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법해 | 메타노이아
23,400원 | 20250921 | 9791198967541
불교인식 논리학에는 사구부정(四句否定)이라는 논증방법이 있다. 이것은 존재에 관해서 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몇 번이고 부정을 거듭하여 유와 무의 견해를 명백하게 해 주는 해체의 논리이자 변증법적 문답법이다. 사구분별(四句分別) 혹은 사구비판(四句批判)이라고도 한다. “사구(四句)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네 가지 방향의 판단을 의미한다. 그 어떤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네 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제1구, ‘이다, 있다(有)’라는 긍정(정립),
제2구, ‘아니다, 없다(無)’라는 부정(반정립),
제3구, ‘이기도 하면서 없기도 하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라는 긍정 하면서 부정하는 것(긍정종합),
제4구,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 라는 긍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 것(부정종합)
이다.
이 사구부정의 논리는 초기불교 아함경전(阿含經典)에 유래한다. 즉 붓다는 다음과 같은 14가지 질문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돕는 실천적 물음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질문이라 하여 침묵하였다는 것이 14무기이다. 이것은 시간·공간·자아·사후세계라는 4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다.
시간에 대하여
제1구,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
제2구,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제3구,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제4구,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공간에 대하여
제1구,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제2구,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제3구,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제4구,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자아에 대하여
제1구,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다.
제2구,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지 않다.
사후세계에 대하여
제1구,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제2구,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3구,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제4구,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시간·공간·자아·사후세계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네 가지 방향으로 판단되는데, 이 모두가 참된 판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14무기의 취지이다. 이러한 사구부정의 논리로 논리로부터의 해탈과 논리에 의한 해탈을 추구한 사상가는 용수이다. 그의 주저 『중론』 제1 「관인연품」 서두는 다음과 같은 사구로 구성된다.
제1구, [일체 존재는] 생성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제2구, [일체 존재는]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단멸하는 것도 아니다.
제3구, [일체 존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다.
제4구, [일체 존재는] 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
제1구는 일체 존재가 어디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생성한다는 판단과 생성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판단에 대한 부정이다. 제2구는 일체 존재가 영원히 소멸하지 않고 항상 머문다는 판단과 그 어떠한 존재도 순간적으로 소멸한다는 판단에 대한 부정이다. 제3구는 일체 존재는 하나 혹은 같은 것이라는 동일성에 대한 판단과 그 어떠한 존재도 다수 혹은 다른 것이라는 차이성에 대한 판단에 대한 부정이다. 제4구는 일체 존재가 운동하여 오는 것이라는 판단과 운동하여 가는 것이라는 판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구의 판단을 통해 일체의 존재는 생멸(生滅)·단상(斷常)·일이(一異)·래출(來出)이 불가능하다, 즉 일체가 공(空)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용수는 사구부정을 통해 운동을 부정한다. 『중론』 제2 「관거래품」의 서두이다.
제1구, 이미 간 것은 가지 않는다.
제2구, 아직 가지 않은 것은 가지 않는다.
제3구,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는
제4구,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가지 않는다.
이미 간 것은 이미 갔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 아직 가지 않은 것은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는 즉 이미 간 것은 이미 갔기 때문에 가지 않으며, 아직 가지 않은 것은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 이 둘을 떠나서 어떻게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갈 수 있는가? 존재의 실상은 무상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한 것을 간다, 가지 않는다와 같은 술어로 기술한다고 해도 그 실상을 언표하는 순간 어긋난다는 것을 용수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미 간 것은 시간으로 말하면 과거이며, 아직 가지 않은 것은 미래이며,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현재이다. 이미 간 것은 이미 갔기 때문에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직 가지 않은 것은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반은 과거이며 반은 미래이다. 즉 현재는 반은 이미 갔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으며, 반은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규정하는 순간, 논리적 모순을 범하기 마련이다.
이 사구분별은 과학적 명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근대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원자이다. 이 원자가 과연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최소단위인가? (원자를 분할하면 원자핵과 전자로 구분되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뉜다.) 이 물음에 대해 네 개의 판단이 가능하다.
제1구, 원자는 최소단위이다.
제2구, 원자는 최소단위가 아니다.
제3구, 원자는 최소단위이기도 하고 최소단위가 아니기도 하다.
제4구, 원자는 최소단위인 것도 아니며 최소단위가 아닌 것도 아니다.
제1구는 원자의 개념적 정의, 즉 분할 불가능한 최소단위를 긍정하는 판단이다. 제2구는 원자가 물질인 한 분할 가능하기 때문에 최소단위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는 판단이다. 제3구는 원자는 개념적으로는 최소단위이며, 실제적으로는 분할 가능하기 때문에 최소단위가 아니라고 하는 긍정종합판단이다. 제4구는 원자는 실제적으로는 분할 가능하기 때문에 최소단위가 아니고, 개념적으로는 분할 불가능한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최소단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부정종합판단이다. 요컨대 원자가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최소단위라고 하는 정립명제가 참임을 확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체는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