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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04031887
· 쪽수 : 160쪽
· 출판일 : 2025-02-28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서문: 케빈 드영
들어가는 글: 신학은 중요하다
1 개혁 신학이란 무엇인가?
역사적·대중적 시각 |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솔라 스크립투라·솔라 피데·솔라 그라티아·솔루스 크리스투스·솔리 데오 글로리아) | 언약 | 신앙 고백 |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2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
왜 성경이 그렇게 중요한가? | 창세기에서 알 수 있는 것들 | 모든 것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구원에 필수다 | 선택 교리 |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3 언약
행위 언약 | 노아 언약 | 아브라함 언약 | 시내산 언약 | 다윗 언약 | 새 언약 |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4 개혁 신학이 주는 복
성경의 안전성 | 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위로 | 하나님의 선택, 그 경이로움 | 언약의 명료성 | 신앙 고백의 투명성 | 개혁 신학은 복인가? |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질문
5 개혁 신학에 관한 질문과 답변
하나님을 더 깊이 알려면 신학을 알아야 하는가? | 개혁 신학이 신약성경을 읽는 데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 어떻게 유아 세례가 개혁 신학에 들어맞는가? 유아 세례를 믿어야 개혁주의자인가? | 개혁 신학은 단지 지성인들을 위한 것인가? | 개혁 신학은 성령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 개혁주의자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까칠하거나 못돼 먹었다. 왜 그런가? | 개혁 신학은 자유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가? 개혁 신학은 인간을 로봇이 되게 하지 않는가? | 개혁 신학은 선교와 복음 전파를 덜 강조하지 않는가? | 내가 개혁 신학의 교리들 중에 어떤 것들은 좋아하지만 어떤 것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개혁주의자인가? | 내가 개혁 신학을 확신하지만 개혁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교회가 개혁 신학에 왜 중요한가? | 개혁 교회를 어떻게 찾는가? | 개혁 신학이 예배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 개혁주의 예배는 로마 가톨릭 예배와 같지 않은가? | 개혁 신학은 내 가족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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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 서문: 케빈 드영 중에서
장로교 개혁 교회는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길 좋아한다. 이는 자주 회자되는 말로서, 때로는 웃자고 하는 말이고 때로는 짜증 섞인 말이다. 이 말 뒤에 자리한 유머와 불만 둘 다 이해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안을 사랑하고, 우리의 의사록을 사랑하며, 우리의 치리회를 사랑하고, 우리의 위원회를 사랑한다. [중략] 우리는 교회 직분자들이 세 가지, 곧 성경과 우리의 신앙 고백과 제목에 ‘질서’(Order)가 들어간 문서(미국장로교 헌법은 신앙 고백서[Book of Confessions]와 규례서[Book of Order]로 구성된다-역자 주)를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할 만큼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처리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극단적 개혁주의의 여러 형태를 불신하며 고개를 젓기 전에, ‘품위 있고 질서 있게’가 장로교의 취향이기 이전에 성경의 명령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4:40을 보라). 바울은 교회를 향해 예의를 갖추고 단정하며 대열을 지은 군대처럼 질서를 유지하라고 명한다. 이 명령은 성경에서 성(gender)에 관한 혼란, 주의 만찬에 관한 혼란, 영적 은사에 관한 혼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혼란, 공예배에 관한 혼란을 다루는 부분에 맞춤한 결론이다. ‘품위 있고 질서 있게’는 고린도에 팽배했던 무질서에 비하면 상당히 좋게 들린다.
장로교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전형적인 공격이 있다. 머리는 뛰어난데 가슴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 없는 금욕주의자이며, 도무지 바뀔 줄 모르는 별종이고, 얼음장 같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은근한 모욕에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교회에서 질서의 반대는 거침없는 자발성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혼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평화보다 혼란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고전 14:33을 보라). 하나님은 절대로 신학과 송영(doxology)이 맞서게 하거나 머리와 가슴이 맞서게 하지 않으신다. 데이비드 갈런드(David Garland)는 이것을 귀에 쏙 들어오게 표현했다. “열정의 성령은 질서의 성령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의 서문을 써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기꺼이 응했다. [중략] 세밀하고 균형 잡혔으며 논리 정연한 이 시리즈가 장로교 개혁 교회의 서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의 기본 요소들에 관해 생각이 깊고 연륜이 쌓인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위해 쓴 짧고 읽기 쉬운 책이 필요하다. 이 시리즈가 바로 이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준다. 다시 말해, 교회가 마주하는 매우 긴급하고 실제적인 숱한 질문들에 지혜롭게 답해 준다.
[중략] 모든 교회가 어떤 식으로든 예배하고, 어떤 식으로든 기도하며, 어떤 식으로든 인도를 받고, 어떤 식으로든 틀을 갖추고, 어떤 식으로든 세례를 베풀고 주의 만찬을 행한다. 모든 교회가 어떤 식으로든 신학을 살아 내고 있다. 설령 그 신학이 성경의 원리가 아니라 실용주의에 기초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나누는 삶이 최고의 성경 해석과 신학과 역사적 고찰을 통해 빚어지길 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없기보다 깊이 생각하길 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모든 것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길 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장로교 개혁주의의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며, 장로교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 노스캐롤라이나주 매슈스 소재 크라이스트 커버넌트 교회 담임목사
§ 1장. 개혁 신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개혁 신학(Reformed theology)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교회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라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 그 무엇이 개혁주의적(Reformed)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개혁 교회 교인들은 서로 “언제 개혁주의자가 되셨나요?”라고 하거나 “왜 개혁 교회를 찾으셨나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들이 무슨 뜻인가? 이 질문들이 무엇을 향하는가? 이 질문들이 중요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이러한 일반적 질문들에 답하는 일이 놀랍도록 복잡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리폼드’(Reformed)라는 단어가 역사가 길고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개혁 신학은 때로 엄격하게 역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때로 좀 더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은 때로 엄밀하고 전문적이라는 뜻이지만 그 의미가 상당히 기본적일 때가 많다.
역사적·대중적 시각
가장 기본적으로, 개혁 신학이란 용어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서 비롯된 신학적 결론을 가리킨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장 칼뱅(Jean Calvin) 같은 초기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에 형성한 로마 가톨릭 신학을 날카롭게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예배가 비성경적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로마 가톨릭이 칭의의 본질과 개개인을 구원하는 믿음의 자리에 관해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이 교황의 권위에 관해 내세우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직 성경이 교리 논쟁에서 최종 권위를 갖는다고 단언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이들은 세례와 성찬의 장소와 의미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이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이 두 중요한 성례에 대한 성경의 정의로 돌아갔다. 이것들은 역사적 관심사였으나 지금도 여전히 개혁주의의 중심에 자리한다.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루터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칼뱅을 비롯한 유럽 종교 개혁자들과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차이는 주로 성례와 예배에 집중되었고, 이 차이 때문에 루터교는 나머지 프로테스탄트와 구분되었다. 루터를 따른 사람들은 루터교도(Lutherans)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머지 종교 개혁자들을 따른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개혁주의자(Reformed)라 불린다.
그러므로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개혁 신학이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서 비롯되었으며 비루터교의 가르침을 담은 신학이다. 이 용어는 이렇게 역사적 방식으로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개혁 교회들 및 교단들을 하나로 묶는 역사적 신앙 고백들 가운데 하나를 고수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대중적 용례에서, 개혁 신학은 흔히 이른바 ‘칼뱅주의 5대 교리’와 동일시된다.
1.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인간은 아담의 죄 때문에 완전히 타락했다는 믿음.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이 자신이 구원하는 자들을 자신의 주권적 사랑으로, 이 사랑을 받는 자들의 그 무엇과도 무관하게 선택하신다는 믿음.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죽음이 특정한 자를 위해 속전을 지불하며 그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믿음.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은혜가 의도한 결과가 구원받는 자들에게서 성취된다는 믿음.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자들이 마지막까지 보존되리라는 믿음.
이 모든 믿음은 실제로 개혁주의 전통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것들이 오늘날 알려진 두문자어 TULIP으로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은 수세기가 지난 후였다. 그렇더라도 이것들은 1600년대 초 개혁주의 공동체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에 대한 대응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이러한 칼뱅주의 5대 교리는 구원에 관한 성경의 핵심 진리를 잘 요약하기는 하지만 개혁 신학을 완전하게 요약하거나 정확하게 기술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개혁 신학이나 개혁됨(being Reformed)을 말할 때 역사에 덜 기초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누군가 개혁 신학을 고수한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죄인들을 택하고 구원하는 데서 작동하고(예정론)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되고 무오하며 절대적 권위가 있음을 믿는다는 뜻일 때가 많다.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
그러나 개혁 신학이란 용어를 정의하는 더 나은 방법들이 있다. 장 칼뱅을 비롯한 초기 개혁자들에게 개혁이란 단지 구원론에 관한 게 아니었다. 예배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두 주된 관심사 외에도 믿음과 실천을 비롯해 개혁주의 가르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개혁 신학을 정의할 때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sola, ‘오직’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알려진 좀 더 완전한 출발점을 제안했다. 이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함께, 이 다섯 단언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핵심 관심사를 아주 분명하게 표현한다.
솔라 스크립투라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최종 권위라는 것을 강조한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당시,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이, 비록 영감되고 오류가 없더라도, 다른 형태의 권위, 곧 교회 전통과 교황의 공식 선언에 기초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것은 성경 해석이 교회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에 종속되었으므로 교회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이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는 내용에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기능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전혀 직접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교회를 낳았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고,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했다. 성경 연구가 허용된 사제들조차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존 관습을 위협하는 가르침을 주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감시받았다. 마르틴 루터가 파문당한 것은 상당 부분 그의 가르침이 로마 가톨릭의 기존 관습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초기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이 성경을 대하는 방식에 큰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근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갖는 본질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오류가 없으며, 근본적으로 권위가 있다. 이 진리를 훼손하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초기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이 성경을 대하는 방식에서 교회가 늘 믿었던 것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전통은 개혁자들 편이었고, 중세 말의 교회는 사도들과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믿음과 가르침을 떠났다.
오늘날,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원리는 신학과 예배가 언제나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과 행위의 최종 판단자요 인도자다. 우리는 중세 말의 세상에 살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대체하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교황이나 교회 전통이 아닐 것이다. 대개 우리를 이렇게 유혹하는 것은 때로 우리 문화에서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려는 자들, 곧 사회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연예인들의 가르침이다. 대중문화의 가르침이 최종 권위일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문화 엘리트의 권위와 충돌하지 않는 것만 믿을 것이다.
이것은 예배 문제에서 특히 중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예배는 종교 개혁에서 매우 중요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게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개혁 신학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 모든 질문에 답하셨다고 가르친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예배의 안내자이며,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관습은 그 어떤 것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둔다. 이런 일이 종교 개혁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자신들의 바람이나 경험이나 개인적 성향과 충돌하지 않으면 성경을 따른다. 때로 감정과 성향이 깊이 느껴진다. 때로 여기에 초자연적 계시나 하나님과의 개인적 만남에 관한 주장이 포함된다. 어떤 경우든, 개인의 감정이나 경험이 최종 권위이며, 여기에 복종하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압박한다. 경쟁하는 권위가 무엇이든 간에, 교황이든 문화 엘리트든 사적 감정이든 간에,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개혁주의 교리는 오직 성경만이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단언한다. 성경은 유일무이하게 하나님의 영감된 증언이며, 역사 내내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가르침과 윤리적 결정과 예배 행위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후략]