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현상 (권위, 지배, 무력, 기술)
하인리히 포피츠 | 진인진
40,500원 | 20250901 | 9788963476360
본서는 독일어권에서 사회학, 정치학에 있어서 필수 도서라고 간주되는 하인리히 포피츠가 저술한 Phenomene der Macht (1992, 제2판)의 완역이다. 저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실존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칼 야스퍼스 문하에서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역사 철학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후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 등에서 사회학과 사회철학 분야의 교수직을 역임하였는데, 산업 사회학과 사회철학 등의 분야에 있어서 전후 독일의 가장 독창적인 학자로 정평이 높다. 그는 또한 한나 아렌트의 아주 친밀한 친구로도 알려져 있다.
본서는 그간 독일어권에서는 정치학 및 사회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핵심 필독서로 사용되어 왔는데, 권력을 분석함에 있어서 “통찰력의 진정한 보고”(Harrington 2018)라고 하여도 절대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독창적인 통찰로 가득차 있는 본서의 각 문장은, 마치 영미권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분석의 엄밀함과 정교한 논리도 동시에 수반하여 많은 학자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본서는 유럽에서의 민족지학적이며 인문학적인 전통과 역사적 접근법에 기반함과 동시에, 영미권 연구 전통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분석적 시각을 겸비한 명저이다(Harrington 2018).
그리고 본서는 권력에 대한 ‘철학적 인류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의 백미(白眉)로 알려져 있으며, 전후 독일에서의 권력론에 있어서 루만(Luhmann)의 권력론과 함께 가장 중요한 두 권의 저서로 손꼽힌다. 이때, ‘철학적 인류학’이란 영미권에서는 다소 생소한 분야로서, 다양한 인류학적 현상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구조와 조건을 탐구하는 분야이다. 이는 칸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후에 막스 쉘러(Max Scheler), Helmuth Plessner,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 그리고 본서의 저자인 포피츠에게 계승되어 왔다.
본서는 권력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라는 인류학적 전제하에, 막스 베버의 전통과 권력과 지배에 관한 마르크스적 통찰, 개인성에 대한 짐멜의 통찰 및 실존주의적 요소를 반영하여, ‘사회적 삶의 핵심적 단면으로서 보이는 권력 현상’을 분석한다. 동시에, 구조 내지는 거시적 관점에서 권력을 분석할 때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인간의 심리를 통한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대한 분석과 실존주의적 관점을 그의 권력 이론 체계에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일찍이 막스 베버가 ‘권력’은 ‘무정형적’(amorph)이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의 구체적 분석을 멈추고, 동시에 ‘지배’(Herrschaft)를 좁은 범위의 유형으로만 한정시킨 것을 극복하고, 권력이 ‘관철되는 방식’, 즉 상대에게 권력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행되는가에 따라 권력을 구분하여 정형화시키고 있다. 이는 권력론에 있어서의 또 다른 고전이며 본 역자가 2024년에 번역 출판한 바 있는 스티븐 룩스의 『권력이란 무엇인가』가 권력을 의식으로부터 은폐되는 정도에 따라 1차원, 2차원, 그리고 3차원적 권력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는 점과 대비된다. 하지만 양자는 동일한 현상에 대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케이크 자르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크게 보완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간의 권력에 대한 서적들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은 외면한 채, 정의(定義)가 결여된 단지 모호하고 피상적인 권력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는 통속적인 ‘처세술’ 서적뿐만 아니라 『권력과 진보』(대런 아세모글루 저)와도 같은 소위 노벨상 수상자의 저서들도 예외는 아닐 듯하여 개탄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본서에는 그러한 소위 ‘유명한’ 저술들의 오류와 한계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는 통찰이 담겨져 있다.
특히 ‘무력’과, ‘인정’에 의한 ‘권위적 권력’의 발생과 유지에 대한 그의 통찰은 무력과 권위에 대한 후대의 각종 논문과 저술에서 빠짐없이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서에서 등장하는 세 개의 에피소드(제8장)도 독일의 교과 과정 및 논문에서 아주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또한, 그의 ‘데이터설정 권력’에 대한 분석은, 쇼샤나 주보프(Zuboff, S)의 저술과 더불어, 현대 디지털-인공지능 시대의 권력을 분석하기 위한 유용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본서는 영미권에서는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본서의 영문 번역이 2017년에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서의 영문 번역본이 출판된 2017년 이후에는 영미권에서 수많은 서평이 유수 저널에 게재되었고, 향후 영미권에서 본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지속될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본서는 한국의 학계 및 독자들에게는 아직까지는 지명도가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단, 서울대학교 박상섭 교수는, 포피츠에 의하여 지대한 영향을 받은 폿지(Gianfranco Poggi)에 대한 논문에서, 본서에서의 포피츠의 권위에 대한 분석은 “권력의 개념이 대단히 명료하게 제시된 글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사회학적 논의에 관심 있는 학도들에게는 필독의 글로 여겨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박상섭 2015: 223). 반면, 다수의 독자들의 경우, 하인리히 포피츠라는 저자의 이름 자체는 이미 황태연 교수에 의하여 번역된 저자의 또 다른 명저인, 청년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저서(포피츠 2009; 2023)를 통하여 이미 친숙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본서는 본 출판사와 역자가 공동 기획한 권력과 지배 시리즈의 네 번째 출판물이기도 하다. 시리즈의 첫 번째인 프리드리히 폰 피저의 『권력의 법칙』은 역사를 권력의 형성과 운행으로 설명하는 통시적 대서사시이다. 시리즈의 두 번째 번역인, 프레데리크 로르동의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은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를 결합하여 자본주의하에서의 임노동관계를 분석하면서 자발적 예속을 가능하게 한 미시적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세 번째는 권력론의 불후의 현대적 고전으로 알려진 스티븐 룩스의 『권력이란 무엇인가』로서, 그간의 권력에 대한 논의를 집대성하고 있는데, 권력을 그것이 은폐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서 분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서는 권력을 그것이 관철되는 방식에 따라 분류하고 미시적으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 네 권의 저술들은 물론 그 통찰에 있어서 많은 부분 중복이 존재하지만, 그 분석 방법과 대상에 있어서는 상호 보완적이기에, 독자들에게는 권력 현상을 이해함에 있어 풍부한 내용과 통찰을 제공한다.
따라서 그 네 권의 저술을 통하여 얻은 지식을 인문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할 때, 현실에서 감추어있는 권력과 지배관계를 파악하고 극복함으로써, 신자유주의자들의, 지배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허상으로서의 자유가 아닌, 지배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는 길로 향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