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인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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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중국 봉천(심양)에서 림준철 목사(건국 훈장을 받은 독립 유공자)의 손자이자 부(父) 림재수, 모(母) 김숙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북한에서 신의주제2공업학교(일제 때), 신의주공업전문학교(해방 직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6·25전쟁 중 남하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와 경희대학교에서 ‘장한 경희인상(慶熙人像)’을 받고, 한남대학교 명예철학박사, 숭실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림인식 목사는 한국 교회와 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드리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기도하시던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노력, 살아있는 신앙, 애국애족심, 사람을 대하는 온유와 겸손, 진실한 참 목회자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의 기도를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을 체험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종군목사 제도가 시작될 때 자원하여 초창기 군목실장으로 3년여 동안 복무했다. 이후 부산 동광교회를 거쳐 노량진교회에서 32년간 시무했으며, 시무후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6·25전쟁에서 여러 차례 사선(死線)을 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나(吾)가 없는 ‘오로지 목회 우선’으로 충성했다. 하나님께서 그가 시무하는 교회마다 놀라운 성장과 발전, 개혁의 복을 주셨다.
그는 교단 행정에서는 제68회 총회장이자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대회장을 맡아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당시 5천 교회 150만 신도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하여 교단을 획기적으로 배가(倍加)시켰으며, 총회 군목위원장(6년), 도서의료 선교위원장(7년) 등을 맡아 초기 군선교와 섬 의료의 활력과 발전을 도왔다.
교육 분야에서는 숭실대학교 제13-15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맥코믹신학교 한미목회센터 자문위원장(5년)으로 목회자 교육에 힘썼다. 사회 봉사로는 성남 제1실업학교 이사장(10년)으로 난민촌 아동을 교육하고, 민족사랑나눔 이사장(10년)으로 북한 동포 돕기에 앞장서는 등 한국 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또한 극동방송 및 기독교방송에서 10년 이상 꾸준히 설교하며 미디어를 통한 복음 전파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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