될 것이며 그럴 경우 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참화를 입게 될 것이다. 당시 동방문제에 대해서 오스트리아 정책을 따르는 것은 프로이센의 입장이다.

3) 오토만의 최후통첩(1853년)
러시아가 오토만에 최후통첩을 보낸 5월 31일 바로 그날 니콜라이 1세는 프랑스 대사 카텔 바자크에게 나폴레옹 3세에 직접 서한을 보내 중재에 나서 줄 것을 부탁하였다.

4) 빈 각서(1853년 7월 28일)
니콜라이 1세의 중재호소에 나폴레옹 3세는 6월 하순에야 반응을 보여 중재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중재 초안을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발송했으며 러시아의 동의도 받았다. 각서는 애매모호한 문구로 작성됐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다.
역시 러시아는 이 빈 각서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오토만 정부도 유보 없이 수락해야 된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수락하였다. 오토만 정부는 그리스 정교에 관한 특권과 면제는 차르의 적극적인 갈망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술탄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수정했다. 러시아의 수락이 무효가 되었고 빈의 평화노력은 실패하였다.
5) 오토만의 전쟁 선언(1853년 10월 4일)
영국은 또 9월 하순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내놓은 소위 올뮈츠 제의도 기만이라고 일축하였다. 이젠 이런 제안이 수락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민의 안전을 구한다는 구실로 해군에게 해협으로 진입토록 명령하였고 오토만은 드디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3 전쟁과 외교
1) 전쟁과정과 시노페 사건(1853년 11월)
크림 전쟁은 특이한 전쟁이었다. 1853년 2월 멘시코프 특사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위기가 조성된 지 8개월이나 지나서야 오토만은 전쟁을 선포하였다. 위기가 조성된 지 근 13개월 이상이 경과돼서야 전투가 개시되었다. 발칸이 주전장이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가 가장 두려워 한 것도 이 점이었다. 결국 크림반도가 주전장이 되었다. 러시아의 흑해 함대는 처음에는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였다. 이런 태세에 변경을 가져오게 한 것이 11월 30일에 있었던 시노페 사건이었다. 시노페는 세바스토폴 맞은 편에 위치한 오토만제국의 군항이었다. 오토만제국의 함대가 코카시아 전선에 군수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흑해로 진출하자 러시아 함대가 터키함대를 추격하고 섬멸시키고 포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여론은 반러시아로 비등하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흑해로 진출하게 되면서 러시아와의 국교도 단절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오토만과 동맹을 체결하게 되자 러시아는 다뉴브를 넘어 오토만 제국의 영토에 진입하게 되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2) 오스트리아의 태도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결정하게 되자 오스트리아의 향방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동.서 어느 편을 택하느냐 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토의하고 있을 때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은 쉽게 결정되었다.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한 오스트리아는 특히 외상인 부올의 주장에 따라 서방을 택하고 러시아에 대결한다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양국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적대관계가 지속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드디어 1854년 12월에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1855년 1월 사르디니아가 1만 여명의 병력을 크림 반도에 파견해 전쟁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 프랑스, 오토만, 사르디니아가 실제 전투에 참여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참전도 시간문제인 상태였다.
3) 빈 4개 조항(1854년 8월8일)
오스트리아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기 전에 영국, 프랑스의 전쟁 목적에 입각해 다시 한번 러시아와 평화교섭을 시도하였고 하였다. 영국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교섭을 하였고 그 결과로 이른바 빈 4개 조항이 나왔는데 이것이 훗날 평화 교섭의 골격이 되었다. 러시아는 전세가 불리한 상태에서 무조건 수락하였고 영국은 러시아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가혹한 내용이 아니어서 불만을 표출하였다. 1855년 3월 15일에서 6월 4일까지 빈에서 개최된 회의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회의였다. 전세가 유동적이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승리에 입각한 평화교섭을 바라기 때문이다.

4 파리 강화회의
1) 열강의 대표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토만, 사르디니아의 교전국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대표들로 구성된 파리 강화 회의가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은 크림전쟁 중 국외자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파리 회의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다.

2) 회의의 결정들
① 흑해의 비무장
② 코카시아 지방의 문제
③ 베사라비아 문제
④ 다뉴브 공국들의 지위
⑤ 다뉴브 강의 자유 운행
⑥ 해협 문제
⑦ 올란드의 비무장
⑧ 오토만의 영토보전과 독립의 보장
⑨ 오토만의 유럽 공법질서에의 편입
⑩ 해양법 관계
⑪ 이탈리아 문제
3) 의의
1815년 이후 유럽 열강들은 처음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크림 전쟁은 곧 있게 될 이탈리아 통일이나 독일 통일에서 보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전쟁은 물론 아니었다. 크림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는 러시아였다. 흑해 비무장 조항은 특히 치명적인데, 1870년까지 전쟁 피해 복구에 국력을 소모하였고 1871년에 와서야 비무장 조약은 무효화되었다. 오스트리아도 많은 것을 잃은 국가가 되었다. 전쟁 중에 보인 이기적인 외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전후에는 열강으로부터 소외당했다. 영국은 진정한 승리자였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승리라고 할 만하다. 프랑스는 열강에게 위구심만 심어 놓았다. 사르디니아는 이탈리아 문제를 열강에게 각인시켰다. 프로이센은 어부지리로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다. 크림전쟁은 러시아에 대한 예방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이런 점에서 최초의 러시아 봉쇄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전쟁은 또 최후의 전통적인 전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탈리아의 통일도 독일의 통일도 그리 쉽게 가능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핵심 체크 사항
1) 크림전쟁의 지정학적 의의 (우크라이나 관련)
우크라이나 위기(Ukraine Crisis)를 계기로 크림반도가 2014년 3월 러시아에 병합된 지 3년이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 지역에서 강대국의 핵심이익(vital interest)의 작용으로 영토의 변경이 이루어진 사례로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원래 영토와 국경의 변경은 1, 2차 세계 대전 등 주로 전쟁을 치른 뒤에 나타난다. 그런데 위의 경우는 우크라이나 땅이었지만 우크라이나 내 분위기 국면을 틈타 러시아가 크림반도 거주민의 투표를 통해 병합해 버린 것이다. 당연히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으며, 그 여파로 당시 오바마 미 행정부와 푸틴 러시아 행정부 간 관계는 최악의 갈등상태로 전개되었다. 아직까지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새로이 출범한 미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의향을 비치고 있고, 러시아 역시 제재의 피로감과 후유증을 극복할 필요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그 귀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2) ‘크림병합 vs. 對러 제재’
우크라이나 위기의 발단은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는 EU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완충국가(strategic buffer state)에 해당된다. 1989년 동유럽 체제전환 이후 EU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놓고 전략적 경쟁을 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는 양자 사이에서 뚜렷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였다. 그 와중에 2013년 11월 친러파 야누코비치(Yanukovych)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EU와의 FTA 협상을 중단한 것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인해 100 여명이 사망하는 유혈충돌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2014년 2월 21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의회에서 탄핵되었고, 이틀 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로 도피한 가운데 투르치노프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출범하였다. 동년 5월에는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친서방 성향의 포로셴코가 당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다고 간주해왔으며, 서방에 대한 자국 방위의 보루로서 생각해 왔다. 그렇지 않아도 2004년 발생한 오렌지혁명(orange revolution)을 미국과 서방측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와중에 우크라이나 위기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나름대로의 대응을 취한 것이다. 2014년 3월 16일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공화국의 분리 독립선거가 치러지고(찬성 96.8%), 3월 18일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의 병합 조약서에 서명함으로써 크림반도 병합이 현실화되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크림반도는 소연방 시절 흐루시초프가 선물 주듯 우크라이나에 귀속시킨 것으로, 거주민이 원한다면 다시 가져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3월 21일 러시아 상원의원 155명이 만장일치로 크림공화국 병합 법률안을 통과시키고 푸틴이 서명함으로써 법률적으로 크림병합을 완료하였다. 크림병합 이후 푸틴 대통령의 국민적 지지는 70~80% 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내적으로 애국주의 열풍이 크게 달아올랐다. 크림반도 병합에 대한 러시아 내 정서와 분위기가 어떤지 알 수 있다. 반면에 미국과 서방측은 비록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자치 독립 선거과정을 거쳤지만,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법적 타당성을 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는 합법성을 주장하나, 서방측은 부다페스트 협정과 유럽안보회의(CSCE) 헬싱키 최종의정서를 위반한 것으로 주장하는 등 이견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강대국 러시아가 실제 행동으로 타국의 영토를 병합함으로써 폴란드, 체코, 발틱 3국 등 러시아 주변국들에게도 커다란 안보적 우려감을 던져주었다. 심지어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와 가까운 독립국가연합국가들도 내면적으로 우려와 경계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위기가 초래한 크림병합 문제는 주요 강대국들 간 ‘새로운 국제규범’ 설정과 향후 질서 재편 향배를 둘러싼 전략적 경쟁 모습을 담고 있다. 그 중요성을 보여주듯 아직까지 국제법, 국제규범 위반을 둘러 싼 서방과 러시아간의 힘겨루기와 이견은 지속되고 있다. 보다 큰 시각으로 보면 이는 1945년 2차 대전 종결 이후 형성된 전후 질서를 변경하는 사안에 해당된다. 미국과 EU의 입장에서 이는 결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對러 제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년이 흘렀지만, 對러 제재는 연장의 연장을 거듭해 현재까지도 시행중에 있다. 지금은 비록 민스크 협정에 의해 일시적으로 봉합된 상태이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간간히 군사적 충돌도 발생하는 등 아직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종합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는 2차 대전 이후 강대국의 핵심이익이 충돌한 사례로 영토 병합이 이뤄졌으며, 동유럽, 유럽의 안보 지형 변화, 미.러, EU.러시아 관계 악화 등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파급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5 국제정치적 함의와 시사점
1.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동유럽 국제질서 재편 향배의 가늠자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고 있듯이 탈냉전 이후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은 NATO와 EU에 가입하는 등 서방측 편에 서서 국가발전을 이루려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러한 환경 하에 크림반도 병합 이후 우크라이나의 포로셴코 정부는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친서방 정책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유럽지역은 NATO의 東進과 브렉시트(Brexit)가 이뤄진 EU, 미국의 동유럽 MD구축과 이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 대응, 난민 유입 문제 등의 주요 현안들이 정세 불안요인으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환경 하에 크림병합은 역내 질서 향배에 중요한 영향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새로운 국제정치 실험대로 탈냉전기 국제위기 해법의 시금석이라 볼 수 있다. 즉 주요국 ‘핵심이익’ 사안의 군사 분쟁화 또는 외교적.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글로벌 복합적 상호의존(complex interdependence) 상태에서 주요국간 국제현안의 위기 해결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과연 앞으로 크림병합을 둘러싼 여러 갈등 사안들을 유관국들이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점은 과연 트럼프 행정부가 對러 제재를 어떻게 풀어 가는가하는 점이 실험대의 첫 관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소위 超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Hyper-Uncertainty)로 지칭되는 현 국제정세가 앞으로 안정과 협력을 일궈내는 방향으로 나아갈 지 아니면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게 될지, 세계는 지금 중차대한 국제질서 재편의 변곡점에 서있다.
3.무엇보다 위기의 근원은 우크라이나가 먼저 제공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초의 원인 제공은 우크라이나 자체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친러와 친서방 사이에서 현명한 전략적 좌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좌고우면의 태도, 국민통합을 이끌어 내지 못한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가역량의 결집과 국가발전을 위해 사회.국민통합, 올바른 리더십, 현명한 전략적 선택 등의 요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적으로 일깨워 주었다. 국제무대는 국가생존과 국익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고, 양보가 없는 무한경쟁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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