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2) (제2권 진(秦) 제국의 멸망)
유재주 | 퍼플
15,000원 | 20230215 | 9788924106329
이번에 선보이게 된 는 , , 에 이어 네 번째로 쓴 고대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은 그 유명한 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한 이야기로, 후한(後漢) 시대 말, 즉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가 배경이다. 는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로,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걸친 장장 550년간의 이야기다. 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는 의로운 자객들을 소재로 삼아 정리한 작품이다. 시대는 와 같으나 보다 심층적으로 인물에 충실할 수 있었다.
는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태어난 무렵인 전국시대 말기부터 시작하여(약 25년), 시황제와 2세 황제 호해(胡亥)의 통일 진(秦)나라 시대를 걸쳐(약 15년), 통일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가 서초패왕(西楚霸王)이 되는 과정(약 2년), 그리고 이에 승복하지 못한 유방이 반발하여 항우에 맞서 싸워 끝내는 천하를 재통합하는 과정(약 5년)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대적으로 볼 때 는 의 속편이자, 의 모태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시대 배경의 총 기간은 대략 50년. 그러나 실제로 유방이 거병하여 항우를 패망시키고 천하를 통합, 한(漢) 제국을 세울 때까지 걸린 기간은 7년이며, 순수하게 항우와 대립하여 싸운 기간은 5년에 불과하다.
이 시대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소설은 유방과 더불어 그의 맞상대인 항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혹은 항우를 더 비중 있게 다루거나 최소한 유방과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항우의 극명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기질과 행동, 그리고 극적이면서도 의연한 종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이 그러한 항우의 행적에서 참다운 영웅의 모습을 찾을 것이며,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과감히 항우를 뒷전으로 배치하고 유방을 단독 주인공으로 하여 전면에 내세웠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다. 오로지 유방이라는 인물이 지닌 특이성 때문이다.
유방의 특이성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결코 항우가 지니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선명함은 아니다. 내가 본 바로, 오히려 유방은 ‘성격이 없다’ 싶을 정도로 내세울 만한 특성이 없다. 한마디로 ‘무성격’이라고나 할까.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무성격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성격이 드러나는 ‘다중 성격자’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은 유방과 항우의 성격을 비교하기 좋아한다. 또 실제로 비교했다. 유방은 ‘사람됨이 어질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탁 트인 마음에 언제나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는’( ‘고조본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항우에 대해서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 한’( ‘항우본기’) 폭군 내지는 암군의 전형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미리 말하면, 유방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평민으로서 황제에까지 오른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이것만으로 보았을 때, 유방은 언뜻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능력’을 지녔거나, ‘남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후덕한 성품’을 갖춘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결코 ‘비범한 능력’을 지니지도 않았고, 또한 어질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거나, 탁 트인 마음을 지닌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남을 의심하기 좋아하며, 속 좁은 인물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역사서를 보면 이런 것을 증명하는 많은 행동을 유방은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그는 항우에게 쫓길 때 자신만 살고자 아들과 딸을 수레에서 떼밀어버리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역사가들은 유방을 어질고 후덕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최후의 승자라는 이점을 안은 평가임이 분명하다. 이번에 쓴 에서 나는 이러한 유방의 인간상을 과감히 깨뜨려 보았다. 그리하여 유방을 무뢰배에 가까운 시정 건달로, 그리고 자신의 이득과 편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막돼먹은 사람으로 그려냈다. 이것이 그 당시를 살아간 유방이라는 인물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방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애초 영웅적 기질이 농후한 항우보다는 일자 무식쟁이에 시정 건달로 반평생을 보낸 유방을 더 따스한 시선으로 보듬었다. 그 이유는 그가 최후의 승자였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상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더러울 때는 측근 부하들에게 욕설을 마구 내뱉고,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기도 하고, 그가 유달리 싫어했던 유생(儒生)들에 대해서는 갓을 벗겨 오줌을 싸는 모욕을 안겨주기도 했으며, 위기에 처했을 땐 무릎 꿇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며, 기분이 좋을 때는 마냥 너그러운 듯한 모습 등을 일절 가식 없이 보여주는―바로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사람이, 타고났다 싶을 정도의 영웅적 기질이 농후한 항우와 맞서 싸워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명 나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바람과 수수께끼를 나는 를 통해 재현해보고 싶었고, 그리하여 항우를 뒷전으로 내밀고 유방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렇다고 항우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 전개상, 그리고 역사 흐름상 항우는 유방에 맞서는 주인공급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다만, 항우라는 인물이 지녔을 내면의 세계를 유방만큼은 그려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나간 일이라든가 인물의 행적을 중요시하는 까닭은, 그것이 오늘을 비춰주는 거울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반드시는 아니지만―내일의 모습을 알려주는 예언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새롭게 흘러가면서도, 또한 거의 새로운 것이 없다. 과거의 것에서 오늘이 생겨나고, 오늘의 것에서 내일의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역사나 역사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고 내일의 모습을 그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양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부언한다면―.
애초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영웅은 없다’라고 붙이려 했었다. 그러나 고심 끝에 그냥 ‘초한지’라고 했다. 혹 이 책을 통해 위대한 영웅의 활약상을 기대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죄송한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를 통해 영웅은 없다, 있다면 바로 보통사람인 ‘우리’ 자신이 영웅이요 시대의 주인공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