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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잡지 > 정기구독
· ISBN : 6000779274
· 쪽수 : 122쪽
· 출판일 : 2025-08-01
목차
목차
햇살 마루 | 아침을 기다리며 - 정용철 님
가꾸는 생활 | 길쭉하고 특별한 추억 - 임이랑 님
동행의 기쁨 | 극지연구소 빙하지권 연구본부 연수연구원 신진화 님
우리가 사랑한 명화 | 햇빛이 뜨거울수록 수확은 풍요롭다 - 정우철 님
특집 | 나의 소장품
함께 그린 오늘 | 연관성 - 이석구 님
노르웨이에서 | 노르웨이의 오두막 - 신하늘 님
나를 흔드는 한마디 | 나만의 고요한 방 - 윤재윤 님
과학의 눈 | 그들이 날아오르는 이유 - 이지유 님
친절한 클래식 | 죽음을 기리는 음악 - 허명현 님
숨은 명작의 즐거움 | 소월 시가 말해 주는 것 - 도종환 님
인류애 충전 | 김밥의 온기
그러나 수기 | 나의 섬, 그래도
좋은날 일력
나를 지키는 법 | 폭행 - 임남택 님
지금, 여기 | 진심을 담은 사랑 - 정두현 님
축하합니다 | 창가의 푸른 나무처럼 외
장사의 기쁨과 슬픔 | 벌레보다 무서운 것 - 김결 님
좋은님 시 마당 | 별이 되어
절기 이야기 | 칠석 하늘을 올려다보니
군대 이야기 |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새벽햇살 | 나의 기억
정기구독 안내
좋은님 메아리
저자소개
책속에서
[1907 큰글씨 특집]
뚜벅뚜벅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 나는 '뚜벅뚜벅'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버지와 가족처럼 산 누렁이 때문이다.
아버지는 곡식을 읍내 오일장에 실어 나르는 달구지꾼이었다. 평생 소를 벗 삼아 농사지으며 살았다. 사람은 밥 한 끼 걸러도 괜찮지만 말 못하는 동물을 굶기면 벌 받는다고 말할 정도로 소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읍내 남원 장까지 이십 리 길. 아버지는 소가 힘들까 봐 달구지에 타지 않고, 나란히 뚜벅뚜벅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짐 가득 싣고 고갯길을 오를 땐 목을 긁어 주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소가 힘내도록 추임새를 넣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소는 재산 목록 1호였다. 밭에 나가 쟁기질, 써레질을 하고 달구지를 끌며 두 사람 몫을 톡톡히 해냈다. 아버지는 소에게 무리한 일을 시키지 않고 틈틈이 쉬게 해 주었다. 가마솥에 보리와 쌀겨를 듬뿍 섞어 여물을 쑤어 주고, 어디를 가든 앞에서 고삐를 잡는 대신 제 속도대로 걷도록 배려했다.
장에 다닐 땐 목에 들꽃 한 묶음을 걸어 주고 고삐에 빨강, 파랑 리본을 감아 소의 기분을 좋게 했다. 아버지는 소의 숨소리만 듣고도 마음을 알아차리고 추슬러 주었다. 소는 아버지와 애환을 함께한 동반자요, 소중한 친구였다.
아버지는 달구지를 끄느라 생긴 신경통으로 고생하면서도 2남 2녀를 묵묵히 키웠다. 가족들은 힘들어도 바른길만 고집하는 아버지를 답답해했다. 우리도 읍내 나가 작은 점방이라도 하나 차리면 이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만큼 사는 것도 고마운 일이라며 누렁이와 뚜벅뚜벅 일만 했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 보니 세상의 순리 따라 별다른 욕심 없이 느리게 산 아버지 뜻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동네에 궂은일이 생기면 솔선수범하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참 지혜로웠다. 지금 내가 삶에 고마워하는 것도 아버지와 누렁이가 뚜벅뚜벅 쟁기질하고 달구지 끄는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 아닐까.
행랑채 헛간에 걸린 아버지의 지게와 쟁기 그리고 손때 묻은 농기구를 보았다. 아버지가 평소 햇볕을 쬐며 쉰 감나무 옆 낡은 의자에 앉으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버지는 정미소 마당에서 노는 나를 주막으로 불렀다. "어서 들어와라. 춥다." 갈퀴 같은 딱딱한 손으로 내 손을 끌어 연탄불을 쬐게 하고 두툼한 돼지고기를 입에 넣어 주었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나하게 취해 "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하고 노래 부르면 논에 있는 기러기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장에 간 아버지를 마중 나가면 어둠 속 소쩍새, 부엉이, 개구리 울음소리에 무서워하면서도 소달구지를 끌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아버지에게 과자 사 왔느냐고 묻기 바빴던 철부지 시절도 생각난다.
행랑채에 걸린 누렁이 워낭을 가져와 베란다에 달아 두었다. 바람이 불면 산사의 풍경처럼 땡그랑땡그랑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면서 고향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고향 산에 누워 농사지었던 들판과 동네, 집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 아버지가 그리우면 워낭을 살며시 흔들어 본다. 아버지와 누렁이 덕분인지는 몰라도 내 사전에 자동차는 없다. 유년 시절 아버지와 누렁이처럼 뚜벅뚜벅 산하를 거닌 기억 따라 평생 이 말을 좋아하며 살까 한다.
강석두 님 | 서울시 강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