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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록"(으)로 8개의 도서가 검색 되었습니다.
9788964062180

사변록 (思辨錄 (천줄읽기))

박세당  |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
0원  | 20111130  | 9788964062180
▶《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사변록』은 사서(四書)와 '상서', '시경'을 박세당 나름으로 주해한 것으로, 이 책에서는 '대학' 편과 '중용' 편을 집중적으로 발췌했다. 박세당은 기존에 널리 통용되던 학설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거의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주자와 정자의 견해까지 과감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펼쳐나간 용기 있는 학자의 당당한 해석을 만나볼 수 있다.
9791173078286

원서발췌 사변록

박세당  | 지식을만드는지식
13,320원  | 20250228  | 9791173078286
사서(四書)와 ≪상서≫, ≪시경≫을 박세당 나름으로 주해한 것으로, 이 책에서는 <대학> 편과 <중용> 편을 집중적으로 발췌했다. “주자가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을 나누어 두 단(段)의 공부로 삼은 것은 그 근본을 이미 잃은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박세당은 기존에 널리 통용되던 학설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거의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주자와 정자의 견해까지 과감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펼쳐나간 용기 있는 학자의 당당한 해석을 만나볼 수 있다.
9791173078293

원서발췌 사변록(큰글자책)

박세당  | 지식을만드는지식
27,000원  | 20250228  | 9791173078293
사서(四書)와 ≪상서≫, ≪시경≫을 박세당 나름으로 주해한 것으로, 이 책에서는 <대학> 편과 <중용> 편을 집중적으로 발췌했다. “주자가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을 나누어 두 단(段)의 공부로 삼은 것은 그 근본을 이미 잃은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박세당은 기존에 널리 통용되던 학설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거의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주자와 정자의 견해까지 과감하게 비판하고 있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펼쳐나간 용기 있는 학자의 당당한 해석을 만나볼 수 있다.
9791190727518

박세당 사변록 연구

김형찬  | 태학사
28,800원  | 20201230  | 9791190727518
조선 후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꽃핀 학자적 양심, 서계 박세당의 『사변록』에 관한 최신 연구 성과의 집성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계의 반대 입장에 서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독자적 견해를 주장했으며, 학풍과 사상 연구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강조했던 인물이다. 그의 대표 저작인 『사변록(思辨錄)』은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 『시경』을 주해한 책으로, 그중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사서(四書)에 관한 주석이다. 특히, 『대학』과 『중용』에 역점을 두었는데, 박세당은 종래의 권위를 가지고 정통으로 여겨 오던 주자의 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해석을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정계와 학계에 큰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그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던 문제적 인물이었다. 서계 박세당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성과들이 다양한 책으로 출간되어 왔다. 특히 실학에 대한 연구가 한국학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받으면서, 그 선구자로서 박세당의 업적이 조명되고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이 책은 서계 박세당의 주요 저작인 『사변록』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를 집성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학술계의 연구가 하나의 저작물인 『사변록』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이었다면, 이 책에 담긴 논문들은 『사변록』에 수록된 개별 경전 관련 내용에 대한 연구 성과라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즉 『사변록』에 대한 연구가 좀 더 분화되어 점점 더 구체화되고 세밀해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앞으로의 『사변록』 연구 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은 ‘서설’, ‘사서부’, ‘삼경부’, 이렇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설에서 김형찬 고려대 교수는 박세당을 둘러싼 ‘사문난적 논란’ 그리고 ‘사서의 재해석’에 관해 논의한다. ‘사서부’에서 이영호 교수는 서계의 『대학』 해석이 비록 주자학적 한계가 내재하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논리의 힘으로 탈주자학적 사유를 지향했음을 밝히고, 강지은 교수는 ‘주자학으로써 주자주(朱子註)를 수정한 저술’이라고 『대학 사변록』을 새로이 정의하고 있으며, 김태년 연구원의 「『사변록』 저술 동기와 『대학』 본문 재배열 문제에 대한 검토」, 한재훈 교수의 「『대학 사변록』에 나타난 박세당의 ‘격물치지’ 해석과 주희 비판의 성격」은, 두 논문 모두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거나 ‘탈/반 주자학자’로 평가할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김용흠 교수는 박세당의 ‘겅세(經世)’ 지향 학문관에 관하여 논하고, 신창호 교수는 『중용 사변록』의 학문적 특징을 밝히고 있으며, 김용재 교수와 정일균 교수는 『논어 사변록』에, 함영대 교수는 『맹자 사변록』에 나타난 박세당의 사상을 고찰한다. ‘삼경부’에서 이희재 교수는 『상서 사변록』의 특징을 중심으로 논하며, 중국의 부성성 교수는 『시경 사변록』의 성격과 해석 방법 등을 고찰한다.
9788924056389

박세당의 유교철학 비판, 사변록 3, 제3장 논어에 대한 비판

박세당 지음(탁양현 옮김)  | 퍼플
11,000원  | 20180811  | 9788924056389
周遊天下의 여행자 孔子의 論語와 思辨錄 孔子는, 흔히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석가’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석가’나 ‘예수’가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인 데 비해, 孔子는 동아시아 문명을 대표하는 人文學者다. 후대에 그의 철학사상이 儒敎로서 종교적 형태로 정립되지만, 그는 오래도록 政治家로서의 立身揚名을 도모하였고, 직접 정치를 행한 시절도 있다. 하지만 결국 공자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대체로 공자가 현대 중국의 先祖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별다른 역사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실상 공자는 東夷族의 문화권인 魯나라 사람이다. 노나라(기원전 1046~기원전 256)는 지금의 ‘취푸’市에 위치한 나라로서, 周나라 ‘武王’이 아우인 周公 ‘旦’에게 내린 봉토를, 그의 아들인 ‘伯禽’에게 다스리게 하던 제후국으로 주나라의 혈족국가이다. 春秋時代 초기, 노나라는 동방의 강국으로서, 은공, 환공 시대(기원전 722~기원전 694)에 여러 번 齊나라, 宋나라 등과 싸워서 이겼고, 또 杞나라, ?나라와 같은 소국에 부단히 침공했다. 춘추시대 중기에 사회가 변혁하여, 정권은 귀족 대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기간 실권을 장악한 ‘주요’는 노장공의 세 아우 계우, 숙아, 경보의 자손으로,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三家라 했다. 혹은 저희가 모두 노환공의 후예이므로, 三桓이라 했다. 곧 소위 ‘정재대부’다. 노나라는 西周의 예법과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한 나라 중 하나로, 다만 당시 형세의 영향으로, 일련의 변혁활동을 전개했다. 춘추 말기, 노소공이 삼가에게 쫓겨나, 객사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삼가의 가신 ‘양호’ 등이 국정을 전제하여, 한때 ‘배신이 국명을 쥐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노정공 시대(기원전 509~기원전 495), ‘양호’ 등은 실패하여 출분하고, ‘삼환’이 다시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여, 후의 ‘애공’(기원전 494~기원전 468 재위)은 군권 회복을 도모하여, 삼가 대신들과 충돌이 극해져 마침내 월나라로 망명해 죽었다. 전국시대 초기, 약 원공 시대(기원전 436~기원전 416), 삼환은 점차 세력을 잃고 쫓겨나, 목공(기원전 415~ 기원전 383) 이후, 정권은 다시 국군의 손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전국시대 힘이 이미 쇠약해, 자주 제나라의 작전에 함께했다. 전국 말년, 초나라가 진나라의 핍박을 받아 동천하면서, 노나라를 공벌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56년, 초나라는 노나라를 병탄하고 경공을 폐출하자, 노나라는 멸망했다. 한 평제 시기에는, 경공의 8세손 공자 관을 포로후로 봉하고, 주공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공자 관이 죽자 시호를 ‘절’이라 하고, 그 아들 공손상여가 습작하게 했다. 왕망이 신 왕조를 세우고, 또 공손상여의 후예 희취를 포로자로 봉했다. 東夷는 중국 동북부지방과 한국 · 일본에 분포한 종족을 중국인이 부르던 명칭이다. 은나라 때는 人方이라는 夷族 집단이 있었고, 竹書紀年을 비롯한 先秦時代의 문헌과 금석문에서 ‘동이’를 뜻하는 다양한 명칭이 발견된다. 여기에 표현된 이족과 동이족은 산둥성 · 장쑤성 북부 일대에 거주한 족속을 말한다. 이들은 단순한 異民族이 아니라, 뒤에 중국민족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箕子나 孔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漢나라 이후 쓰여진 史書에 나오는 東夷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였다. 漢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東夷 · 西戎 · 南蠻 · 北狄이라 불렸는데, 동이는 바로 동쪽에 있던 종족을 가리킨 말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하략-
9788924056372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4, 제4장 맹자에 대한 비판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퍼플
13,900원  | 20180811  | 9788924056372
9788924056396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2, 제2장 중용에 대한 비판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퍼플
9,800원  | 20180810  | 9788924056396
- 상략 -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협상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외상대리 ‘사이온지(四園寺公望)’와 러시아 공사 ‘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4일자로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朋)’를 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Rovanov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전차 · 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 · 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 세력에 대한 친러 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국왕의 무능 · 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국제정치의 현장에는 敵도 없고 同志도 없는 법이다. 다만 자기가 소속된 집단공동체의 이익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개인관계에서도 名分이나 義理가 별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無法律의 국제정치에서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니 국제정치에서는 國益이야말로 가장 시의적절한 中庸이라고 할 것이다.
9788924056075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1, 제1장 대학에 대한 비판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퍼플
9,200원  | 20180809  | 9788924056075
朴世堂의 儒家哲學 비판, 思辨錄 朴世堂(1629~1703)의 삶의 歷程을 살피다 보면, 어쩐지 前代 李卓吾(1527~1602)나 後代 丁若鏞(1762~1836)의 삶이 overlap된다. 그들은 모두 시대와 不和한 流配旅行者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當代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가철학에 대한 否定에서 기인한다. 獨尊儒術이라는 표현처럼, 유가철학은 사상적 부정이나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그저 斯文亂賊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은 人類史에서 작동하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철학사상에 공통한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독재주의, 친미, 친중, 친일, 반미, 반중, 반일, 종북, 보수, 진보 따위의 온갖 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이 뒤어켜 泥田鬪狗하고 있다. 그러한 이전투구의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生存의 利得’이다. 인간존재로서 생존을 위해 전쟁마저도 不辭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러한 생존을 넘어서는 이득을 목적케 되면, 이제 그 가혹함과 집요함은 상상을 초월케 된다. 그러한 사례는 인류의 역사가 ‘생존의 이득’을 위한 전쟁의 역사라는 史實로써 쉬이 검증된다. 박세당의 시대는 國內政治의 시대였다. 그러다보니 ‘생존의 이득’의 명분이라는 게 기껏해야, 예컨대 上服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의 문제 따위를 빌미 삼아 상대편을 處斷키도 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당최 납득되지 않을 수 있지만, 주자학적 禮治를 이데올로기 삼는 당시에는 마땅히 문제될 수 있다. 더욱이 그 裏面에는 조선왕조의 政權을 左之右之하는 黨派의 문제가 얽혀 있다. 1년을 택하느냐 3년을 택하느냐에 따라 목숨의 與奪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적 올바름’은 현대사회의 ‘정치적 올바람’에 비견될 수 있다. 흔히 PC라고 지칭되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의미한다. PC운동의 ‘Political Correctness’는 흔히 ‘정치적 匡正’, ‘정치적 공정성’, ‘정치적 올바름’ 등으로 번역된다. 문화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인종, 성, 성적 지향, 종교, 직업 등에 대한 차별이 느껴질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더불어 차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곧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주창하면서,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근거한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 잡으려는 운동이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주장이 그릇될 리 없다. 응당 어느 누구라도 차별당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월 안에서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은 또 하나의 새로운 권력으로서 가혹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런 것이 인류사회의 권력이 지닌 기묘함이다. 그러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불화한 탓에, 이탁오, 박세당, 정약용 등은 죄다 자의든 타의든 유배적 은둔의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그런 박세당의 시대에 비한다면, 21세기는 國際政治의 시대다. 국제정치를 조작하는 ‘Great Game’의 양상은 실로 복잡하며 복합적이다. 그러다보니 21세기에는 당최 은둔할 수 있는 시공간마저도 不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내정치의 경우에도, 21세기 한국사회의 상황을 볼 때, 박세당의 시대에 비해 별반 나아진 게 없다. 保守는 이미 낡아버렸고, 進步는 이미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보수세력이 유가철학 흉내를 내더니, 진보세력이 執權하고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제 진보세력 역시 유가철학 흉내를 내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며, 곪은 종기는 결국 터지기 마련이다. 보수가 그러했듯 진보 역시 이내 고이고 곪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인 탓에 역사의 本性的 日常이다. 다만, 그런 시대 이데올로기와 불화하여 비판하는 자는, 결국 이탁오, 박세당, 정약용 등과 유사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 하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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