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김나영 | 부크크(Bookk)
0원 | 20161206 | 9791127207335
"’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집필을 시작하며.
한국사회는 분노의 영혼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경제 침체로 인한 박탈감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미디어와 전문가들이 심리적 불안의 원인이 개인과 사회적 수준의 경제 문제에 기인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이 얼마나 부정적인 감정에 취약한지 분석한 연구나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OECD 자살률 1위가 5년 만에 달성된 최단기간 수치이고, 부부간 범죄, 애인 간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인의 저변이 이토록 황폐한가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 나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분노’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인의 마음 구조,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역사, 사회, 제도적 요소들을 사회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고민해 보려고 한다.
우선 한국 사회가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에 취약한 원인 중 하나는, 우리가 ‘한’(恨)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문화이론가 엠마누엘 페스트라이쉬가 지적했듯, 한국인의 정서 저변에는 5000년 묵은 가난에 대한 피해 의식이 자리 잡혀 있다. 게다가 한국인의 심리 이면에는, 아직까지 좀처럼 가시지 않은 조선 시대 사회의 신분제적 감성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지도자에 대한 과도한 존경심 혹은 과도한 분노, 직장에서의 폭력과 왕따 문제, 부당 대우, 노조의 집단행동 등과 같은 요소들에는, 지배자층에 대한 의심과 불안 요소가 개진돼 있다. 이를 가리켜 이 책에서는 한국인의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고 본다. 과거에 살아왔던 모습이 체제에 대한 분노, 부정적 감정, 자신의 삶에 대한 비관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므로, 유교사회답지 않은 우울감과 원망이 사람들의 마음 저변에 자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한국인의 ‘일’과 관련된 생태계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근로자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 표준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의 장이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고도성장기를 지나면서 한국의 직장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그림자가 겹쳐 나타나고 있다. 인간과 경영에 대한 관점이 혼재되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성보다는 효율성과 반복성을 추구하는 테일러리즘, 한 사람의 생각과 행복을 중시하는 심리학 주의, 모든 조직 의사결정은 정해진 룰과 합리적인 기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구성주의 등과 같은 패러다임이 얽히고 설켜서 한국의 직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특정 조직 참여자들이 직면한 환경이 복잡할수록, 사람들은 그 혼효(混淆)된 구조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내정치’의 피해자가 되거나, 흔한 ‘직장 왕따’ 또는 ‘은따’의 대상이 되어 사실상 조직 구조 속에서 영원히 소외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은 많지 않고, 직장의 현실을 어떻게 하면 시스템적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기능주의적 처방이 득세하는 상황이다.
한국인의 ‘사랑’관도 집단 우울감과 부정적 감정에 한 몫 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사랑은 획득되는 자원에 가깝다. 서구의 그것보다 속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작위성(作爲性)이 극대화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한다. 한국인의 사랑 행위는 일종의 사회 생활이다. 기본적으로 연인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내 삶 깊숙이 들어 온 이질적 행위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행동과 말 저변에 담긴 복잡 다양한 시선들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나의 행동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반영된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한 사람의 감정 표현을 구속해 왔던 유교 문화, 고도 경제 성장 이후 물적 가치에 따라 인간의 지위를 평가하는 습관, 최근 거대한 산업으로 부상한 연애 관련 컨설팅 산업 및 미디어 등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들의 연애가 그들만의 사랑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입체화된 사랑의 모습이 되면서, 사실상 감정적 피로가 극심해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일’과 ‘사랑’에서 비롯된 부정적 감정이 발현되는 데에는, 집단의 행동을 조직화하고 확산시키는 미디어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역시 미디어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항상 사회공익적인 방향으로 특정 현안에 대한 콘텐츠를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됨을 부인키 어렵다. 특히 정치, 경제적으로 덜 민감하되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일상과 관련된 이슈일수록, 더욱 자극적이고 단발적인 키워드를 뽑아왔던 것도 상당히 큰 문제점이다. 미디어의 이러한 보도 태도는 정치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대중들이 어떤 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상을 조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소비하듯, 심리를 발산하듯 관찰하게끔 유도하게 된다. 특히 스마트폰 생태계가 자리 잡히면서 생각하지 않고 특정 현안에 반응케 하는 구조가 확산되고 있다. 쉽게 말해, 사회 이슈에 대해 화내기 좋고 짜증내기 편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일, 사랑,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미움’을 집단 감성의 관점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 마이닝과 갖가지 사회심리적 분석 방법론을 바탕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의 그림자와 그 양상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그리고 일상 생활의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왜 한국인이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그 해법은 무엇인지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은 필자에게 하나의 마침표이자 쉼표다.
집필 기간 동안 사랑하는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어려움과 슬픔의 마침표.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상을 이제 막 시작하는 쉼표,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줄 모든 이들에게
글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6년 가을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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